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의 두 독재자

해묵은 역사논쟁, 박정희와 김일성이 우리에게 남긴 과제

by 백재민 작가

박정희와 김일성, 우리는 정말 그들을 서로 다른 범주에만 가둬둘 수 있을까? 표면의 이념과 성과를 따라가면 두 계보는 갈라진다. 그러나 조금만 눈을 내리면, 권력을 얻고 유지하는 방식 그러니까, 사람을 모으고, 의심을 제거하고, 공포와 환상을 배합하는 정치기술은 닮아 있다. 문제는 우리가 결과(성장 혹은 몰락)를 보고 과정의 폭력을 무시한다는 점이다. 그건 역사를 반쪽만 읽는 태도다.

만주국육군군관학교(만주군관학교. 관동군의 독자적 행보로 만주를 점령한 뒤 건립한 장교양성학교)의 전경. 일본관동군이 세운 사관생도 양성학교로 일본육사와 준동급으로 대우받았다.

김일성이나 박정희 두사람 모두 일제강점기 식민지조선에서 성장했다. 특히 박정희는 일본제국주의질서 안에서 엘리트코스를 밟았다. 만주군관학교를 석차 2등으로 졸업한 뒤, 성적우수자로 선발되어 일본육군사관학교 57기에 편입되었고, 1944년에 졸업했다. 그의 출세지향적인 면모는 명확했지만, 동시에 이는 당시 식민지청년이 선택할 수 있었던 극히 제한적인 진로의 산물이기도 했다. 박정희의 사상적 토대는 본질적으로 일본제국주의에 기반하고있는데 우리가 잘 알다시피 만주국이라는 괴뢰국가의 장교로서, 그리고 일본육군사관학교 생도로서 그가 학습한 것은 천황제 군국주의와 위로부터의 근대화 모델이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이 구축한 '부국강병'의 논리, 국가주의적 동원체제, 재벌중심의 경제구조는 훗날 박정희정권의 경제개발정책에 고스란히 재현되곤 했다.

1944년 당시 일본육군사관학교. 예과와 본과가 나뉘면서 일본육사관할 학교건물이 늘어났다.

김일성의 이력은 박정희와 사뭇 다르다. 그는 중국공산당과 조선인항일유격대의 연합전선으로 형성된 '동북항일연군'에 가담하며 항일무장투쟁의 일선에 서 있었다. 1930년대 만주에서 활동하던 동북항일연군은 중국공산당 지도하의 수많은 항일유격부대 중 가장 큰 세력을 형성했다. 그러나 일제의 토벌에 패퇴하던 동북항일연군의 잔존세력이 1940년 즈음해서 소련땅으로 넘어갔고, 소련은 1942년 7월 이들을 수용하여 제88독립보병여단(88여단)을 창설했다.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교도려단 조선공작단 정치군사책임자로 활동했으며, 이후 소련군소좌로 진급했다.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으로 이어지는 사회주의사상사의 상징. 세인물의 모습이 나란히 정렬된 모습은 우리에게 공산국가의 상징으로 각인돼있다.

김일성의 사상적 배경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스탈린식 사회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다. 소련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인데, 이정도는 언급하지 않아도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다. 당시 소련은 김일성을 정치적으로 후원하는 일에 그치지 않았다. 88여단에서의 5년간, 김일성은 소련식 정치교육과 군사훈련을 받았다. 스탈린체제가 보여준 일당독재, 지도자 1인중심의 권력구조, 숙청과 통제를 통한 정권유지방식은 훗날 북한체제의 근간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 동질성이 드러난다. 그러나 김일성은 소련의 모델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러시아혁명과 중국혁명의 경험을 참조하되, 조선의 현실에 맞게 변형했다. '주체사상'이라는 김일성 본인만의 이념을 구축하며 자주와 자립을 강조하기도 했으나 사실상 김일성 개인의 절대권력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작동했다.


물론, 박정희와 김일성의 지배기술이 가진 유사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권력을 얻고 유지하는데 동원되는 공포, 숙청, 대중동원이라는 정치기술은 사실상 시대를 막론한 모든 권위주의체제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보편적 메커니즘일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독재자의 본질적인 유사성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보편성을 넘어선 '한국적 특수성'을 파고들 필요가 있다. 또한, 이들의 지배는 남북 분단과 격렬했던 냉전체제라는 거대한 맥락을 떠나서 논할 수 없다. 박정희는 미국의 반공전초기지라는 특수한 환경속에서,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의 지정학적 경쟁구도속에서 외부의 원조와 간섭에 능숙하게 대처하며 '외풍에 기대어 내부통제를 강화'하는 독특한 생존전략을 구사했다. 두 사람의 통치가 표방하는 이념과 그 결과가 극단적으로 달랐던 만큼, 우리는 유사점뿐만 아니라 이처럼 배경이 사회통제를 허용한 방식의 차이까지 입체적으로 고려해야한다.


쉽게말해, 두사람의 지배기술이 닮은이유는 동서고금의 독재자들이 사용했던 '기본설명서'를 따랐기 때문일수도 있다. 그 설명서를 '남과북이 나뉜 한반도'라는 아주 특수한 무대위에서, 다른강대국(미국, 소련/중국)의 대립속에서 어떤영향을 이어받았고, 또 이를 어떻게 활용했는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 박정희는 미국의 지원을 방패삼아 내부를 단속했다.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이라는 두 후원자 사이에서 갈등을 역이용해 자율성을 확보했다. 시작점은 비슷해 보여도 과정과 결과가 완전히 달랐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해방정국 중 개회된 반민특위. 친일행적이 있는 인물을 수사해 처벌할 목적으로 열린 위원회지만, 복잡한 정세 가운데 이승만과 자유당의 방해로 와해된다.

다시 역사적 배경으로 돌아가보자. 해방정국에서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전환점을 맞는다. 남한에서는 미군정이 원활한 통치를 명분으로 일제강점기의 통치구조를 상당부분 다시 복구한다. 이 과정에서 친일행적을 가진 인물들이 대거 재등용되었다. 이러한 기조는 이승만정권으로 그대로 이어져, 친일세력은 정권유지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됐다.

소련으로 피신한 동북항일연군. 앞줄 오른쪽 둘째가 김일성. [사진 윤태옥] [출처:중앙일보]

한편 북한에서는 소련군의 전폭적인 후원을 등에 업은 김일성이 사회주의혁명을 구호로 내걸고 정권수립의 기반을 다져나갔다. 1945년 10월, 소련군의 후원을 등에 업고 평양에 입성한 그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요직을 맡았다. 즉 군사와 행정분야 모두에서 주도권을 확보한 셈이다. 당시 북한 역시 다양한 정치세력이 충돌하는 혼란을 빚었다.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 시절 얻은 '장군' 이미지를 내세워 잠재적 경쟁자들의 의심과 비판을 차단하는 면모도 보인다.

4.19 당시 학생시위대

박정희는 4·19 혁명의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명목하에 5·16 쿠데타로 군정을 시행했다. 권력의 정점에 오르면서 대중의 뇌리에 각인된 그가 권력을 잡은 방식은 그가 학습한 일본제국주의의 논리와 무관하지 않았다. 5·16 쿠데타 당시 민주당정부는 무능과 부패의 상징으로 비판받고 있었는데, 박정희는 이를 부각하며 군사정권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특히 장면내각 아래에서의 무능과 혼란을 근거로 들어 자신이 내각의 대안임을 내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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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릿출신 글쟁이. 넓은 스펙트럼을 지향하는 이단아. 평론과 에세이를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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