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와 러시아, 그리고 만네르하임
1939년 11월 30일, 스탈린의 붉은군대가 동부폴란드를 집어삼킨 지 불과 두 달 만에, 붉은군대는 북쪽의 핀란드로 향했다. 히틀러의 서부전선이 전 세계의 이목을 끄는 동안, 소련은 자신만의 '레벤스라움(생존공간)'을 발트해에서 찾고자 했다. 몰로토프-리벤트로프협정의 비밀의정서에 따라 소련의 세력권으로 분할된 발트 3국인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는 차례로 소련의 압박에 굴복했다. 그러나 핀란드만큼은 달랐다.
핀란드는 소련의 영토할양요구를 단호히 거부했다. 레닌그라드방어를 위한 카렐리야지협 할양, 한코 반도의 30년 임대, 그리고 소련함대의 발트해 통제권 요구는 핀란드에겐 사실상의 주권포기를 의미했다. 스탈린은 핀란드의 거부를 예상하지 못했다. 그에게 있어서 핀란드는 1918년 적백내전 당시 백군세력이자, 본인체제에 가하는 위협의 근거였다.
*각주
몰로토프-리벤트로프협정 비밀의정서 : 1939년 8월 23일, 나치독일과 소비에트연방이 체결한 독소불가침 조약에 부속된 비밀문서. 공식 조약이 상호 불가침을 약속한 것과 달리, 이 비밀의정서는 폴란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핀란드, 루마니아 등 동유럽 국가들의 영토를 양국의 세력권으로 분할하는 내용을 명시하였다. 이는 제2차세계대전의 발발과 동유럽의 운명을 멋대로 재단한 중대한 밀약이었다. 놀랍게도 소련은 이 추악한 밀약의 존재를 무려 50년간 부정하다가, 체제가 무너지기 직전인 1989년에야 마지못해 인정했다.
카렐리야 지협 : 핀란드만과 라도가호수 사이에 위치한 지협. 역사적으로 스웨덴, 핀란드, 러시아가 지배권을 두고 다툰 전략적 요충지였다. 특히 1939-1940년 발발한 겨울전쟁 당시 핀란드군이 소련군의 침공에 맞서 구축한 '만네르헤임 선'이 위치했던 격전지이다. 전쟁결과, 소련에 할양되어 현재 대부분이 러시아의 레닌그라드주에 속해 있다.
붉은군대의 오만
핀란드의 단호한 거부에 스탈린은 즉각적인 군사행동으로 응답했다. 키릴 메레츠코프가 지휘하는 레닌그라드 군관구 소속 제7군과 제8군, 총 26개 사단 45만 명의 병력이 '몇 주 내 헬싱키 점령'이라는 낙관적 목표설정 하에 국경을 넘었다. 소련군은 1,500대의 전차(주로 T-26과 BT-5/7 2차대전 중에는 경전차급으로 취급됨)와 3,000여 대의 항공기를 동원했다. 이는 핀란드군의 전차 32대, 항공기 114대와 비교할 때 압도적 우세요소이긴 했다.
*각주
키릴 메레츠코프 : 소비에트연방의 군 사령관이자 소비에트연방 원수. 제2차세계대전 기간 중 다수의 전선에서 지휘관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1939년 겨울전쟁에서 핀란드침공작전을 총지휘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초기작전실패의 책임으로 좌천되기도 하였으나, 이후 대규모 병력과 물자를 동원하여 핀란드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전쟁을 종결시키는 데 그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핀란드의 지형특성과 기후조건을 과소평가했다. 카렐리야지협의 좁은길, 수천 개의 호수와 늪지대, 그리고 빽빽한 침엽수림은 기계화병력의 발목을 붙잡았다. 더욱이 1939-40년 겨울은 핀란드역사상 가장 혹독한 추위(-40°C 이하)가 지속된 시기였다.
반면 핀란드의 만네르하임 원수가 구축해놓은 핀란드의 방어전략은 치밀했다. 제정러시아군에서 중장까지 올랐던 만네르하임은 전통적인 러시아 군부의 정서와 경향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카렐리야지협에 '만네르하임 선'이라 불리는 방어선을 구축하고, 나머지 전선에서는 적의 행군을 방해하는 지연전과 게릴라전을 병행하는 전략을 수립했다.
그래서 만네르하임이 누군데?
스웨덴계 핀란드 귀족가문에서 태어난 만네르하임은 어려서부터 다문화적 환경에 친숙했다. 집에서는 스웨덴어와 프랑스어를, 학교에서는 핀란드어와 러시아어를 배웠다. 이런 성장배경을 통해 그는 당대 국제사회가 돌아가는 이치와 사회구조를 볼 줄아는 시야를 가질 수 있었던 듯 하다.
1887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니콜라예프 기병학교에 입학한 만네르하임은 졸업이후 러시아제국군 장교로서 30년간 복무했다. 러일전쟁(1904-1905)에서 기병연대장으로 참전했고, 1906년부터 2년간 중국의 신장성까지 단독 정찰여행을 하기도 했다.
만네르하임은 보수적이면서도 실용주의적 성향을 보였다. 군경험을 바탕으로 건실한 국방을 중시했으나, 동시에 외교와 협상을 통한 평화유지를 옹호했다. 그는 개인의 자유와 국가안보 간 균형을 중시했다. 치안유지와 사회통합을 위해 필요할 경우 군사력을 활용할 수 있다는 입장을 가진 적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서는 과도한 군사개입을 경계했다.
*각주
실용주의 : 19세기 후반 미국에서 발생한 철학사조. 찰스 샌더스 퍼스, 윌리엄 제임스, 존 듀이 등이 대표적인 철학자이다. 관념의 절대적 진리를 탐구하기보다, 개념이나 신념의 의미와 가치를 그것이 가져오는 실제적인 결과와 효과에서 찾으려 한다.
그는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라는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군인의 최우선 의무는 불필요한 희생을 막는 것"이라고 믿었다.
*각주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 : 프로이센의 군인이자 군사 이론가.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한 경험을 바탕으로 전쟁의 본질과 현상을 철학적, 역사적으로 분석한 [전쟁론]을 저술했다. 그의 이론은 현대군사학 및 정치학, 국제관계학에 영향을 미치며, 전쟁을 이해하는 고전적 틀을 제시했다.
전쟁론 : 클라우제비츠가 출간한 전쟁에 관한 이론서. "전쟁은 정치의 연속이다"라는 명제로 대표된다. 전쟁을 정치적 목적달성을 위한 합리적인 도구로 규정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비판적인 평가도 나온다.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이 전쟁을 국가정책의 연장으로 파악한 뒤 전쟁을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주로 사민주의와 같은 진보적인 입장을 가진 사람에게서 비판받아 왔는데, 그 이유는 [전쟁론]이 전제정과 독재정권과 같은 권위주의적 국가 혹은 제국주의국가들이 자국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무력을 남용하고 전쟁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악용되어왔다는데 있다. 특히 전통적인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전쟁론]은 계급을 언급하지 않은 이론서로서 비판적으로 수용되고 있다.
ex)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 아니라 정치외교의 실패로서 나타나는 결과이자 지배계층이 노동계급에게 고통을 전가하는 수단으로 본다.
러일전쟁에서 무모한 돌격을 거부하여 상관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또한 그래서 그가 지휘하는 연대는 다른부대에 비해 현저히 낮은 손실률을 기록했다. 이런 경험은 추후의 겨울전쟁에서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내는 전략으로 이어진다.
개인사생활에서의 만네르하임은 프랑스문학을 즐겨 읽었고, 음악을 사랑했으며, 미술품 수집가이기도 했다. 이런 문화생활의 양식은 당대 귀족가문출신의 군인이 으레 가지는 고급취미이긴 했으나 그러한 문화적 소양을 군인으로서의 소양으로 승화하는데 힘썼다. 이 역시 귀족출신이 으레 가질 법한 태도이기도 하다.
영원한 적도, 아군도 없다
사회민주당과 만네르하임의 관계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만네르하임은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50세의 나이에 그는 30년간 몸담았던 러시아군을 떠나 핀란드로 돌아왔다. 당시 핀란드는 러시아혁명을 기점으로 러시아로부터 떨어져 나와, 적백내전에 휘말렸다. 핀란드내전이었다.
*각주
핀란드내전 : 1918년 1월 27일부터 5월 15일까지 핀란드에서 전개된 내전. 러시아로부터의 독립직후, 사회주의 세력인 '적위대(Reds)'와 보수주의 및 민족주의세력인 '백위대(Whites)' 간에 벌어진 무력충돌이다. 독일제국의 지원을 받은 칼 구스타프 만네르헤임 지휘 하의 백위대가 최종적으로 승리하였다. 이 내전의 결과로 핀란드는 서구식 민주공화국체제를 확립하였으나, 사회적으로는 깊은 분열과 상처를 남겼다.
만네르하임은 백위파를 내전에서 승리로 이끌고는, 핀란드 우파세력의 상징이 된다. 그의 눈에 사회민주당과 범좌익은 국가질서와 귀족, 왕가의 정통성을 위협하는 볼셰비키의 대리자 격 쯤 됐나보다.
때문에 내전에서 패한 좌익세력은 참혹한 대가를 치렀다. 당 지도부는 투옥되거나 망명했고, 수많은 당원들이 처형되거나 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좌익의 생존을 도모한 배이뇌 탄네르 중심의 잔존세력은 혁명노선을 포기하고 의회주의적 개혁노선으로 전환한다. 이른바 '탄네르주의'라 불리는 온건 사회민주주의의 등장이다.
*각주
탄네르주의 : 핀란드사회민주당의 중도개혁적 노선을 대표하는 정치적,이념적 경향으로, 1918년 내전 이후부터 제2차세계대전 직전까지 배이뇌 탄네르를 중심으로 구축된 노선이다. 공산주의와 극우파 양극단을 경계하면서도 사회개혁을 추진한 실용주의적 사회민주주의의 한 형태다. 주로 엄격한 재정긴축정책과 국방력강화를 통한 국가안보유지를 강조하는 특징을 보인다. 전후 핀란드가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독립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핀란드가 중립노선을 유지하면서도 서방국가들과의 경제적 유대를 강화하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재정긴축으로 인한 사회복지축소, 그리고 때로는 너무 보수적이라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또한, 소련과의 관계에서 '핀란드화'라는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등 외교정책에 대한 논쟁적인 지점도 분명 존재해왔다.
하지만 당시 핀란드 보수진영은 1918년의 좌익을 왕가에 충성하지않는 반역자로 보았고, 좌파는 학살과 억압의 기억을 떨칠 수 없었다. 적위대- 백위대에서 공화파-왕당파로의 갈등은 서로가 여러외세를 끌어들여 압력을 행사하는 식의 전개로 이어졌다.
1918년 5월에 원로원은 독일왕족을 옹립하려던 보수주의자-왕정복고세력이 장악했다. 왕정복고세력이 독일제국육군의 지원에 힘입어 주도권을 쥐고 흔들면서 의회의원들 중 내전 당시 적위대봉기에 조금이라도 연루된 사람은 모두 퇴임당했다. 그 결과 좌익성향의원은 사회민주당소속 의원 3명이 전부였다. 원로원이 반민주적인 임시행정부임을 왕당파 스스로 선전한 셈이다. 이마저도 독일이 1차대전에서 패전하면서 와해됐다.
이렇듯 백위대-왕당파로 이어지는 우익세력의 좌익탄압과 외압을 지켜본 핀란드사람들은 1919년에 치뤄진 총선에서 핀란드사회민주당에 많은 표를 보냈다. 이시기 핀란드는 사회민주당의 주도아래 헌법을 제정하며 민주공화정을 확립했다. 사민당은 1924년 총선에서 라우리 잉그만의 중도우파연립정부에 참여하기도 했다. 잉그만은 신학자로서 내전 이후의 사회분열을 안타까워했다. 좌파인 사민당과의 연립정부구성 역시 그러한 안타까움에서 비롯됐다. 그런데 1930년대 쯤 되니 핀란드에도 파시즘이 유행하기 시작한다. 해산되지 않은 백위대가 라푸아운동을 일으키며 좌파인사에 대한 테러를 자행한 것이다.
*각주
핀란드사회민주당 : 여타 다른 국가의 사회민주당처럼 기본적으로는 민주주의적 절차를 통해 자본주의의 단점과 모순을 보완 및 해결하고 진보적 사회정의와 평등을 실현하며, 포괄적인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해왔다. 종전이후에도 전통적인 복지국가건설이라는 사회민주주의적 이상을 추구하면서도, 변화하는 국제정세와 자국안보상황에 유연하게 대응하는 실용주의적이고 현실주의적인 경향을 띈다.
라우리 잉그만 : 루터교 신학자 겸, 핀란드정치인. 잉그만은 사회민주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했는데, 이는 내전에서 적위대측에 가담했던 사회민주당이 정치주류로 복귀했음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보수출신인 잉그만이 좌파정당과 손을 잡은 것은 그의 실용적이고 통합지향적인 정치철학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잉그만의 정치적 지향은 온건한 보수주의였다. 그는 급진적인 변화나 혁명보다는 점진적이고 안정적인 발전을 추구했다. 동시에 내전으로 심각하게 분열된 핀란드사회의 화해와 통합을 최우선과제로 여겼다. 그는 핀란드독립초기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민주공화정의 기반을 다지는 데 참여한다. 정치, 신학, 교육 등 다방면에 걸쳐 이론서를 출판하고, 1930년에는 핀란드루터교회의 대주교로 선출되어 종교계와 정계 양쪽에서 영향력을 행사한다. 핀란드독립운동 초기부터 활동했고 이를 바탕으로권위를 얻는다. 핀란드가 민주공화정을 건설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인물로, 1934년 투르쿠에서 사망한다. 현대에 들어서도 여러 핀란드인들에게 존경받는 지도자 중 한 명으로 평가된다.
라푸아운동 : 1929년 핀란드 서부에 위치한 도시 라푸아에서 시작된 극우민족주의 및 반공주의운동. 1918년 내전에서 승리한 백위대가 공산주의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을 바탕으로 일으킨 운동으로, 주로 공산주의활동을 억압하고 핀란드민족의 단결을 강조했다. 이들은 이탈리아의 파시즘을 모방하여 제복을 입고 로마식 경례를 사용하는 등 파쇼 색채가 강했다. 운동이 진행될수록 과격해져, 정부를 위협하는 행동까지 서슴지 않았고, 결국 1932년 맨챌래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면서 와해된다. 운동 자체는 실패로 끝났지만, 그 정신은 후신인 애국인민운동(IKL)으로 이어져 핀란드정치에 영향을 끼쳤다.
이 시점에서 만네르하임은 흥미로운 입장을 취한다. 그는 일관된 반공주의자였음에도 불법으로 점철되는 폭력과 법치주의의 훼손은 단호히 반대했다. 극우의 반헌법적 준동을 용납하지 않은 그의 태도는, 정부의 권위에 스크래치를 내었다는 사실 때문에 그러니까, 국가주의적 신념에 기반한 것이긴 했다. 또한, 내전이후 수립된 공화정 초기에는 왕정복고를 지지하며 정당정치와 민주주의에 회의적인 입장을 보인다. 그럼에도 말년에는 다양한 이념과 세력이 말과 글, 그리고 정책으로 경쟁하며 공존 할 수 있다는 민주공화제를 긍정한다.
1930년대 후반, 나치독일과 스탈린의 소련이 팽창정책을 본격화한다. 이에 핀란드는 전쟁위협에 직면했다. 국방위원회 의장이 된 만네르하임과 국방위원회는 전쟁이 코앞으로 다가온 시점에서 국가내부에서의 분열이 국가존속을 위태롭게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 시점에서 핀란드의 정치지형은 다시 한 번 큰 변화를 맞이한다. 외부의 적, 그러니까 소련을 상대로 전쟁위기가 고조됨에 따라 '적위대'와 '백위대'는 다가오는 전쟁을 대비하며 점차 '핀란드인'이라는 더 큰 정체성 아래에서 하나로 수렴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상징은 '탈비소단 헨키', 즉 겨울전쟁정신이었다. 이념적, 계급적, 당파적 입장차이가 전쟁위기 앞에 핀란드국민으로서의 공감대 형성으로 이어진 것이다. 만네르하임은 연설을 통해 "나는 부자든 가난하든, 모든 노동자와 농민들이 조국을 위해 함께 싸우고 있음을 안다"고 말한다. 국가주의자다운 발언이다. 이때의 사회민주당을 포함한 핀란드의 범좌파는 이념적 차이를 잠시 접어두고 국가적 위기 앞에 초당적으로 협력하는 성숙함을 보였다.
이를 증명하듯 사회민주당과 당원들 역시 공장과 전선에서 헌신하며, 과거의 계급정당에서 국민정당으로의 발전을 보여줬다. 이 시기 이후, 만네르하임은 더 이상 우파의 지도자가 아닌 '핀란드군의 총 지휘관이자 핀란드국민의 지도자'로, 사회민주당은 체제전복세력이 아닌 사회의 혁신을 이끄는 국정파트너로 재인식된다.
그래서, 만네르하임의 전쟁전략은?
겨울전쟁 발발 당시 핀란드사회지도층이 파악하고 있듯 만네르하임은 핀란드군이 소련군을 상대로 완전무결하게 승리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전쟁을 국가의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바라보는 클라우제비츠의 지론이 그의 전쟁전략수립에 있어서 가장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의 목표는 소련군의 전멸이 아닌, '핀란드를 침략하는데 드는 대가가 침략하지 않았을 때의 대가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을 소련과 스탈린에게 전하는 것이었다. 이 목적이 달성된다면 이는 적지휘부에 합리적인 판단을 부추기고, 또 이를 통해서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었다.
이러한 인식은 핀란드 방어전의 기반이 된 '만네르하임 선'의 설계로 이어졌다. 만네르하임 선이라는 방어선은 고정된 전선이나 단일 방어축이라기보다는 병력이 유동적으로 움직이는 기준선이라고 봐야한다. 그렇다. 앞서 다뤘던 독일국방군의 기동방어교리와도 흡사하다.
만네르하임과 비슷한 또래의 군지휘관들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고정된 방어선이 집중포화와 기동전 앞에서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를 경험한 세대였다. 그래서 그는 방어의 핵심을 고정된 구조물에 두지 않았다. 대신 방어선을 세분화하고, 다층적인 저지선을 형성하여 적의 진격을 단계단계마다 지연시키면서 소모시키는 방향으로 구상했다. 이는 앞서다뤘던 독일군의 탄성방어 개념과 유사하다.
핀란드의 지형이 방어전에서 큰 이점으로 작용한다. 여러 호수, 숲, 늪지대, 그리고 눈 덮인 협곡은 소련군의 대규모 기계화부대를 좁은길로 유도하며, 기동력에 있어서 소련군이 가진 우위를 상쇄했다. 만네르하임의 설계대로 핀란드지형과 이에 적합한 방어전략수립, 그리고 싸울의지가 있는 병력이 시너지를 내며 여러 전투전투마다 크고작은 성과를 이끌어냈다.
만네르하임이 지휘하는 핀란드군은 극도로 제한된 자원과 병력 하에서 임기응변에 능한 병력을 운용해, 국지전에서의 반격과 포위전술을 펼치고자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른바 '모티(Motti)' 전술이다. 모티전술은 좁은 길목을 따라 종심으로 길게 늘어선 소련군의 보급부대 및 전투부대를 분절시키고, 각개격파하는 방식이었다. 이 방식은 적의 병참과 지휘체계를 교란하여 고립시키는 데 효과를 보였다.
*각주
국지전 : 전쟁의 전체국면이 아닌 한정된 작전지역내에서 제한된 목표를 두고 벌어지는 국소적 교전 형태를 지칭한다. 이는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총력전의 '결전'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모티(Motti)' 전술 : 겨울전쟁 당시 핀란드군이 소련군을 상대로 구사한 독창적인 포위섬멸전술. '모티'는 핀란드어로 '일정량으로 잘라 쌓아놓은 장작더미'를 의미한다. 핀란드의 울창한 삼림과 호수지형을 이용하여, 도로를 따라 길게 전진하는 소련군의 대규모부대를 분할하고 고립시킨 후, 스키부대 등 기동성 높은 소규모병력이 고립된 적 부대('모티')의 보급선을 차단하고 각개격파하는 방식으로 운용되었다.
모티전술은 포위섬멸의 고전적 사례인 칸나이 전투나, 후퇴를 가장한 기만전술을 통해 적을 유인하는 기병전술, 그리고 1차대전 당시 독일군의 포위분할전략과도 유사하다. 핀란드군은 이 전술을 전투마다 적용하면서도, 자국의 지형과 병력구성에 맞추어 변형하는 식으로 운용했다.
*각주
칸나이전투 : 제2차 포에니전쟁 중 이탈리아 남동부 칸나이평원에서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 바르카가 로마공화국 군대를 상대로 거둔 결정적인 승리. 한니발은 중앙보병을 의도적으로 후퇴시켜 로마군을 유인한 뒤, 양익에 배치한 정예병력으로 로마군의 측면과 후방을 포위하여 섬멸하는 이중포위전술을 완벽하게 구사하였다. 역사상 가장 완전한 포위섬멸전의 전형으로 평가되며, 후대의 군사전략에 큰 영향을 미쳤다.
1차 대전 당시 독일군의 포위분할전략 :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이 채택한 핵심전략. 특히 서부전선에서 전쟁초기에 수행된 '슐리펜 계획'이 그 정수이다. 이는 강력한 우익기동군이 중립국 벨기에를 통과하여 프랑스군의 좌측면을 깊숙이 우회하고, 파리를 포위하며 프랑스군 주력을 동부의 요새지대에서 분리, 격멸하는 것을 목표로 한 대규모 포위기동전략이었다. 비록 계획은 실패했으나, 적 주력군의 섬멸을 통해 단기결전을 추구한 독일군사사상의 특징을 보여준다.
특히 스키를 이용한 보병분대들은 핀란드군의 작전수행능력에 큰 이바지를 했다. 동계환경에 최적화된 경보병들은 소련군의 측면과 배후를 기습하며, 지휘 및 보급체계를 반복적으로 마비시켰다. 소규모단위로 작전을 수행하면서도 준수한 적응력과 기동력을 유지했고, 이는 전차와 장갑차등의 차량을 끌고 온 적 부대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었던 주요인이었다.
정보전에 능한 참모조직 역시 크고작은 성과에 보탬이 됐다. 참모진의 권고에 따라 핀란드군은 소수의 포병전력과 노획장비의 현장수리 및 재활용, 그리고 무전감청 등 다양한 분야에서 준수한 능력을 보였다. 또한 야간기습 및 교란작전을 지속함으로써, 적의 전투지속의지를 저하시키는 심리적 압박도 병행했다.
결론적으로, 만네르하임의 전략은 새로운 군사이론을 제시했다기보다 이미 검증된 전쟁원칙들을 핀란드의 조건에 맞춰 실용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작전목표가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방어전술이 지형에 적합한지, 전투병력의 성격이 전장에 부합하는지, 기동 및 포위전술의 조합, 그리고 참모조직의 다각적인 전쟁상황파악 등이 조화를 이룬 것이다. 이러한 전쟁수행능력은 오늘날에도 제한된 자원과 불리한 조건 아래에서 방어전략을 고민하는 군인들에게 긍정적인 사례로 평가되고 있다.
사실상의 승전
소련군의 저조한 전쟁수행능력은 구조적인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가장 큰 원인은 스탈린주의의 확립과 이로인한 대숙청(1936-1938)이다.
*각주
스탈린주의 : 극도로 중앙집권화된 권력구조와 개인숭배를 특징으로 한다. 이는 레닌의 볼셰비즘에서 출발했지만 본질적으로 변질된 형태였다. 레닌의 "세계혁명론"을 버리고 "일국사회주의론"을 채택했으며, 볼셰비즘의 민주집중제원칙을 극단화하여 당내민주주의를 완전히 제거하고 스탈린 개인의 절대권력으로 변화시켰다.
대숙청(1936-1938) : 스탈린주의의 가장 극단적인 발현이 바로 1936년부터 1938년까지 진행된 대숙청이다. 스탈린은 잠재적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으며, 구 볼셰비키 지도자들, 군간부들, 당 관료들이 "인민의 적", "트로츠키주의자" 등으로 지목되어 처형되거나 굴라그로 보내졌다. 이 과정에서 수백만명이 희생되었고 소련사회전체에 공포분위기가 조성된다. 대숙청은 스탈린이 권력을 공고히 하고 소련사회를 완전히 통제하려는 목적으로 실행되었으며, 이는 볼셰비즘이 추구했던 사회주의적 이상과는 거리가 먼 개인독재체제로의 변질을 보여준다. 오늘날 스탈린주의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왜곡한 전체주의체제였다고 평가된다.
투하체프스키를 비롯한 소련군 고급장교 3만5천명이 숙청되면서, 소련군은 경험있는 지휘관층을 거의 상실했다. 특히 핀란드침공을 지휘한 키릴 메레츠코프조차 겨울전쟁직전까지 숙청위험에 시달렸다. 이로인해 소련군지휘부는 스탈린의 눈치를 보며 현실적인 판단보다는 스탈린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판단을 우선시했다.
*각주
투하체프스키 : 제정러시아의 귀족출신으로 태어나 1차대전에서 소위로 참전했으며,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한 후 볼셰비키에 가담했다. 러시아적백내전(1918-1921) 기간 중 붉은군대의 핵심지휘관으로 활약하며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고, 특히 동부폴란드를 점령할 때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20년대부터 소련군 현대화의 선구자로서 기계화부대, 공수부대, 전략폭격 등 혁신적인 군사이론을 개발했다. 그의 "종심작전론(마르크스주의군사학으로 분류된다 이념에 치우쳤다는 평가도 있다)"은 현대기동전의 기초가 되기도하며, 독일의 전격전이론에도 영향을 미쳤다. 1935년 소련최초의 원수5명 중 한 명으로 진급했으나, 1937년 스탈린의 대숙청과정에서 반역혐의로 체포된다.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처형되어 소련군부가 스탈린의 눈치를 보며 경직되는데 본보기가 된다. 1957년 사후 복권되어 소련군사사에서 그의 업적이 재평가되었고, 현재는 20세기당시 혁신적인 군사이론가 중 한 명으로 인정받고 있다.
전술적인 차원에서도 소련군부는 한계를 드러냈다. 1차대전식 정면돌격전술(우라돌격)에 매몰되어 핀란드의 지형적 특성을 무시했고, 방한장비와 같은 동계전투준비가 전무했다. 영하 40도의 혹독한 추위 속에서 소련군 장병들은 적절한 방한장비도 없이 전투를 치러야 했다.
21세기를 사는 20대 청년인 내가봐도 어이가 털리는 지점은 보급체계의 붕괴다. 소련군은 핀란드도로망의 취약성을 간과했고(아예 사전조사 자체를 안한거다), 핀란드군의 모티전술에 의해 보급선이 반복적으로 차단되면서 전선곳곳에서 고립된 부대들이 속출했다. 이는 소련군의 압도적 물량우위를 매몰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겨울전쟁 당시의 스탈린과 소련군부는 핀란드내부의 저항의지를 완전히 오판한다. 스탈린은 핀란드가 1918년 핀란드내전 당시의 좌우대립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으며, 소련군이 침공하면 핀란드 내 좌익세력이 호응할 것이라고 착각했다. 실제로 소련은 오토 빌레 쿠시넨을 수반으로 하는 '핀란드 민주공화국' 괴뢰정부를 미리 수립해두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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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빌레 쿠시넨 : 핀란드에서 태어나 헬싱키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후, 핀란드사회민주당에서 활동하며 정치경력을 시작했다. 1918년 핀란드내전에서 적위대(볼셰비키 편)를 지지했으나 백위대가 승리하면서 소련으로 망명한다. 소련에서 핀란드공산당을 창당하고 지도했으며,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의 핵심인물로 활동했다. 1939년 소련이 핀란드를 침공한 겨울전쟁 당시, 스탈린에 의해 소련이 세운 괴뢰정부인 '핀란드민주공화국(앞서 다뤘던 합법정부와는 다른 개념)'의 수상으로 임명된다. 하지만 이 괴뢰정부는 국제적으로 승인받지 못했고, 핀란드와의 평화협정 이후 해체된다. 이후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간부로 진급하여 소련정치엘리트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핀란드적위대 출신의 좌익도 소련의 동부폴란드점령과 발트3국점령을 지켜보며, 소련에 대한 기대를 버린다. 겨울전쟁은 오히려 핀란드사회의 좌우통합을 촉진했고, 과거 적위대출신들조차 겨울전쟁에 나섰다. 소련의 정보기관은 이러한 핀란드사회의 변화를 전혀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핀란드에 대한 동정론이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군사지원에는 소극적이었다. 이는 지리적 한계때문이기도 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소련과의 전면대결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히틀러라는 더 큰 위협 앞에서 소련을 완전히 적으로 돌리는 것은 전략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았다. 국제연맹은 소련을 침략국으로 규정하고 제명조치를 취하기도했다. 그러나 이는 상징적인 의미이상으로 작용하지 못한다.
히틀러에게 겨울전쟁은 예상치 못한 기회였다. 겨울전쟁에서 소련군이 보여준 부진은 독일이 동쪽을 경계하지않고 서쪽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제공했다. 더욱이 히틀러는 소련군의 전쟁수행능력을 파악할 수 있었다. 독일군부는 겨울전쟁을 면밀히 관찰하며 소련군의 약점들을 파악했다. 대대적인 숙청으로 인한 지휘체계의 혼란, 교조적인 전술, 열악한 보급체계 등은 훗날 바르바로사작전계획(독소전쟁)에 반영되었다. 히틀러가 "문을 걷어차면 썩은건물전체가 무너질 것"이라고 말한 것도 겨울전쟁에서 드러난 소련군의 부진에 기반한 것이었다.
동시에 독일은 핀란드를 지원하기까지했다. 무기수출과 의료지원 등을 통해 핀란드의 저항을 뒷받침하면서도, 소련과의 직접적 충돌은 피하는 균형을 유지했다.
이때까지만해도 미국은 유럽대륙의 전쟁에 개입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여론은 압도적으로 핀란드를 지지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소련의 침공을 "도덕적 금수령"이라고 비난했고, 핀란드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확대했다. 특히 미국 내 핀란드계 이민자들의 적극적인 로비활동은 미국의 대핀란드지원정책에 영향을 끼친다. 이는 훗날 냉전시기 미국의 대소련 정책형성에도 간접적 영향을 미치게 된다.
겨울전쟁의 결과로 핀란드는 카렐리야지협 전체, 비푸리(비보르그) 일대, 사이마 호수지역 등 국토의 11%에 해당하는 4만 4천 ㎢를 소련에 할양했다. 때문에 전체인구의 12%인 43만 명이 고향을 잃었다.
소련은 겨울전쟁에서 작은영토를 얻었지만,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국제사회에서의 위신은 잃는다. 거기다 소련군의 사상자는 당대 공식발표로도 12만 6천 명이 넘었고, 통계상으로 잡히지 않거나 소련이 은폐한 통계를 종합한다면 사상자 수는 20만 명을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핀란드군의 전사자는 2만 5천 명이었다. 독일은 물론, 주변 약소국은 소련군의 전쟁수행능력을 의심하게된다.
겨울전쟁은 유럽의 세력균형에 미묘한 변화를 가져왔다. 소련의 위신실추는 히틀러에게 동방진출의 자신감을 주었고, 동시에 서방열강으로 하여금 소련을 과소평가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오판은 1941년 독소전쟁발발 후 서방이 소련의 저항능력을 과소평가하는 배경이 된다. 이는 전쟁초기, 소련을 상대로 한 지원정책(랜드리스)의 소극성으로 이어졌다. 역설적으로 겨울전쟁에서의 소련의 '승리'는 장기적으로 소련에게 불리한 환경을 조성하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파쇼냐, 전쟁영웅이냐
역사인물의 다면적 성격에 대해서
겨울전쟁 이후에도 핀란드는 독립을 유지한다. 비록 겨울전쟁에서 잃은 영토를 되찾기 위해 나치독일과 손을 잡고 '계속전쟁'에 참전하는 등 오점을 남겼지만, 종전 이후에도 소련과의 관계에서 절묘한 균형외교를 펼치며 '핀란드화(Finlandization)'라는 독특한 외교전략을 수립했다(정작 핀란드인들은 이 용어를 싫어한다). 이는 강대국 사이에서 약소국이 택할 수 있는 현실적인 외교정책의 전형이 된다. 핀란드의 외교정책은 소련의 안보우려와 영향력행사를 인정하되, 내정의 자율과 서방의 경제협력을 확보하는 등의 성과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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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화 : 냉전시기, 강대국에 인접한 약소국이 국가의 생존을 위해 외교 및 국내정책에서 자율성을 스스로 제한하고 강대국의 의사를 존중하는 현상을 지칭하는 국제정치학용어. 겨울전쟁 이후 핀란드가 소련의 군사적 위협에 대응하여 공식적인 중립정책을 표방하면서도, 외교적으로 소련의 입장을 배려하고 자극을 피하는 정책을 편 것에서 유래하였다. 이는 주권의 실질적 제약이라는 부정적 함의를 내포한다.
2차대전 당시 나치독일과의 협력이나, 정당정치와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식의 인식이나, 핀란드내전 당시 백위파의 수장으로서 좌익세력을 탄압하고 학살한 악행을 못본채 할수만은 없지만, 군인으로서의 만네르하임과 겨울전쟁에서의 핀란드는 유능한 군인과 그 군인을 가진 사회가 정치와 전쟁의 성격을 이해하고 국가방위를 위해 희생한 장병의 헌신을 유의미하게 사용한 선례라고 생각한다.
만네르하임의 삶은 비판적 평가와 별개로, 위기상황에서 국가엘리트가 보여주어야 할 책임감, 즉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한 전형으로 해석할 여지가 충분하다.
만네르하임에 대한 평가는 이처럼 복합적일 수밖에 없다. 그의 행적에는 분명 비판받을 지점이 존재하지만, 겨울전쟁에서 보여준 리더십은 국가생존의 기로에서 리더가 어떤 역할을 해야하는지를 보여주는 선례다. 이 글이 역사를 통해 현재를 성찰하는 작은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