기억의 비등점

by 짧아진 텔로미어

기억의 비등점


우리가 무표정하게
비등점에 다가서며 얼어갈 즈음
잔속의 커피 향은 냉각점에서 기화되었다.

기울일 때마다 한 모금씩 휘발된 기억의 밀도.
향기를 머금은 기억은 쉽게 마모되었다.

잔의 곡선을 따라 굴절된 향은
단 한 번도 지나간 시간과 평행하지 않았다.
다른 시간의 층을 지나친 우리는
서로의 그림자 방향에서만 마주친다.

반쯤 기울어진 유리잔.
그 그림자가 닿는 거리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기억의 향을 말한다.

언어가 굳어가는 시간이 오면
기억의 이음새가 서로를 밀어내고

투명한 벽을 세울수록
빛은 기억의 모서리를 도려냈다.
모서리를 잃은 이정표는 길을 잃었다.

필터를 타고 흐르는 커피 방울.
젖은 우산 끝에서 추락하는 물방울.
소리는 다르지만, 무게는 같다.
서럽도록 같은 향이다.

온기가 다 식고 나서야 알게 된 것들.

격렬히 얼고
고요히 끓은 기억.
우리는 결국 다른 향임을.

같은 향이, 같은 시간을 담지 않는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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