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쉬맨이었다. 수업 중에 교양학부 건물 주변을 돌며 구호를 외치는 무리를 처음 보았다. 낯선 풍경에 신입생들은 아무도 동요하지 않았다. 어느 날은 건물 현관의 한쪽 벽을 차지한 대선배 박**의 부조상이 달걀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학도호국단을 조직하고 지리과 동기가 여학생부장이 되었다. 우리 과 여학생들은 아무도 호국단 활동을 하지 않았다. 나는 동생과 자취하며 학점 따느라 고달팠다. 나는 코 앞의 내 문제로 헉헉거리며 민주화운동에 한 번도 참여하지 못했다. 성적순으로 공립중고등학교에 발령 내는 제도에서 나는 오지로 갈 성적이었다. 공립학교를 포기하고 시내 사립학교에 발령받았다. 함께 발령받은 심 선생은 학도호국단 간부를 지낸 그 동기였다. 학생들을 잘 리드하던 심 선생은 4년 만에 퇴직하고 나는 안티재단파로 남았다.
동시대를 살았던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를 읽는다. 1970 ~ 80년대, 나는 내 문제만 바라보고 그녀는 시대적, 사회적 문제를 본다. 나는 교사로서 안정되게 직장 생활하고 그녀는 이 일 저 일을 한다. 나는 결혼하여 아이를 키우고 그녀는 미혼으로 정신분열증을 얻는다. 맏이의 짐을 진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고 그녀에게는 선택할 여지가 있었다.
자칭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들은 어둡고 절망적이다. 현재 건강을 잃고 가족이 없는 시인이 안쓰럽다. 잠시 미안해지지만 거듭 생각하니 미안해할 일이 아니다. 나는 내 그림을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그림을 그린다. 각자 한 편의 인생을 그린다. 무더위 중에 황금비나무가 꽃을 피운다. 눈부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