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에 겁탈당한 꽃은
흐트러진 잎맥을 빗어 내렸다.
꽃잎을 여미어도
부풀어 오는 만삭의 계절을 가리지 못한 채
그늘에 숨어 산고를 견뎠다.
햇빛은, 외탁을 해
반쯤 꽃을 닮은 표정을 지었다.
정체성은
조작된 더위의 알리바이가 되었다.
덥다는 건, 건너뛴 정체성이 체온에 남는 일.
봄을 입에 올릴 때마다 혀를 데이고
말라붙은 속눈썹 너머 봄은 눈을 반쯤 감았다.
꽃은 입을 다문다.
바람 속에 숨는다.
반쯤 익어 도착한 아침,
소속을 잃은 열기.
햇빛이 침범한 무게만큼 여름이 범람한다.
그림자 뒤로 그림자 진 나.
폭염은 만개한 얼굴로
풍경을 그을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