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춤한다. 책이 애매하게 크다. 흔히 보는A5국판은 148 ×210이다. 이 174 ×225는 신국판도 아니고 크라운판도 아니고 고민한 크기이다. 크기도 부담스러운데 두께는 608쪽이다. 사진이 많아서 고급종이를 썼나, 책값이 32,000원이다. 1126g, 무겁다.
표지가 빽빽하다. 벽에 거는 그림지도를 174 ×225으로 축소한 사진이니 눈이 아프다. 제목도 불편하다. '도시그림'이란 부제를 붙여놓고 만화경이라니! <도시를 보는 거울>보다 <만화경으로 본 도시>가 솔깃하지.
저자에게는 호감이 생긴다. 유홍준의 집을 지은 승효상, 원주 뮤지엄산의 안도 다다오와<어디에서 살 것이냐>는 유현준 들의 건축학자에게 이미 박수한 터이다. 아들에게 받은 이 책을 구경삼아 편다. 건축학자가 세계 15개 도시를 두 번 세 번 밟으며 쓴 책이다. 여행가이드가 아닌 건축학자의 눈을 따라간다.할멈이 그림지도에 빠진다.
겁劫은 인간세계 4억 3천2백만 년의 시간이란다. 지구 역사 45억 년은 우주 역사에 비하면 점이다. 중세와 르네상스 때 그려진 그림지도들을 보며 공간을 넘어 시간을 여행한다. 지구는 우주 속의 먼지 한 톨인데 먼지 속의 작은 인간은 한 우주이다.
사람이 많다. 그림지도를 그린 사람과 산 사람, 그림지도 속의 사람, 그림지도를 보여 주는 사람과 읽는 사람. 사람은 점이다. 여행을 마친 사람, 여행 중인 사람, 여행을 시작하는 사람. 사람은 티끌이다. 오밸리스크를 만든 이집트 사람도, 빼앗아 온 로마 황제도, 약탈해 온 물건을 구경하고 환호하는 중생도.
역사는 팔림프세스트이다. 귀한 양피지에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하듯 작은 지구에 사람이 살고 죽기를 반복한다. '나'라는 우주에 새기고 잊기를 반복한다. 만화경으로 꼼꼼하게 살펴보니 인간은 모두 팔림프세스트palimpsest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