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파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이유

by 백재민 작가
어떤기억은 시간이지나도 선명하고, 어떤기억은 흐릿해진다. 이상한 건, 잘해줬던 기억보다 잘해주지 못했던 기억이 더 오래 남는다는 것이다. 마치 그기억들이 내 안에서 스스로 살아남을 이유를 찾은 것처럼.

첫사랑이라는 게 그렇다. 의외로 우리는 그날의 기억이 기분에 따라 미화되었다고 오해한다. 미화되는건 장면이다. 장면은 점점 흐릿해지는데, 감정은 오히려 또렷해진다. 특히 미안했던 감정이.

고등학생이 자취를 한다는 것 자체가, 대구경북 중에서도 중소공업도시의 기성세대 입장에선 혀를 끌끌 찰 일이었다. 거기다 자취방에서 연애까지 했으니, 내놓고 말하기 뭐한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 시절을 종종 꺼내어 본다.

연애의 시작은 자연스러웠다. 친구가 소개팅 자리를 만들어줬다. 장소는 내 자취방이었다. 그런데 소개받은 사람이 친구를 한 명 더 데리고 왔다. 나는 소개받은 사람보다 그 친구에게 마음이 갔다. 결국 그 친구와 연애에 골인했고, 그 사람은 이후로 내 자취방에 자주 놀러왔다.

자취를 시작했으니 먹고살아야 했다. 밥 해먹기부터 설거지, 빨래, 청소까지. 배가 고프니까 배운 것들이었다.

어느 날은 그 사람과 함께 밥을 해먹기로 했다. 집에 있던 쌀과 홈플러스에서 사온 돼지고기로. 그날 나는 야간자습을 땡땡이 치고 일찍 집에 왔다. 버스에서 멀미까지 한 터라 몸이 여간 꼰드러진 게 아니었다. 겨우겨우 쌀을 씻고 있으니 그 사람이 들어왔다.

가방을 던져놓은 그 사람은 나를 도와주겠다며 이리저리 제 할 일을 찾더니, 이내 산만해졌다. 멀미 기운에 짜증이 뻗친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야 말았다.

"아 됐다! 방에 가서 가만히 앉아 있어라!"

그 사람은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밥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사랑한다는 것과 다정하다는 것은 다른 말이다. 나는 그 사람을 사랑했지만, 늘 다정하지는 못했다. 몸이 고단하면 마음도 좁아졌고, 마음이 좁아지면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가장 먼저 티를 냈다. 그게 당시의 나였다.

사랑의 미숙함은 대개 이런 식으로 드러난다. 싫어서가 아니라 익숙해서. 밀어내려는 게 아니라 그냥 감당이 안 돼서. 그 차이를 상대가 알아줄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 위에, 서툰 연애가 서 있었다.

한참 지나서야 조용한 게 신경 쓰였다. 힐끔힐끔 방 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여러 번 힐끔거리던 어느 순간,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그 사람은 웅크린 채 울고 있었다.

하던 거 다 때려치우고 다가갔다. 그 사람은 나에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남자친구에게 우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던 건지, 그냥 내 얼굴이 보기 싫었던 건지, 지금도 모른다. 간혹 눈물을 닦으려 고개를 들 때가 있을 뿐이었다. 그럴 때마다 눈물 범벅으로 자국이 남은 얼굴이 보였다.

그 얼굴이 어찌나 귀엽고 곱상하던지. 지금도 기억이 날 정도다.

마음이 진정될 때쯤, 한참을 웅크리고 말도 없이 울던 그 사람이 나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배고파."

그 한마디가 이상하게 오래 남는다. 화가 났는지, 서러웠는지, 억울했는지. 그 사람은 끝내 말해주지 않았다. 나는 그게 참 아쉬웠다. 그때도, 지금도.

사람은 때로 이유를 알아서 우는 게 아니라, 울고 나서야 이유를 찾는다. 그걸 그때는 몰랐고, 지금은 안다. 알게 됐다는 게 썩 기쁜 일은 아니다. 알게 될 때쯤엔 이미 늦은 경우가 많으니까.

나는 그에게 다시는 소리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약속을 지켰는지는 이 글에 쓰지 않겠다. 다만 그 눈물 범벅의 얼굴만큼은, 지금도 또렷하다.

그 사람은 이제 해외에 있다. 유학하다가 만난 사람과 결혼했다고 들었다. 나는 여전히 고향에 남아있다.

세상은 부지런히 사람을 멀리 데려간다. 어떤 사람은 유학을 가고, 새로운 사랑을 만나고, 결혼을 한다. 그 사람도 그렇게 자신의 방향으로 뻗어나갔다. 탓할 마음은 없다. 다만 그 사람이 걷던 길에 내가 있었다는 것으로 만족한다.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그 사람이 떠오르는 건, 그 시절의 내가 가장 솔직했기 때문일 것이다. 가진 것도 없고, 잘 다듬어지지도 않았고, 멀미에 짜증을 내던 그 민낯 그대로의 나. 그 사람은 그런 나를 봤다. 그리고 배고프다고 말해줬다.

어떤 관계는 그런 식으로 기억된다. 가장 볼품없던 순간을 함께한 사람으로.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이유가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 같다.

잘해주지 못해서라고.

그리고 그 사람이 그럼에도 배고프다고 말해줬기 때문이라고.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백재민 작가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스트릿출신 글쟁이. 넓은 스펙트럼을 지향하는 이단아. 평론과 에세이를 쓰고 있습니다.

257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10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58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