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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환 Jul 14. 2020

물 위에서 시간을 노래함-1

슈베르트 가곡 <물 위에서 노래함>을 듣고 남기는 긴-- 감상

(표지 출처: https://www.swedishnomad.com/lake-plansee/)


17년 10월 탈고


1. 시간의 양면성, 물이라는 은유


시간은 움직인다. 그 누구도 시간의 모습을 본 일이 없다. 다만 사물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신들의 모습을 바꾸어가고, 시간은 자기 안에 거하는 온갖 생물과 무생물의 변화 양상을 통해 자신의 움직임을 증명한다. 다르게 말해 자신의 움직임을 사물에 투영하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시간이 움직이므로 삶이 존재할 수 있음과, 삶을 통해 시간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시민들의 환호에 둘러싸인 로마 개선장군의 귓가에 노예가 끊임없이 ‘메멘토 모리’를 속삭였듯이, 무(無)의 끈질긴 가능성 역시 시간으로부터 비롯된다. 사물의 모든 생장과 활동이 정지하는 상태가 죽음이라면, 시간은 또 다른 측면에서 죽음의 선결조건인 것이다. 움직인다는 시간의 특성으로 말미암아 창세로부터 길게 이어져 온 시간 속에서 사물들의 탄생만큼이나 숱한 죽음이 있어 왔다. 그것은 우리에게도 가까워지고 있다. 우리 일생에 투영된 시간은 우리의 삶을 싣고 결국 모종의 종착점으로 진행한다.

시간에 내재된 이러한 양면성을, 물은 지상의 물질들 중 가장 잘 구현해낸다.

물은 움직인다. 파도는 포효하며 해안가로 달음박질하고,

(Es ziehen die brausenden Wellen wohl nach dem Strand; – H. 하이네 <Es ziehen…>)

강물은 실연당한 사람의 아픔과 그의 연가(戀歌)를 바다로 흘려보낸다.

(Ihr sanget nur zu meiner Lieben /…/ So fließt denn auch mit ihm davon. - J. 괴테 <Am Flusse>)

또한 움직이는 물은 힘을 가지고 있어 마치 각 생명들의 삶을 이끄는 시간과 같이 온갖 크고 작은 물질들을 수면에 실어 나른다.

동시에, 움직이는 물 또한 죽음의 상태를 향해 나아간다. 지상에서 움직이는 어떠한 물이던지 움직이지 않는, 죽은 상태를 향한 지향성을 품고 있다. 달음박질한 파도는 모래 위에 부딪혀 부서지고,

(sie schwellen und zerschellen wohl auf dem Sand. – H. 하이네, 앞의 시)

연가를 실은 강물은 망각의 바다로 모여든다.

(Verfließet, vielgeliebte Lieder / Zum Meere der Vergessenheit! - J. 괴테, 앞의 시)

물은 자신의 바깥으로부터 오는 자극에 얼마간 반응하지만 이내 죽어가는 자신의 유동성을 정적 아래 묻어둔다. 이렇듯 물은 시간에 대한 은유로서 자신을 나타내 보인다.


<물 위에서 노래함>을 지은 Friedrich L. Stolberg (www.myartprints.co.uk/a/germanschool19thcentury)

F. 슈톨베르크는 삶과 죽음, 이 서로 다른 두 모습을 동시에 가진 시간의 양면성을 그의 시 <Lied auf dem Wasser zu Singen(이하 <Lied auf…>)에서 물이라는 대상에 투영해 내었다. 이제 <Lied auf…>에서 시인이 어떠한 표현으로 물의 움직임을 묘사했으며 그 표현이 물의 어떤 특성을 말해주는지, 또한 그 특성이 환기하는 두 가지 삶의 특성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려 한다. 그리고 시적 대상으로서의 물이 시에서의 죽음 이미지를 어떻게 견인해 오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대개 시에서 보이는 물은 그 자체만의 움직임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사실상 바슐라르가 <물과 꿈>에서 말했던 바와 같이 ‘물은 순간마다 죽으며 그의 실체의 무엇인가는 끊임없이 무너지고 있’기에, 물의 움직임 이미지는 시의 주체가 되기에 유약하다. 대신에 물은 객체 자리에 가 머문다. 모든 것의 객체로 제일 먼저 지표에 퍼진 뒤 더 많은 지상의 물질을 받아들이는 강한 의지를 물은 운명적으로 타고났다. 일찍이 조선시대 왕방연은 이러한 물의 포용력을 알고 비통한 마음을 물 위에 싣기도 했다.


저 물도 내 맘 같도다 울며 밤길 가누나.

(왕방연의 시조 중 종장)     


다만 그는 흐르는 물소리와 자신의 울음, 또는 울고픈 마음을 동일시하는 데 그쳤을 뿐 그의 울음은 물질로서의 타자 관계를 물과 벗어나지 못한 채 여전히 수면 위에 떠 있다.

그런데 시인 슈톨베르크는 물질을 받아들이는 물의 성질이 물의 물질성을 능가할 수도 있음을 증명한다. 타자를 자신에게 의탁하게끔 만드는 물의 의지는 물의 물질성을 능가하여, 타자와의 결합을 통해 물은 새로운 움직임의 질료로 탈바꿈한다. 물과 타자의 결합은 보다 물의 움직임 이미지를 확고하게 만드는데, 이 새로운 국면에서 타자성은 쓸모없어진다.

<Lied auf…>의 1연에서 빛(Schimmer, das Abendrot)과 조각배(der Kahn)는 질료로서의 물과 결합하는 또 다른 질료로서 물에 유형의 옷을 입힌다. 빛은 물 위에 내려앉아 물결을 반짝이게 하며, 그 사이를 조각배가 거리낌 없이 백조처럼 미끄러진다.     


Mitten im Schimmer der spiegelnden Wellen

Gleitet, wie Schwäne, der wankende Kahn

희미한 빛 한가운데서 반짝이는 파도

미끄러져 간다, 백조처럼, 흔들리는 조각배가     


빛, 조각배와 결합한 물은 물질성이 아닌 반짝이고, 미끄러져가는 움직임의 질료가 된다. 물결 위의 빛은 짧은 순간에 거듭 반짝이지만, 미끄러지며 가는 조각배에게 시간은 오히려 길게 뻗은 길이다. 두 물질은 모두 물의 움직임을 보이는 바탕이 된다. 다만 움직임의 방식이 서로 다른데, 바로 이 점에서 물은 자신의 운동성을 특징짓는 두 가지 움직임의 방식을 넌지시 알린다. 하나는 지금의 순간에 펼쳐지는 약동, 다른 하나는 앞길을 따라 나아가는 전진이다. (2장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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