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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시트콤

의사 왈. 목구멍이 썩어가고 있어요

by 산하 Sanha



바쁜 5일을 보내고 드디어 맞이한 휴일.


아침부터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너 뭐하냐? 아빠가 백양사 가자는데 갈래?"


평소였으면 바로 가겠다고 했겠지만 이번주는 어쩐지 쉬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거절하면 아빠가 실망할까봐 그냥 가겠다고 했는데 이게 왠걸.

전화를 끊자마자 어쩐지 어지럽고 몸이 욱씬욱씬 쑤셨다.


'아 어제부터 목이 따갑긴 했는데 감기인가보다.'


방 한 구석에 있는 목감기약을 빵과 함께 먹고(빈속에 먹으면 위에 치명적이니까)

잠깐 자고 일어나면 낫겠지 라는 마음으로 침대에 누웠다.


근데 뭔가 심상치 않은 이 기분.


방금까지만 해도 통화하면서 소파에서 선풍기를 쐬고 있었는데

지금은 두꺼운 겨울 이불을 덮고 있어도 추웠다.


사실 이런적이 몇 번 있어서 약 먹으면 낫는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곧 백양사에 가야한다는 압박감에 그냥 병원으로 향했다.


저번에 갔던 이비인후과를 찾아 가고 있었는데

바로 한 블록 앞에 가정의원이 보였다.


어쩐지 되게 정이 넘칠 것 같은 외관이어서 평점을 살펴봤더니 친절하다는 후기가 많길래

발을 돌려서 가정의원으로 들어갔다.




쓰고 있던 헤드셋을 벗고 접수대에서 개인정보를 쓰는데 간호사 선생님이 귀로 체온을 체크했다.


"38.3도? 열이 심한데?"


순간 메르스 시절 친구들이 귀에 드라이기를 쐬고 와서 체온 43도 나오던 게 떠올랐다.

고의는 아니지만 괜히 꾀병 부리다가 들킨 것 같은 이 기분.


"(개미 같은 목소리로) 사실 제가 헤드셋을 쓰고와서..."

"헤드셋 쓰고 와도 이렇게까지 안 나와요!"

"아하..(그럼 나 아픈 거 맞았구나..!)"

"(반대 귀에 체온계를 꽂으며) 더 높은데..?"


간호사 선생님이 준 마스크를 쓰고 대기하는데 얼마 안 가 내 차례가 돼서 진료실로 들어갔다.

간단한 질문과 청진기 청음을 하던 의사 선생님은 독감일지도 모른다며 최근에 누구를 만났냐고 물었다.

내 직업은 웨딩스튜디오 포토그래퍼.


매일 다른 사람을 만난다....


어쨌든 입에 막대기를 넣으며 목구멍도 살펴보는데 충격적인 선생님의 말.


"편도염이 심하네. 목구멍이 썩어가고 있어요."

"(입 벌린채로) 에ㅞ..?"


의자를 돌려 내 편도를 보여주더니 하얗게 부어있는 곳이 편도염이고

여기서 더 심해지면 큰일난다며 새벽에 어떻게 버텼냐고 대단하다고 하셨다.


'선생님... 전 2시간 전까지도 괜찮았어요...'


심지어 어제 동료들과 술도 마실 뻔 했고 그 전에는 이틀 연속 소맥을 때렸다.


자기 전에 목 부은 게 다였는데 목이 썩었다니.




은은한 충격과 함께 회복실로 옮겨가 수액 맞을 준비를 했다.


주섬주섬 옷을 벗고 짐을 정리하는데 간호사 선생님이 다가오더니 마스크를 하나 더 건네주셨다.

(마스크를 두 겹으로 쓰라는 의미)


난 대체 지금 어떤 상태인걸까 라는 생각이 들며 간호사 선생님에게 질문했다.


"(마스크를 쓰며) 제가 이렇게까지 아픈거에요..?"

"ㅋㅋㅋㅋㅋ아니요, 주변에 독감 환자가 있어서~ 옮으면 안되니까!"


묘한 안도감과 함께 침대에 누워 엉덩이 주사, 해열 수액, 비타민과 어쩌구 수액을 차례대로 맞았다.


시간은 벌써 11시 30분.


12시에 백양사에 가기로 했는데 도저히 그때까지 수액이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미안한 마음으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르- 달칵,


"여보세요."

"어 아빠. 나 몸이 안 좋아서 병원에 왔는데 편도염이라 열이 38도까지 올랐다. 지금 수액 맞고 있어."

"어어.. 근데."

"나 백양사 못 갈 것 같다고."

"어~ 못가도 돼. 날이 생각보다 춥다."

"어 알았어."

뚝.


아빠는 내 생각보다 쿨했구나.

재촉 전화가 없다 했더니 추워서 갈 생각이 별로 없었구나.

어쩐지 공허해지는 마음을 네이버시리즈 현질로 달래며 누워있는데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어~ 우리 젊은 언니. 어쩜 젊은 애가 맨날 이렇게 아프냐? 늙은 언니(엄마 본인)도 별로 안 좋은데."

"그러게나 말이야."

"열이 많이 나?"

"38.3도 나왔어. 의사 선생님이 내 편도가 썩어가고 있대."

"ㅋㅋㅋㅋㅋㅋ편도가 썩어가? 아이고야."

"어쩌고 블라블라 아무튼 그래."

"그래~ 너 죽 좀 끓여다 줄까? 그냥 흰 죽이 좋냐 아니면 뭐 넣어줄까?"


참고로 우리 엄마는 인생에 죽을 끓여준 적이 두 손가락..? 아니 한 번..?

아무튼 누룽지 외에는 없다고 보면 된다.

세월이 지나며 엄마도 참 많이 변했구나, 우리가 마음에 여유가 생겼구나가 느껴지며 마음이 따뜻해졌다.


"뭐 넣어 줄건데?"

"소고기."

"굿."




수액을 다 맞고 집에 돌아왔더니 아무도 없었다.


분명 혹시 모른다며 우리집 비번까지 받아갔는데 아무도 없다니.


바로 죽 먹고 약 먹으려고 했는데 계획이 틀어지며 굴러다니던 아몬드 빼빼로를 먹었다.

수액 맞았더니 입맛이 이렇게 바로 돌아오나.


소파에 누워 빼빼로를 씹으며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르- 달칵,


"여보세요."

"어 엄마 어디야?"

"롯데마트."

"뭐 사오게?"

"어~ 너네 아빠가 전복죽 끓여주라 해서 전복 사고있다."


아빠가 그래도 나 아픈 거 신경쓰고 있었구나 라는 생각에 은은하게 감동을 느꼈다.

전복이 아픈 사람한테 더 좋으니까 전복죽 끓여주라고 했나보다.


곧 초인종 소리가 들리고 후다닥 나가서 문을 열어줬더니 엄마 혼자 서 있었다.


"왔어? 아빠는?"

"니네 아빠는 탁구치고 올거야."

"아아"


아빠 오면 불편한데 뭐하지, 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막상 탁구치러 갔다니 허무한 이 마음은 뭘까.

여자의 마음은 어렵다.


집으로 들어와 전복을 보는데 생전 우리집에서 본 적 없는 크기의 완도산 전복이 엄마 손에 들려 있었다.


"이렇게 큰 전복을 샀어??"

"어, 올해 전복이 좀 싸더라."


손바닥만한 전복 8마리에 15,000원 이었다. (싸긴 싸군.)




그렇게 엄마가 끓여준 전복죽에 약을 먹고 졸고있는데 아빠가 왔다.

(엄마는 죽만 끓여주고 조카랑 2시간 동안 영상통화 하고 있었다.)


우리 집엔 작은 냄비밖에 없어서 엄마는 아빠가 먹을 죽을 다시 준비했다.

옆에서 도와주는데 아빠가 자꾸 주방을 어슬렁 거리는 것.

뭐지? 라는 생각에 바라보니 죽에 넣으려고 잘라둔 생 전복을 하나씩 주워먹고 있었다.


"(엄마에게 작은 목소리로) 아빠 지금 생 전복 주워먹은 거야..?"

"ㅋㅋㅋㅋㅋ내가 하도 이런 걸 안 사주니까 먹고싶었나 보다."

"와우."


그때 깨달았다.

아빠는 내 건강에 대한 걱정보다 전복죽이 먹고 싶은 마음이 아주 조금(?) 더 컸다는 걸.


'난 소고기 더 좋아하는디...'




죽까지 다 먹고 아빠는 우리집 베란다에 설치해주기 위해 가져온 블라인드를 꺼냈다.

원래 나사 박힌 자국이 있어서 아주 스무스하게 설치가 진행됐는데 문제는 안방이었다.


난 창문에 침대를 딱 붙여놓고 사는 타입인데


일단 첫째, 아빠가 양말 신고 침대에 올라가 블라인드를 달아줬다.(탁구친 발)

둘째, 나사를 박으며 떨어지는 뭔지모를 부스러기들이 내 침대로 그대로 떨어졌다.

셋째, 난 아빠에게 이 모든 걸 말할 정도로 친한 사이가 아니다.


'마음은 고마운데... 침대 시트 빤지 얼마 안됐는데...(눈물)'


내 베개와 이불은 이미 오염됐다.

일단 털긴 털었는데 내 편도염 더 썩어가는 건 아닐까.


침대 밀어놓고 하라 그럴걸.

난 멍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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