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모두 옳은편이라 믿었다
혁명이 성공하고 깃발이 드높이 내걸린 이후에는 대개의 반골은 두 갈래 길에 선다. 전리품을 나누는 안락한 의자에 앉거나, 새롭게 세워진 권력의 장벽을 향해 다시 칼 끝을 겨누거나.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후자를 택했다. 러시아혁명의 주역, 최초의 여성장관. 혁명정부의 핵심각료 자리에 앉아서도 그녀의 눈은 다른 곳을 향했다. 그의 비판어린 눈이 향하던 곳은 '관료사회'로 변질되어가는 혁명정부다. 1921년 제10차 당대회가 열렸다. 국민이 자발적으로 형성한 평의회와 소련공산당원 대의원이 모여 러시아혁명의 방향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였다. 그 자리에서 콜론타이가 이끈 '노동자 반대파(Workers' Opposition)'가 들고 일어섰다. 혁명이후의 러시아를 이끌 주된 집단이 누구여야하는지를 따지고 묻는 싸움임과 동시에 사회의 존폐가 걸린 생산성을 어떤 가치지향아래 둘 것인지를 논증이기도 했다. 파벌싸움이라고 일축하는 말에 인정하기 어려울 정도의 격한 논쟁이 이어졌다.
콜론타이의 정치생명은 이렇게 시작한다. 제정러시아 귀족출신 장군의 딸로 태어나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유럽대륙에서 유학 중 마르크스주의에 눈떴고, 초기에는 멘셰비키 쪽에 붙었다. 급진적이었던 볼셰비키로 완전히 전향한 것은 1915년이었다. 말인즉 레닌이 1917년 4월테제를 발표해 니콜라이 차르가 한발 물러나 형성한 임시정부와의 협력을 거부하고 즉각적 사회주의혁명을 지지했다. 당 내부 주류로부터도 의구심이 가득했다. 콜론타이는 그 테제를 즉각 지지한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다. 레닌 곁에 서는것이 러시아를 위한 길이라고 여긴 그녀의 본능이었나보다.
그런 그녀가 1921년에는 레닌과 정면으로 맞섰다. 혁명이후 정부각료가 지향하는 방향에 동의하기 어려웠던 모양.
배경을 짚으려면 1920년부터 1921년 사이 볼셰비키내부의 '노동조합논쟁'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러시아는 총체적 붕괴상태에 가까웠다. 1914년부터 시작된 1차 세계대전, 1917년 혁명, 1918년부터 1920년까지 이어진 적백내전. 산업생산량은 1913년 대비 20% 수준으로 추락했다. 1921년 볼가강유역에서는 대기근이 시작되어 수백만명이 굶어죽었다. 내전 중 적백양측의 강제징발이 농촌을 고갈시킨 결과였다. 탐보프주에서는 농민반란이 우레와 같이 일었다. 안토노프가 이끄는 반란군은 한때 5만명 규모로 불어나 정규군과 교전했다.
이 상황에서 트로츠키는 내전의, 전쟁의 논리를 평시?에도 그대로 밀어붙였다. 노동조합을 국가기관에 편입시켜 생산을 군대식으로 통제하자는 주장이었다. 전시 공산주의의 연장선이었다. 레닌은 트로츠키보다 유연했다. 노동조합의 독립성을 일정부분 인정하고, 당 지도부가 조율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그러나 당 지도부가 생산을 관리한다는 대전제만큼은 트로츠키와 공유했다. 선택지의 차이라기보다 방법론의 차이였다. 양측 모두 노동자를 통치의 대상으로 전제했다는 점에서 구조는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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