뮌헨대학 대강의동 2층 난간, 무엇인가 깨알같이 타이핑되어 있는 전단지 백여 장이 일시에 흩날렸다. 전단지는 한 소녀의 손을 떠나 허공에서 그네를 타듯 흔들리며 1층 로비를 향해 낙하했다. 브리프케이스 안에 더 남은 종이가 없음을 확인한 숄 남매(오빠 Hans Scholl, 동생 Sophie Scholl)는 1층으로 내려오는 계단을 타고 황급히 도망쳤다. 몇 발짝 떼지 않아 휴식 종이 울리고, 순식간에 복도는 학생들로 가득 찬다. 다급한 둘의 눈빛 뒤로 그들의 뒷덜미를 잡는 억센 손과, 강의를 막 마치고 나온 프록코트 차림의 한 남학생이 수많은 인파 속에서 주워 읽은 하얀 전단지, '히틀러 타도'.
Theme II
조피 숄이 어린 시절부터 국가사회주의에 대한 반감을 가져왔다고 쉽게 생각할 수 있다. 이 책을 읽기 전 나 또한 그랬다. 나치당이나 히틀러 유겐트(Hitlerjugend: 14~18세로 조직된, 히틀러를 추종하는 청소년 조직으로서 단합활동 외에 학교나 가정 등에서 반(反) 나치즘 행동을 색출해내는 일을 맡았다)에 발을 디디면 그 단체들이 갖는 세뇌교육이나 강령 때문에 빠져나오기가 어렵다고 단정 지었기 때문이다. 물론 발키리 작전을 주도했던 슈타펜베르크 같은 사람들이 히틀러 암살을 기도했지만 어디까지나 군 내에서의 이해관계 문제였고, 이 작전은 군 책임자로서 패전의 분위기가 짙어지는 와중에 더 이상의 손실을 막기 위해 내린 전략이라 볼 수도 있다. 이런 면에서 숄 남매와 그 친구들의 전향은 전향 이전과 이후 사이의 깊은 단절성을 느끼게 한다.
소피 숄(Sophie Scholl, 1921~1943)은 반나치조직 '백장미'의 일원이기도 했지만, 평소에는 독서와 수영을 즐기고 친구들과 수다떨기를 좋아하던 평범한 소녀였다.
Development- 발전부
이번 계획은 전적인 내 책임이다. 나치즘을 규탄하는 80에서 100장의 전단지를 직접 살포했으며,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일 의도나 적극적 협조를 기대하지는 않았다.
조피는 심문관에게 흐트러짐 없이 말한다. "전쟁에서 독일은 이미 패배했다.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은 헛된 희생을 치르고 있으며, 이러한 헛된 희생을 조속히 멈춰야 한다고 결심했을 뿐이다."
심문관은 회유책으로, 그녀가 10대 소녀시절에 히틀러 유겐트에서 죄플링엔 소녀단 분대장으로 활약했던 일과 블룸베르크에서 전시 후방근무를 성실히 수행하던 일을 꺼내며 그녀의 공을 치하한다. "원래 그대는 사상이 투철한 자랑스런 독일 국민이다. 잠깐의 패전 소식에 마음이 흔들렸을 뿐이다. 이제라도 그대의 진심을 밝힌다면 조용히 풀어주겠다." 소피는 고개를 조금 떨군 채 눈을 감는다. '오히려 나의 저항의식이 저들에게 표면적인 것일까 두렵다.' 그녀는 다시 생각한다. '언제였을까, 내 저항의식이 발원한 것은?'
소피가 히틀러유겐트에 입단하던 날, 단체장은 청소년들에게 강하고 튼튼하고 활기찬 젊은이가 되어야 한다고 그들을 고무했다. '젊은 세대만이 새 독일을 창건할 수 있으며, 평화를 지향하며, 계급이나 신분이 아닌 신의로 뭉친 민족이 되어야 한다.' 청년단의 강령은 세계 1차 대전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모든 국민들의 마음에, 그리고 숄 남매의 마음에 부푼 꿈을 심어주었다. 그렇게 위대했던 이상이 날이 갈수록 조금씩 변질되었다. 사회 현실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시사했던 여러 예술작품과 사상이 국가에 의해 통제되었고, 국가가 지정한 단체 이외의 사조직 결성이 금지되었다. 더욱이 소피가 같은 반 같은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유대인들에 대한 탄압이 거세어졌다. 이런 상황 속에 숄 남매는 새로이 만들어지는 독일의 모습이 모두의 평등한 독일이 아닌 '누군가'만을 위한 독일임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며 2차 대전의 막을 열었을 때 비로소 숄 남매는 자신들이 배워왔던 평화롭고 강건한 독일이 아닌, 탐욕스럽고 잔인한 독일의 모습을 보았다. 나치는 자신들의 야욕으로 이상적인 독일 모습을 훼손시켰고, 결국에는 전쟁을 통해 히틀러 개인만의 제국을 세우려는 야욕을 보여주었다. 나치는 독일을 이끌어가는 최고 권력이었지만, 조피 숄의 눈에는 바람직한 독일을 위해 하루빨리 사라져야 할 존재였을 뿐이다.
뮌헨대학 대강의동 2층 난간, 조피 숄의 오빠 한스 숄이 작성한 반(反) 나치 호소문 수백 장이 일시에 흩날리며 1층 로비를 향해 떨어졌다. 전단의 표제는 '백장미(Weiße Rose)', 숄 남매를 중심으로 나치즘에 대항하여 조직된 대학생 비밀결사단체의 명칭이다. 힘들었던 전쟁은 이미 끝이 났고 히틀러도 자살하여 이 세상에 없었다. 1층 로비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흩날리는 전단을 바라보며, 또 주워 읽어보며, 주인공이면서도 정작 그 자리에 없는 어느 남매를 추억했다. 1943년 2월 22일, 화창한 날에 소피와 한스는 계속되는 회유를 거부한 채 단두대 위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들의 동료였던 크리스틀도 동일자로 처형되었다. 처형되기 전 재판정에서 소피는 그녀가 어릴 적부터 가슴에 간직해 왔던 도덕률을 밝힌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말과 글을 기억할 것이다. 다만 지금은 용기가 없을 뿐이다... 진실을 직면할 용기가 없을 뿐이다.
Theme II'
조피와 한스가 어릴 때부터 마음에 품어왔던 것은 국가사회주의 이념을 향한 반감이 아닌, 진실을 직면할 용기였다. 그 용기로 말미암아 히틀러유겐트와 군복무를 비롯한 전시활동 속에서도 나치가 저지르는 악행을 발견할 수 있었고, 적은 수가 모여서나마 모순에 저항할 힘을 꾸준히 길러나갔다. 히틀러에 저항했던 독일군 세력이나 연합군들과는 달리 그들의 행동은 개인의 자유와 평화에 대한 도덕적 수호의지, 그것을 지키려는 용기에서 비롯한 것이다. 조피가 신앙적으로 의지했던 예수 그리스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이 가르침이 조피에게 어릴 적부터 용기를 심어 주었고, 이 용기를 따라 불의에 저항한 숄 남매의 행동과 그에 따른 희생은 그들 양심의 완성이 된 것이다.
Coda
히틀러의 마지막 타자수는 2002년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한 가지 고백을 한다.
"종전 직후 나는 나치에 부역했던 사실을 '어려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핑계로 합리화했습니다. 하지만 소피 숄의 동상을 우연히 본 뒤, 젊음이 죄를 위한 변명으로 남을 수 없음을 깨닫고 부끄러워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