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 인물열전

전쟁과 혁명을 맞이한 사람들

by 백재민 작가

짧은 연재를 마무리하며, 그동안 글 속에서 스쳐 지나갔던 인물들의 이야기를 제 시각으로 다시 엮어보았습니다. 널리 알려진 사실에 저만의 해석과 살을 붙여 각색해 보았지만, 사전 형식의 글이 아직은 손에 익지 않아 조금 낯설게 느껴지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글과 함께 실린 사진과 그림을 중심으로,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삶을 따라가며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게임으로 만나는 전술과 사회]를 한 편이라도 읽어주신 모든 분께 깊은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다음에는 더 깊어진 사유와 발전된 글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니콜라이 2세 (1868-1918)

Nikolai II

제정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황제. 절대군주제를 신뢰했으나 급변하는 시대의 요구를 읽지 못했다. 1905년 혁명으로 마지못해 입헌군주제를 받아들이면서도 근본적인 사회개혁에는 소극적이었다. 라스푸틴의 국정개입, 1차 세계대전에서의 패배, 민중에 대한 무관심 등으로 민심을 잃었다. 그의 통치는 전제정의 실패 사례로 꼽힌다. 1917년 3월 퇴위했고, 이듬해 볼셰비키에 의해 가족과 함께 처형당했다.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1881-1970)

Aleksandr Kerensky

러시아임시정부의 마지막총리. 사회혁명당출신의 웅변가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 그러나 현실정치에서는 우유부단함을 보인다. 1917년 2월 혁명 후 임시정부를 이끌며 제헌의회 소집 등을 약속했지만, 1차 세계대전 지속을 결정하며 민심을 잃는다. 같은 해 볼셰비키의 10월혁명으로 실각한 후 기나긴 망명생활을 했다.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1870-1924)

Vladimir Ilyich Lenin

러시아혁명을 이끈 핵심인물. 마르크스주의를 러시아의 현실에 맞게 해석하고 적용한 혁명가다. 형제가 처형당한 사건을 계기로 혁명에 투신했다. 시베리아에서의 유배생활과 서유럽망명을 거치며 이론을 다듬었고, 1917년 '4월테제'를 통해 혁명의 방향을 제시했다. 소비에트연방 수립 후 신경제정책(NEP)을 도입하는 유연성을 보였으나, 반대파에 대한 탄압도 병행했다. 그가 설계한 소비에트체제는 70여 년간 세계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레프 트로츠키 (1879-1940)

Lev Trotsky

레닌과 함께 10월혁명을 성공시킨 주요인물. 뛰어난 웅변과 저술로 일찍부터 주목받았고, '영구혁명론'을 주장했다. 붉은군대를 창설하여 내전을 승리로 이끈 조직가이기도 했다. 레닌 사후 스탈린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하여 1929년 추방당했다. 멕시코에서 스탈린주의를 비판하는 출판활동을 이어가다가 1940년 스탈린이 보낸 암살요원에게 살해당했다.













베니토 무솔리니 (1883-1945)

Benito Mussolini

파쇼의 아버지. 이탈리아를 로마제국으로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한 독재자. 젊은 시절 좌익언론에서 편집장을 맡던 사회주의자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야된다는 의견을 냈다가 축출된다. 이후 우익으로 전향했다. 전후 혼란기에 '파시 디 콤바티멘토'를 조직, 1922년 '로마진군'으로 정권을 잡았다. 이후 '일 두체(지도자)'로 불리며 일당독재체제를 구축. 에티오피아침공과 히틀러와의 동맹으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고, 1943년 연합군의 이탈리아상륙으로 실각했다. 1945년 야반도주 중 파르티잔에게 처형된다.









샤를 드골 (1890-1970)

Charles de Gaulle

'위대한 프랑스'를 슬로건으로 내세운 프랑스의 군인이자 정치인. 기갑전술의 중요성을 일찍이 알아차린 전략가. 1940년 프랑스가 항복하자 런던으로 망명, '6.18 호소'를 통해 프랑스인들에게 레지스탕스참여를 촉구했다. 자유프랑스를 이끌며 조국해방에 기여했다. 제4공화국의 혼란기에 잠시 은퇴했다가 1958년 알제리위기를 계기로 복귀, 제5공화국 초대대통령이 된다. 미국중심의 질서에 맞서 독자노선을 추구했으며, 1968년 5월혁명(68혁명)을 계기로 퇴진했다.










김원봉 (1898-1958)


일제강점기 무장 독립운동을 이끈 인물. 의열단과 조선의용대를 조직했다. 1919년 만주에서 의열단을 조직해 일본요인 암살 등 직접적인 투쟁을 전개했다.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은 의열단투쟁의 이념적 기반이 된다. 중일전쟁 시기에는 조선의용대를 창설해 중국정부와 연합했다. 해방 후 남한에서 활동했으나, 여운형과 김규식, 김구가 주도하는 통일정부수립이 좌절되자 월북했다. 한국전쟁에서 인민군에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한국에서는 논쟁적인 인물로 남아있다. 북한에서도 결국 숙청당했다.



알베르 카뮈 (1913-1960)

Albert Camus

부조리 철학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작가이자 사상가. [이방인], [페스트] 등을 통해 부조리한 현실과 인간의 저항을 주제로 다뤘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며 신문 [콩바(Combat)]를 발행했다. 알제리독립문제로 고뇌하기도 했다. 1957년 노벨문학상을 받았고, 3년 뒤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한스 숄 (1918-1943)과 조피 숄 (1921-1943)

Hans Scholl, Joffee Scho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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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숄(왼쪽사진)과 조피 숄(오른쪽 사진)

나치정권에 저항한 뮌헨대학교의 '백장미' 운동을 이끈 남매. 초기에는 히틀러유겐트(나치정권의 청소년단체)에 가입하기도 했으나, 전쟁과 홀로코스트의 진실을 알게 되면서 반나치운동가로 돌아섰다. 1942년부터 동료들과 함께 정권의 비인간성을 고발하는 전단지를 제작, 배포했다. 1943년 2월 전단배포 중 현장에서 체포되어 며칠 만에 재판을 받고 처형당했다. 이들의 저항은 비폭력시민불복종의 일종으로 평가된다.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1907-1944)

Klaus von Stauffenberg

1944년 히틀러암살미수사건을 주도한 독일국방군 장교. 귀족출신으로 처음에는 나치정권에 협력했으나, 전쟁의 참상을 겪으며 반나치저항운동에 가담했다. 1944년 7월 20일, 동프로이센의 히틀러지휘부 '늑대굴'에서 폭탄을 터뜨렸으나 실패했다. 같은 날 베를린에서 동지들과 함께 총살당했다.













니콜라이 부하린 (1888-1938)

Nikolai Buharin

볼셰비키 이론가 중 가장 온건하고 인본주의적 성향을 보인 인물. '당의 총애를 받는자'라 불릴만큼 사랑받는 혁명가였다. 모스크바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고, 일찍이 마르크스주의이론에 눈이 밝았다. 레닌으로부터도 인정받는 젊은지식인 중 하나. [제국주의와 세계경제]등의 출판을 통해 자본주의사회분석에 기여한다. 레닌이 추진한 신경제정책(NEP) 시기에는 농민과의 협력을 중시하는 '우파'적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나 스탈린의 농촌집단화정책에 반대하면서 점차 영향력을 잃는다. 1937년 대숙청 때 반혁명혐의로 체포되어 이듬해 처형된다. 혁명의 이상과 현실정치 사이에서 고뇌한 인텔리라 불릴만하다.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1883-1936)

Grigory Zinoviev

러시아혁명 초기 레닌의 최측근. 코민테른 초대 의장으로서 국제공산당의 지휘자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우크라이나의 유대인가정에서 태어나, 1903년 볼셰비키에 가입한 후 레닌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뛰어난 웅변술로 '당의 스피커'라 불렸다. 1917년 혁명과정에서 핵심인물로 자리매김했다. 레닌 사후 스탈린, 카메네프와 함께 트로이카를 형성하여 트로츠키를 견제했으나, 이후 스탈린과 대립하면서 '스탈린 반대파'를 결성했다. 1927년 당에서 축출되었다가 복당했지만, 1934년 키로프 암살사건에 연루되어 재차 체포되었다. 1936년 첫 번째 모스크바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된다.






레프 카메네프 (1883-1936)

Lev Kamenev

본명 로젠펠트인 카메네프는 지노비예프와 함께 레닌의 최측근이다. 스탈린과의 권력투쟁과정에서 희생된 '옛 볼셰비키'의 상징. 모스크바의 중산층유대인가정 출신으로 법학을 공부한 그는 1901년 사회민주당에 가입했다. 온화한 성품에 이론에 빠삭했고 소련공산당내에서 중재자 역할을 자주 맡는다. 트로츠키의 여동생과 결혼하여 개인적으로도 혁명지도층과 긴밀했다. 1917년 10월 혁명 직후 소비에트(평의회)의장을 역임한다. 레닌 사후에는 트로츠키 견제를 위해 지노비예프와 함께 스탈린을 지지했다. 하지만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론에 반대하면서 점차 소외된다. 결국 1927년 당에서 축출되었다. 복당 후에도 의심을 받던 그는 1936년 지노비예프와 함께 재판에서 고문에 의한 자백을 내놓은 뒤 처형당한다.



쿠르트 슈투덴트 (1890-1978)

Kurt Stuttgart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공수부대(강하엽병)를 창설하고 지휘한 군인. 1차대전에서 조종사로 참전했고, 전간기에 재무장에 공헌하며 공군재건에 앞장선다. 서부전선 등에서 공수작전을 성공적으로 지휘했다. 1941년 크레타 섬 점령작전에서 사상최대규모의 공수작전을 계획하고 실했했지만, 피해가 막심하여 이후 중단됐다. 종전후 포로가 되었다가 1948년 석방되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1882-1945)

Franklin Roosevelt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이라는 위기를 가장 미국스러운 태도로 헤쳐나간 인물. 미국에서 가장 오래 재임한 대통령이기도하다. 뉴욕의 엘리트출신으로 하버드대학을 졸업한다. 일찍이 정계에 입문했으나 1921년 소아마비로 하반신이 마비된다. 이러한 경험은 특권없는 서민의 삶을 이해하는 디딤돌이 되곤 했나보다. 1933년 대통령에 취임한 뒤 '뉴딜'정책을 바탕으로 경제회복을 도모하며 현대적 복지국가의 기초를 놓았다. 2차 대전 초기에는 중립을 지키다가 일본의 진주만공습 이후 연합국의 리더로서 승리를 이끌었다. 1945년 4선 임기 중 서거한다.









헤르만 괴링 (1893-1946)

Hermann Göring

1차 대전의 에이스조종사와 나치독일의 2인자라는 화려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바이에른지역의 귀족출신으로 어려서부터 군인의 꿈을 키웠다고한다. 제1차 대전에서 리히트호펜 편대의 지휘관으로 활약하며 적 복엽기 스물두기를 격추한 일로 유명해졌다. 1차대전 이후 민간항공 조종사로 근무하다가 1922년 히틀러의 연설을 듣고 나치당에 가입했다. 나치돌격대 지휘관을 거쳐 1933년부터 공군을 창설하며 독일재무장의 핵심일원이 된다. 마약, 과음 등 사치와 향락을 즐기는 등 퇴폐적인 생활로도 유명하다. 영국 본토를 노렸던 항공전이 실패로 돌아가고, 스탈린그라드전투에서의 공중보급 실패 등으로 점차 영향력을 상실한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당하는 직전에 자살했다.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1893-1946)

Joachim von Lieventrov

나치독일의 외무장관. 출세욕과 아첨으로 권력을 얻은 기회주의자였다. 라인란트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1차대전 이후 샴페인 판매업으로 성공하며 상류층에 진입한다. 1932년 나치당에 가입하며 히틀러와 극우정치인들 사이의 중개자 역할을 하며 영향력을 확대했다. 1936년 주영 대사를 거쳐 1938년 외무장관에 임명되는데 히틀러의 침략정책을 외무적으로 실현했다. 1939년 독소불가침조약 체결이 대표적이다. 2차대전 종전이후 뉘른베르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된다.








도조 히데키 (1884-1948)

Tojo Hideki

태평양전쟁을 주도한 일제의 군부수반. 이와테현의 하급무사가정에서 태어났다.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교를 졸업한다. 악랄하기로 유명한 관동군 헌병사령관으로 만주사변에 관여했다. 내각에서도 강경군국주의자로 유명세를 얻었다. 1940년 제2차 고노에 내각의 육군대신으로 입각하며 삼국동맹체결과 남진정책을 주도한다. 1941년 내각총리에 취임한 후 진주만 공습을 감행하여 태평양전쟁을 열었다. 초기의승전 소식에 도취하는 모습도 자주 보였단다. 미드웨이해전 패배 후 전세가 기울면서 1944년 사이판 함락을 계기로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전후 A급 전범으로 체포되어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히로히토 (1901-1989)

Hiroshima

쇼와시대 일제의 천황. 근대일본의 모순을 체현한 인물. 메이지의 손자로 태어났다. 1921년 유럽순방을 돌며 서구문명을 접한다. 1926년 즉위 후 특유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군부의 독주를 견제하지 못하고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침략전쟁을 승인했다. 하지만 1945년 연합군에 무조건항복을 선언하며 일본의 파멸을 막았다는 평가도 받는다. 전후 평화헌법 하에서 '일본의 상징'으로서 일본의 민주화와 평화국가건설에 기여한다.








토마 피케티 (1971-)

Thomas Piketty

[21세기 자본]을 통해 현대자본주의의 모순을 예리하게 분석한 경제학자. 파리근교의 중산층가정에서 태어났다. 고등사범학교와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공부했다. 22세에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MIT로부터 교수직을 제안받았지만 프랑스로 돌아와 사회과학고등연구원과 파리경제대학에서 연구를 이어나갔다. 방대한 데이터를 통해 '자본수익률이 경제성장률을 상회한다(r>g)'는 불평등심화의 법칙을 선보였다. 그의 이론은 신자유주의 경제학을 향한 비판서가 되며, 누진자본세와 글로벌조세협력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학자로서의 엄밀함과 현실참여의식을 함께가졌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한나 아렌트 (1906-1975)

Hannah Arendt

전체주의의 본질을 탐구한 정치철학자. 독일 유대계 지식인으로서 나치가 정권을 잡으면서 수용소로 끌려갔지만, 탈출한 뒤 미국으로 망명한다. 마르부르크대학에서 하이데거에게, 프라이부르크에서 후설에게 철학을 배웠다. 1933년 나치집권 후 파리로 망명한 그녀는 시온주의운동에 참여하며 무국적자의 입장을 체험했다. 1941년 미국에 정착한 후 [전체주의의 기원]을 통해 나치즘과 스탈린주의의 공통점을 분석하며 전체주의연구에 큰 기여를 한다. 1961년 아이히만재판에 참관하고 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이 개념을 통해 사유와 판단력의 중요성을 강조한 그녀의 사상적 토대는 현대민주주의의 위기상황에서 다시한번 주목받고 있다.



버나드 샌더스 (1941-)

Bernie Sanders

미국정치권에서 민주사회주의 또는 사회민주주의적 가치를 일관되게 추구해온 정치인. '아메리칸 드림'를 조명한 진보정치인이다. 뉴욕브루클린의 폴란드계 유대인 이민자가정에서 태어났다. 시카고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하며 시민권운동에 참여했다. 1970년대 버몬트로 이주해 목수, 기자 등 다양한 직업을 거치며 풀뿌리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1981년 벌링턴 시장에 당선된 후 연방 하원의원(1991-2007), 상원의원(2007-)을 역임하며 무소속으로서도 꾸준히 진보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2016년과 2020년 민주당 대선 경선에서 힐러리 클린턴과 조 바이든에게 패배했지만, '정치혁명'을 외치며 젊은 세대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부유세, 무상교육, 전국민건강보험 등과 같은 정책제안은 미국정치담론을 좌측으로 이동시키는 데 기여한다.



뱌체슬라프 미하일로비치 몰로토프 (1890-1986)

Vyacheslav Mykhailovic Molotov

소련의 외교부장관. 소련의 대외정책을 주도한 직업 혁명가다. 본명은 스크랴빈으로 작곡가 스크랴빈의 조카다. '몰로토프(망치)'라는 별명에서 드러나듯 강철 같은 의지와 냉철한 판단력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는다. 1930년부터 1941년까지, 그리고 1953년까지 외무인민위원을 역임하며 소련외교의 얼굴이 되었다. 1939년 독소불가침조약체결과 1945년 얄타·포츠담 회담에서의 협상을 이끌어냈다. 냉전초기 서방에 대한 강경한 입장으로 '미스터 니예트(Mr. Nyet)'라는 또 다른 별명을 얻었다. 스탈린 사후 흐루초프와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하여 1957년 정계에서 축출되었으나, 96세까지 장수한다.







배이뇌 탄네르 (1881-1948)

brained tanner

핀란드사회민주당의 지도자. 노동운동과 의회주의를 결합시킨 북유럽 사회민주주의의 대표적 인물. 탐페레의 공장노동자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계급의식을 체득했다. 1903년 핀란드사회민주당에 가입한 후 노동조합활동가로 경력을 쌓았다.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핀란드 독립과정에서 온건사회민주주의자로 분류된다. 1918년 핀란드내전에서 적군 측에 서서 패배하고, 좌익을 향해 의회주의를 주창한다. 1926년부터 1957년까지 핀란드사회민주당 당수를 역임하며 당을 온건개혁노선으로 이끌었다. 겨울전쟁과 계속전쟁 시기에는 소련과의 협상에서 현실주의적 자세를 강조했다. 대표적인 정치철학은 혁명보다는 점진적인 개혁을, 계급투쟁보다는 사회통합을 추구하는 북유럽형 사회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라우리 크리스티안 렐란더 (1883-1942)

Lowry Christian Lelander

핀란드공화국의 두 번째 대통령. 신생독립국 핀란드의 민주주의체제를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다. 1925년 대통령에 선출되어 1931년까지 재임했다. 재임 기간 동안 좌우의 극심한 대립을 중재하고 의회주의를 정착시켰다. 1930년대 파시즘운동인 라푸아운동의 확산을 막아낸 것으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