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4월 30일, 아돌프 히틀러가 베를린 벙커에서 자살하며 제3제국의 몰락을 알렸다. 히틀러 사망 후 독일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동·서독으로 분단 된다. 이탈리아에서는 1945년 4월 28일, 베니토 무솔리니가 파르티잔에 의해 처형된다. 그의 시신은 밀라노 광장에서 전시되며 독재 체제의 비참한 종말을 보여줬다. 일본은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자 항복한다. 연합군은 일본의 정치적 안정을 위해 천황제를 유지하며 민주화 과정을 추진했다.
독일과 일본의 항복 직전 열린 얄타 회담(1945년 2월)과 포츠담 회담(1945년 7월)은 연합국의 전후 목표를 구체화했다. 독일의 분할 점령과 비군사화, 비나치화는 나치 독재의 부활을 방지하려는 동시에 동·서 진영 간의 세력균형을 구축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는 냉전체제의 출발점이 되며, 서독과 동독으로의 분단은 각각 미국과 소련의 이념적 대립을 상징하게된다. 일본에서는 미국 주도의 군정이 수립되어 농지개혁과 교육제도 개혁이 이루어졌다.
또한, 미국은 마셜 플랜을 통해 서유럽의 재건과 안정을 꾀하며, 자본주의 진영의 결속을 공고히 한다. 소련은 동유럽에 위성국가를 설립했다. 분명, 미국과의 대립을 예상한 조치였다. 두 진영의 대립은 국제 질서가 양극 체제로 재편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일본의 패망으로 한국, 인도차이나에서는 식민지 해방과 민족주의 운동이 본격화됐다.
연합국은 전쟁범죄에 대한 처벌을 위해 뉘른베르크 재판과 도쿄 재판을 연다. 나치 고위 지도자와 주요 전범들이 재판을 받고, 일본의 지도자들도 재판에 회부된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는 헤르만 괴링,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등 나치 고위 관료들이 전쟁범죄의 주도 인물로 지목되며, 이 중 12명이 사형을 선고받는다. 도쿄 재판에서는 도조 히데키를 포함한 주요 군부지도자 7명이 사형을 선고받았다. 전범재판은 현대 국제법의 기초를 마련했지만,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일부 훼손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예컨대, 나치 부역자들이 미국과 소련 간의 대립 속에서 독일의 재건을 위해 다시 공직에 임명되는 경우가 그랬고, 히로히토 천황이 전범기소에서 제외되는 일이 그랬다.
또 한편으로는 1944년 국제노동기구(ILO)가 채택한 필라델피아 선언이 전후 세계의 재건과 새로운 사회 질서 형성에 유효한 분기점으로 작용한다. 필라델피아 선언은 "사회정의 없이는 평화도 없다"는 기조 아래 노동권과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모든 사람에게 경제적안정과 사회적권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강조한 이 선언은 다음과 같은 조항들로 구성됐다. 첫째, 노동은 상품이 아니라는 원칙을 명문화했다. 노동력을 그저 거래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과 직결된 문제로 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둘째로는 모든 인류는 인종, 종교, 성별에 관계없이 경제적 자유와 평등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셋째, 각국 정부는 실업과 빈곤을 방지하기 위한 적극적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필라델피아 선언은 사회복지학에도 큰 영향을 남겼다. 선언이 전후복구과정에서 실업, 빈곤, 노동 착취 문제해결의 근거가 됐다. '빈곤과 불평등을 해소하고, 그 해소가 바로 항구적인 국제평화를 가져온다'는 사조가 복지국가의 근간이 됐다.
종전은 새로운 국제질서를 형성한다. 각국은 폐허가 된 도시에 전쟁없는세상, 새시대를 향한 희망을 재건하고 그 희망은 마침내 노동권을 보장하는 복지국가건설로 이어진다. 필라델피아 선언은 전 세계의 노동자와 가난한 이들, 그리고 소외된 자들에게 한 줄기 빛이 됐다.
좌절과 절망 속에서 인류가 맞이한 가장 큰 희망은 어쩌면, 물리적인 평화만이 아니라 평화를 이루기 위한 서로의 약속과 실천이 아니었을까. 그 약속과 실천은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우리의 손끝에서 이어져야 할 것이다.
* 참고자료
-산업복지론. 강상준,유범상 공저
-사회복지역사. 박진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