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쯤 잠긴 무대, 흐름과 머무름의 미학이 일어나는 곳, 에너지와 영양분이 생성되고 분배되는 곳, 둠벙, 물과 뭍의 경계, 생태계의 보고, 질소와 탄소저장고, 예술적 영감이 되는 곳. 습지이다.
<비숲> 작가 김산하의 <습지주의자>를 읽는다. 2년 전에 혼자 읽고 이번에 함께 읽는다. 혼자 읽으면 '마을 천변의 잡풀들이 깔끔하지 않아도 생태계의 보고'라고 혼자 생각한다. 함께 읽으면 공감하는 동지를 얻는다.
지난 여름, 포항시에서 조성한 냉천 맨발로를걸었다. 시멘트로 덮인 천변을 얼핏 깔끔하다. 천변은 평소 물이 흐르지 않아도 습지이다. 그 습지의 풀들을 걷어내고 시멘트를 발랐다. 시멘트 포장 위에 운동기구들과 조형물들을 적당히 코디하여 공원을 만들었다. 물도 없고 그늘도 없는 공원이었다.
습지의 가치를 모르면 잡풀로 덮인 천변보다 시멘트 공원이 나아 보인다. 행정가들은 평소 마른 듯 젖은 듯한 습지의 가치를 알아야한다. 알고도 주민들에게 당장 박수받고자 보기 좋게 다듬는가. 환경운동가들이 내일을 걱정하는 소리는 듣지 않는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습지는 계속 파괴되고 있다.
-선생님, 저희들 습지 보러 갑니다. --어디로 가나요? -주남저수지, 동판저수지에 가요. --멀어요. -두 시간 걸립니다. 책 읽은 김에 갑니다. --같이 갑시다.
함께 김산하의 <습지주의자>를 읽고 조지 윈스턴의 <습지의 외침>을 듣고 슐레비츠의 <새벽>을 본다. 우리는 습지의 가치를 알고 나서 어차피족을 사양한다. 습지를 아끼는 최소한족이 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