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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환 Jul 29. 2020

[독서노트]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장 P. 사르트르 지음, 박정태 옮김, 이학사)

17.10.31 완독


철학은 항상 상위의 방향으로 수렴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제일 좋은 답변을 이 책이 주고 있다고 본다.


나는 이 책을 철학을 말하는 책이라고는 하겠지만 철학책이라고는 말하고 싶지 않다. 철학책은 예수의 임재에는 비하지 못하더라도 케리그마(kerygma, 진리에 대해 선언, 선포하는 것. 예를 들어 예수는 바리새인 앞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포'했을 뿐 자신을 믿으라고 '설득'하지는 않았다)를 가져야 하며, 상위의 방향으로 애써 수렴하려는 노력이 없더라도 하위의 방향으로는 수렴하면 안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철학자의 사상이 호소력을 갖는 까닭은 그것이 설득하는 모델이 아닌 선언하는 모델을 택하여 쓰이는 데에 있다. 사상을 체계적으로 논해야 할 철학책이 설득하는 모델을 취한다면, 또는 철학사상을 설득하려 한다면 논리를 전개하며 오히려 모순점이 만들어진다.


사르트르가 실존을 나타내는 은유로서 병사들을 전쟁터로 보내는 지휘관의 불안을 들었던 것은, 사실 실존의 불완전한 설명이다. 앙가제(s'engager, 자신의 행동이나 신념이 비의도적으로 사회에 영향을 끼치는 일)의 양상이 결핍되어 있고, 기투(project, 세상의 다양한 가능성에 자신을 내던져 스스로 삶을 구축하는 일)된 존재의 근본적 불안을 납득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청나라 황제 옹정제가 '만주족 황제'로서의 비-정통성을 비판한 증정을 심문하며 자신의 왕위 계승에 대한 정당성을 <대의각미록>에서 변호한 일과 같다. 중화사상을 새로이 정의하려다 화이사상을 인정하게 됐으니 후일 건륭제가 아버지 옹정제가 편찬한 <대의각미록>을 전부 회수하여 소각한 것이다. 전제왕권은 본디 이성적으로 설득될 수 없는 것이기에. 철학책이 독자에 대해 갖는 역할도 억압하지 않는 전제왕권, 또는 밥 딜런의 말처럼 '그저 여기에 있을 뿐'이라 있는 존재로 남아야 하지 않을까.

저자 장 폴 사르트르(1905~1980), 지식인이 사회에 수행해야 하는 의무를 강조했다. 출처:goodreads.com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결실을 거둔 부분이 있는데, 바로 언론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이다. 실존주의를 논했던 3,40년대의 프랑스인들은 대부분 유신론적 관점에서(Kierkegaard 혹은 Marcel의 관점에서), 자연주의 이상으로 인간에게 냉정하다는 비판 아래 실존주의를 가두었다. 그리고 분명 그들의 견해는 사르트르의 견해를 잘못 이해하는 것이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철학자는 문자로만 답하는 불문율이 존재했지만 사르트르는 이것을 과감히 깼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부터 1946년에 개최된 한 강연 내용을 그대로 출판한 책이다. 학교나 살롱이 아닌 대중들 앞에서 실존주의를 변호하려 했던 사르트르는 단연 주목받았고, 실존주의에 대한 더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철학에서의 이런 성과는 마르크스주의가 대표적인 듯하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마르크스가 직접 그의 이론을 설득시킨 것이 아니라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까지의 인터내셔널을 비롯한 여러 투쟁적 움직임들이 마르크스 열풍을 불러왔다. 이에 반해 사르트르의 선택은 어디까지나 스스로의 기투에 달려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다만 그가 제시한 예시들은 여전히 곱씹어봐야 한다. 삶에서의 여러 실패 끝에 수도사가 된 청년이나, 홀어머니를 부양하는 것과 조국 독립을 위해 레지스탕스가 되는 것 사이에서 갈등하는 아들의 이야기는 실존주의의 '단면'을 보여줄 뿐 실존주의의 모든 설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 이야기들은 실존주의 방향으로도, 다른 철학적 방향으로도 사유하며 그 결과물을 서로 비교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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