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절한 관심과 적절한 무관심의 경계는 어려워
아이가 어릴 적 어린이집이나 초등학교에서 행사가 있을 때는 늘 참석하려고 애썼다.
늦지 않게 갔음에도 엄마가 왔는지 다른 부모들 사이에서 애타게 나를 찾는 아이를 발견하면 괜히 짠해져서 최대한 빨리 보라고 손을 크게 흔들어 아이 마음을 안심시키고 싶어 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학교에는 여전히 여러 가지 행사가 열린다.
그러나 이제는 와도 되고 안 와도 상관없다고 말하는 청소년이 되었다.
아직은 관심이 필요하겠지 싶은 마음에 종종 참석하곤 하는데 반가움보다는 회사에 불시에 출몰한 부인 바라보듯 불편한 기색을 보이는 모습에 예전처럼 손을 흔들어 반가움을 표현하는 것도 조심스러워졌다.
적절한 관심과 적절한 무관심의 경계는 하루하루 얇아져서 가끔은 습자지처럼 앞뒤가 비칠 정도다.
관심을 바라면서도 무관심을 바라는 아이에게 그 어려운 것을 어떻게든 맞춰서 너도 나도 상처받지 않고 훈훈한 마음으로 하루를 마감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때때로 아이가 다가와 뭔가를 바라는 건가 싶은 반가움에 순간 사랑이 넘쳐 관심을 주면 가차 없이 차가운 칼 말로 끊어버리기 일쑤다.
아이를 향했던 따뜻한 마음은 그 차가운 칼 말에 수도 없이 베이고 상처 입는다.
상처 입고 아픈 게 두려워 살짝 무관심으로 물러나면 또 슬금슬금 다가와서 사랑을 바라는 그것이 청소년 시기인가 보다.
언젠가부터 아이에게 상처받을 때마다 미안함도 함께 밀려든다.
나도 엄마는 처음이지만 청소년기 경험은 있다.
아이의 종잡을 수 없는 행동과 마음이 어렴풋이 이해가 가기도 하는데, 이제는 떠나고 안 계신 친정엄마의 그 옛날 심정도 순간순간 헤아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겪어보지 않으면 절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감정의 영역이 있다는 걸 살면 살 수록 알게 된다.
아이가 바라는 관심과 무관심의 경계를 이해하고 어느 순간 얼추 맞춰졌을 때 우리는 어느새 어른과 어른이 되어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러는 동안 크고 작은 상처를 내며 시간을 채워 나갈 것이다.
하지만 그 또한 단단한 관계를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기억에 새겨진 친정엄마와의 관계를 통해서 나는 그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