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사회민주주의를 말해야 할 때

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

by 백재민 작가

한국에서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불평등이 정당화되어 왔다. 사회민주주의는 그 불평등을 바로잡는 대안이다.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누구나 독일사회민주당(SPD)에 이른다. 1863년 창당이래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녔을 뿐 아니라, 가장 풍부한 이론적 전통을 축적해온 정당이다. 카우츠키, 베른슈타인, 로자 룩셈부르크와 같은 20세기 사회주의사상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들이 모두 이 당에서 논쟁하고 사유했으며, 라살레가 남긴 조직의 유산 역시 이곳에 뿌리내렸다.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사진출처:위키피디

1차대전에서의 패전으로 독일제국이 붕괴하고 바이마르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사민당은 독일역사상 처음으로 집권여당의 지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들을 맞이한 것은 좌파의 분열과 우파의 반격이라는 이중의 위기였다. 당시 다수파를 이끌던 프리드리히 에버트는 독일공산당의 무장봉기를 목도하면서, 오점을 남길 결단을 내렸다.


사민당 소속 총리에버트는 옛 제국군 출신들로 구성된 극우민병대 '자유군단'과 손을 잡고,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가 이끈 스파르타쿠스단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두 혁명가는 체포 직후 살해당했다. 권력을 지키기 위해 동지를 적으로 돌리고, 독일좌파진영 내부에서 매꾸기 어려운 균열을 남겼다. 이 분열은 훗날 나치즘의 부상을 저지하지 못한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1959년 독일사민당이 국민정당으로 거듭나는 발판이 된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통과시킨 당대회 모습.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나치즘이라는 인류사적 참극과 2차대전에서 패전하면서, 독일좌파는 뼈를 깎는 자기반성을 거쳐야 했다. 그 성찰이 결과는 1959년의 '고데스베르크 강령'에서 잘 드러난다. 독일사민당은 이 강령을 통해 마르크스주의 정통성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계급정당에서 국민정당으로의 전환을 공식화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 사진출처:매일노동뉴스

그러니까, 프롤레타리아(무산계급) 해방이라는 혁명적 이상 대신, 시장경제의 효율성을 인정하되 복지국가를 통해 그 모순을 교정하겠다는 현실적 노선을 채택한 셈이다. 아래 슬로건은 사민당이 결단한 현실과의 타협과 지켜야할 선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

"가능한 만큼의 경쟁, 필요한 만큼의 계획"

사민당의 이러한 정치적 미덕이 꽃피운 시기는 단연 빌리 브란트시대다. 과거 권위주의적 잔재를 청산하자는 취지에서 불거진 68혁명은 역사를 청산함과 더불어 나치당출신 군인, 교수, 각정당의 정치인 등 고압적인 태도로 일관하던 권위자들의 권력을 일부 아래로 이양했다. 그 과정에서 총리가 된 빌리 브란트는 “더 많은 민주주의를 감행하자”는 한마디로 권위주의에 찌든 서독사회를 환기한다. 노동자의 경영참여를 보장하는 공동결정제도를 강화하고, 낡은관습에 도전하며 사회전체의 수평구조를 구축했다. 그의 능력은 외교에서도 빛났다. ‘동방정책’으로 냉전의 벽을 깨뜨리고 무릎을 꿇고 과거사를 사죄하는 등 ‘접근을 통한 변화’를 내세워 동독, 폴란드, 소련과의 관계개선에 나섰다.

독일 68운동의 진원지이자 중심이었던 베를린 자유대학의 학생신문 '자유대학 슈피겔'의 1968년 5월호 표지사진. 사진출처:오마이뉴스

그러나 영광의 시대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동서통일 이후의 혼란과 세계를 휩쓴 신자유주의열풍 속에서 사민당은 다시 길을 잃는다. 거기에 더해 게르하르트 슈뢰더는 사민당의 역사에 또 다른 오점을 남긴다. 그는 토니 블레어의 ‘제3의 길’을 독일식으로 번역한 ‘신중도’를 표방하며 집권하는데 그가 실행한 ‘아젠다 2010’과 ‘하르츠 개혁’이 사민당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수순을 밟는다. 골자는 노동시장을 유연화하고 실업급여와 사회복지를 삭감한 것인데, 독일경제의 경쟁력을 높였다는 평가 뒤에 거대한 비정규직, 저임금 노동자계층을 만들어냈다. 가장 취약한 사람들을 보호해야 할 사민당이, 바로 그들의 삶을 나락으로 밀어 넣은 모양새였다. 민심은 돌아섰다. 사민당의 전통적 지지층이 대거 이탈했고, 이에 호응한 사민당내 좌파가 탈당하며 독일좌파당의 창당주역이 되었다. 슈뢰더가 이끄는 사민당은 선거에서는 승리했을지 몰라도, 당의 영혼을 팔았다는 신랄한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더 나아가 최근 몇년의 독일정치지형은 이를 반복적으로 확인해준다. 독일사민당은 경제·노동 문제와 비교해 페미니즘·퀴어·이민자 등 문화적·정체성 이슈에 무게를 두었다는 비판을 받아왔고, 일부 분석가들은 이런 의제편중이 광범위한 유권자층과의 연결을 약화시키며 당의 인기를 떨어뜨렸다고 지적한다. 특히 이 같은 비판은 당의 선거 성적부진과 내부혼란을 설명하는 요인으로 자주 거론된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을 단순히 '정체성 정치'의 실패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 19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의세계화 속에서 서구 사회민주당들은 노동계급의 탈산업화와 분열에 직면했다. 전통적으로 경제적 재분배를 통해 결속되던 노동계층이 불안정한 저임금 서비스노동자, 실업자, 그리고 상대적으로 안정된 정규직 등으로 분화하며 계층적 이해관계가 복잡해졌다. 여기에 페미니즘, 환경, 소수자권리와 같은 새로운사회운동이 부상하면서,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경제적 평등이라는 '계층' 이슈와 문화적 평등이라는 '정체성' 이슈를 동시에 다뤄야 하는 딜레마에 빠졌다. 경제적 불안정으로 인해 복지축소의 고통을 겪은 이들이, 정당이 자신들의 고통 대신 문화적 이슈에만 몰두한다고 느낄 때, 전통적인 지지층은 등을 돌리게 된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의 재건은 '계급정치'와 '정체성정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불안정으로 인한 고통과 문화적 차별로 인한 고통을 연결하고 연대시키는 담론을 구축하는 데 달렸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사민주의는 어떻게 인식되고 있을까. 한국에서의 사민주의 인지도는 낮은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민주노동당에서 정의당으로 이어지는 사민주의정당이 존재해왔고, 또 지지받아왔다.


비교적 최근에 들어서는 정의당이 사민주의를 표방하며, 인지도를 높이는가 싶더니 노회찬의원 서거 이후에도 원내에 머물면서 그 정체성을 흐리는 선택을 일관해왔다. 청년진보 사이에서 유행하는 페미니즘, 퀴어 등의 이슈와 담론이 당 지도부에까지 영향을 끼쳤고, 이는 역설적으로 국민비호감으로 이어졌다. 적어도 성문화에 있어서는 국민대다수가 성소수자를 존중하자는 뜻의 취지나 가치에 대해서 바람직하다고 여기며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음에도, 피해의식과 선민의식이 공격적인 모습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2021년도 정의당내 청년조직인 '청년정의당'의 기자회견 중 한장면 사진출처:KBS

그럼 인지도가 높은 자유민주주의는 뭘까. 해외정치권에서 언급해온 자유민주주의는 그 범주가 워낙에 광범하고, 각 사회에 따라 변형된 형식으로 호명되어서 식견이 짧은 나로서는 몇마디 문장으로 정의하기가 곤란하다. 그럼에도 한가지 분명한 것은 한국우익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자유민주주의'는 기형적이라는 사실이다. 일제강점기 친일부역행적이 있음에도 해방 후 미군정의 비호 아래 '반공'이라는 새 옷을 입고 떳떳하게 국가권력의 중심으로 복귀했다는 것, 민족을 배신한 자들이 대한민국정부수립의 뿌리가 되는 아이러니 등등... 그들이 내건 자유민주주의는 본인들의 친일행적을 지우고 용공분자를 발본색원하는 일이었고, 이렇듯 청산되지 못한 역사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근본정신에 큰 오점을 남겼다.

조선총독부 청사 앞, 대한민국 정부수립 축하 현장

이승만이 양민학살과 부정선거로 권력을 유지했을 때 역시도, (4.19혁명을 계승한다는 취지로 시작되었긴 했지만...)박정희가 쿠데타로 집권해 긴급조치로 언론과 집회의 자유를 제한했을 때 역시도, 전두환이 계엄군을 동원해 광주시민을 학살했을 때 역시도 그들은 한결같이 '자유민주주의'를 언급했다. 여기서 이들이 말하는 자유민주주의는 국민이 가져야할 기본적인 자유를 보장하는 원칙이 아니라 독재정권이 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사였다. 그 수사에 따라붙는 '반공'은 모든 반대를 잠재우는 만능열쇠이기도 했다. 제6공화국에 들어서도 본질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민주제라는 형식은 갖춰졌지만, 국민의힘으로 대표되는 세력과 여러 카르텔은 여전히 굳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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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릿출신 글쟁이. 넓은 스펙트럼을 지향하는 이단아. 평론과 에세이를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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