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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환 Jul 15. 2020

물 위에서 시간을 노래함-2

슈베르트 가곡 <물 위에서 노래함>을 듣고 남기는 긴--감상

17년 10월 탈고


(1장에서 계속) 

빛, 조각배와 결합한 물은 물질성이 아닌 반짝이고, 미끄러져가는 움직임의 질료가 된다. 물결 위의 빛은 짧은 순간에 거듭 반짝이지만, 미끄러지며 가는 조각배에게 시간은 오히려 길게 뻗은 길이다. 두 물질은 모두 물의 움직임을 보이는 바탕이 된다. 다만 움직임의 방식이 서로 다른데, 바로 이 점에서 물은 자신의 운동성을 특징짓는 두 가지 움직임의 방식을 넌지시 알린다. 하나는 지금의 순간에 펼쳐지는 약동, 다른 하나는 앞길을 따라 나아가는 전진이다.


2. 약동-이미지, 전진-이미지


약동의 이미지는 빛의 영향을 받아 순간적이다. 빛과 같은 비물질은 거만하게도 물에게 시적 어휘 겉모습의 변용 가능성을 한껏 요구하고, 이에 약동 이미지에 대한 영감은 용언(用言)의 형태가 주를 이룬다. 약동은 반짝일 뿐 아니라(spiegeln) 부드러이 깜빡인다.     


Ach, auf der Freude sanftschimmernden Wellen

Gleitet die Seele dahin wie der Kahn;

아, 부드러이 깜빡이는 물결 위에 

영혼이 미끄러져 나아간다, 조각배와 같이 

    

또한 약동-이미지는 석양빛과 결합하여 춤을 춘다.   

  

Denn von dem Himmel herab auf die Wellen

Tanzet das Abendroth rund um den Kahn.

그리고 하늘로부터 물결 위로 내려와서는

석양빛이 춤춘다, 조각배를 둘러싸고


약동하는 물, 그 속에서 F. 니체는 무엇보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삶의 시간(aion, Lebenzeit, Ewigkeit)이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에 ‘장기 돌을 가지고 모았다 흩트렸다 하며 노는 소년’이라고 대답한다. 그의 말과 같이 물의 놀이는 수많은 삶의 순간들의 집합이다. 놀이에 참여하는 삶의 순간들은 수천, 수만 개가 모였을 때 거울로서의 미덕을 조금 나타낼 수 있다 해도 각자의 순간들은 이미 만화경으로서의 쾌락을 십분 발휘하고 있다. 

물은 차라리 소년이다. 자신의 모습을 시험 삼아 계속 변화시키면서 그는 자신이 바라보는 세계를 유희의 방법으로 재구성한다. 높고 먼 이상(理想)이나 외부에 맡긴 목적 없이도 물은 삶의 의지를 지금을 위해서, 지금 발하는 것이다. 이로써 먼 데 있는 희미한 빛은 현재의 순간으로 와서 환히 밝혀지고, 약동의 생성과정, 즉, 삶의 탄생과정에 참여하며 존재 준거를 얻는다. 

F. 니체의 초상

이때 유념해야 할 것은, 빛이 비치는 물 표면에 문득 나르시스의 얼굴이 나타나 완전하게 비칠 때 이미 물은 자신의 존재 준거를 바깥의 나르시스에게 빼앗겼다는 사실이다. A. 지드가 <나르시스 론(論)>에서 지적한 대로, 양 떼를 버린 목동이 거울로서의 물 저편에서 이데아를 얻는다 해도 정작 물은 그 이데아에 닿을 수 없다. 물은 그저 정지한 상태로 시인의 외관을 보여줄 뿐이며 그것은 약동하지 못하는 죽은 삶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거울이기를 포기하고 삶 속의 끝없는 Epiphany, 순음과 순치음같이 튀어 오르는 그것을 갈망한다면 빛은 다시금 물에게 탄생의 기쁨을 가져다줄 것이다. 탄생은 끊임없이 새로운 입체적 형상들을 만들어내고, 물의 약동을 지속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Gleitet, die Seele, dahin wie der Kahn

미끄러져 나아간다, 영혼이 조각배와 같이


전진은, 약동과는 달리, 지속성을 지니는 이미지이다. 전진 이미지가 조각배로부터 이동성과 함께 정형성까지도 상속받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정형성은 움직임의 용언을 한정시키는 방향성을 낳는 동시에, 전진 이미지가 약동보다 다양한 형태의 영감을 포괄할 수 있도록 한다. 거기에는 용언뿐 아니라 체언(體言)과 부사어까지도 들어있다. 특히 체언의 형태에서 우리는 변화무쌍한 약동이 감당할 수 없는 아래로의 무게를 느낀다. 

어찌 보면 조각배와 물의 결합으로 탄생한 이미지는 막 미성년의 시기를 지난 청년처럼 외롭다. 소년에서 청년으로 자라면서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보게 되듯이, 그는 뜻하지 않은 생득적 방향성으로 말미암아 움직임의 표현적 변용 가능성이 약동과 견주어 턱없이 결핍됨을 느낀다. 

<Lied auf…>에서도 그의 움직임은 그저 앞으로 미끄러지고 있을(gleiten) 뿐이다. 전진 이미지는 이러한 결핍을 보상받으려 다양한 체언들에 눈을 돌린다. 사실상 시에서 나타나는 백조(die Schwäne)와 영혼(die Seel), 이 단어들 서로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러나 미끄러진다는, 전진만이 가진 고유한 방향성이 백조와 영혼과 결합하여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나타내게 한다. 방향성이 그들을 관통하여 흐를 때 백조와 영혼은 비로소 '저편에(dahin)'이동해가는 질감을 얻는다. 더욱이 영혼과 같이 초감각적 개념에조차도 감각을 부여하는 방향성의 능력은 괄목할 만하다.

<물 위에서 노래함(D.774)>의 작곡자 F. 슈베르트

슈톨베르크는 그의 다른 시에서도 전진으로서의 물의 운동성을 나타내고 있다. 그의 시 <Lied(노래)>에서는 연인의 형상이, 둥실 떠나가는(Entschweben) 전진의 방향성을 얻어 움직임의 질감을 얻는다. 이 질감은 우리에게 화자와 연인 사이 점점 멀어져 가는 심리적 거리를 넌지시 알려준다.     


Es entschwebte den säuselnden Wellen das Bild 

Von meiner Geliebten, holdselig und mild;

속삭이는 물결로부터 형상이 둥실 떠나간다

내 사랑스럽고 온화한 연인의 형상이 

(F. 슈톨베르크의 시 <Lied> 중에서)


전진 이미지에서 나타나는 삶의 형태는 선(線)이다. 약동 이미지에서는 삶의 형태가 매 순간 빛을 발하는 수많은 점들로 되어 있다면, 전진은 물길 위로 정형화된 조각배의 모습을 이어 붙이며 선을 그려 나간다. 비록 삶의 매 순간은 약동 이미지가 지배할지 몰라도 우리는 탄생에서부터 유소년, 청년, 장년의 시기에 이르도록 선을 따라 전진하고 있다. 그 어느 순간에도 이전 시기로의 후퇴는 없다. 시간은 각각의 조각배로 하여금 주어진 물길을 따라, 어떤 마찰에 의한 정지도 없이 다만 미끄러져 나아가게 만든다. 

하지만 전진하는 삶은 결코 삶의 저편에 이상향이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데, <Lied auf…>에서 영혼이 가고자 하는 '저편'도 현재를 등진 이상향이 아니다. 저편은 방향성의 또 다른 말이다. 비록 의식 속에는 목표점이 있을지 모르나 조각배는 자신의 힘으로 물길을 움직일 수 없다. 단지 자신을 받치는 물결이 주는 나아감을 힘입어 ‘저편에 도달하는 것’이 아닌, ‘저편을 향해 가는 것’ 일뿐이다. 저편을 향해 미끄러지는 운동성은 삶의 주편(舟片)들, 이들의 소유물인 백조와 영혼이 유유히 그리는 선에 의해 아름답게 변모한다. 

(3장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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