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나이에 그 때의 아빠를 떠올려 보다
"아버지 머리에 뿔이 생겼다."
15년 전쯤이었을까.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엉뚱한 이야기였지만 그 목소리는 사뭇 진지했다. 그 진지함 때문에 나도 모르게 풋 웃음이 터져 나왔다.
"무슨 뿔이 나요. 아버지가 무슨 소도 아니고."
"농담 아냐. 진짜로 오른쪽하고 왼쪽하고 조금씩 뿔이 나오고 있어."
그 진지한 목소리가 또 한 번 나를 웃겼다.
"엄마도 개그맨 소질 있네.. 무슨 뿔이.."
어머니는 도무지 믿지 않는 내가 화가 나기도 하고 한편으론 이해되기도 한다는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다.
"하여간 뿔이 나고 있으니까 그렇게 알고 주말에 한번 내려와라."
전화를 끊으면서도 나는 픽픽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뿔이라니. 무슨 부조리극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어느 날 갑자기 머리에 뿔이 솟아나는 남자. 뿔이 점점 커져서 처음에는 모자로 가리고 다니지만 나중에는 모자로도 가릴 수 없게 되자 회사도 나갈 수 없게 되고, 그렇게 점점 사회생활과 유리되다가 결국은 혼자 남게 되고... 그러다가 소가 되어버리는 남자. 뭐 그런 이야기가.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찾아뵙지 못했던 터라 아마도 그것 때문에 "뿔이 났다"는 얘기일 거라 생각했다. 거기에 어머니는 주말이라도 자식들 보고 싶은 마음에 조금 과장을 보탰을 테고. 주말에 고향으로 내려가는 차 안에서 아내에게 이 이야기를 해줬더니 아니다 다를까 까르르 웃었다. 옆에서 듣던 아이들도 웃었다. 아마 그림 동화의 한 장면을 떠올렸을 게다.
그런데 그건 부조리극도 아니고 동화의 한 장면도 아닌 진짜 사실이었다. 거기 진짜 뿔이 있었다.
"할아버지. 신기해. 진짜 뿔이잖아."
아이들은 아버지의 머리 양쪽으로 조금씩 솟아난 딱딱한 부분을 손으로 만져가며 신기해했다. 아버지는 머리에 뿔이 난다는 그 기막힌 사실보다도 손주들이 그렇게 당신 옆에서 신기해하는 모습이 마냥 좋은 지 빙그레 웃기만 하셨다. 그 모습이 진짜 순하디 순한 소 같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병원에 가봐야 되는 거 아녜요?"
"뿔이 나건 혹이 나건, 이 나이에 아무렴 어떠냐. 그냥 이렇게 살다 가는 거지."
어머니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네 아버지가 저런 분이다. 이빨 사이 벌어져 치과를 가라고 해도 음식 끼지 않는다고 좋아하는 분이니까."
아버지는 그 사이가 벌어져 정말 뭐 하나 낄 것 같지 않은 치아를 드러내며 웃으셨다.
"뭐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라. 별거 아니란다."
아버지는 이미 아는 의사분을 통해 이야기를 들었던 모양이었다. 어머니도 내가 지나치게 걱정하는 건 원치 않는 얼굴이었다. 옆에서 한 마디 거들었다.
"뿔이 아니고 혹 같은 거라는데 다 스트레스 때문이란다. 사실 스트레스는 내가 더 받는데 꼭 저렇게 네 아버지가 티를 내더라. 내가 시집와서 받은 스트레스대로 뿔이 났으면 내 머리엔 뿔이 수십 개다 수십 개."
하하하 웃고 말았지만, 마음 한 편이 찡했다. 뿔이라니. 도대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실제로 뿔이 나오는 걸까.
어머니는 그래도 그 때 그 때 푸는 성격이시다. 그래서 어디서 좀 마음 상하는 일이 있으면 곧잘 내게 전화를 걸어 그 심사를 털어놓으신다. 때론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하는 격으로 내게 마구 화를 내기도 하신다. 젊었을 때는 그게 억울해서 같이 대거리를 하곤 했는데 지금은 그저 듣고만 있는다. 어머니는 어딘가 쏟아놓을 곳이 필요한 것이다. 그게 나라면 어머니가 그래도 나를 푸념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으로 생각한다는 얘기다. 그러니 그 화를 내는 것 같은 푸념이 꼭 기분 나쁜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가 그렇게 푸념하시는 걸 거의 보지 못했다. 물론 연세가 드시다 보니 마음이 약해지셔서 점점 푸념도 늘었지만 그래도 젊었던 시절부터 아버지는 거의 모든 당신의 말을 아꼈다. 뿔은 거기서 생겨난 것일 거라고 나는 상상했다. 밖으로 풀어냈어야 할 그 가시 같은 말들을 그저 꿀꺽 꿀꺽 삼켜버린 아버지는....
스트레스대로 뿔이 났으면 루돌프처럼 뿔이 수십 개가 됐을 거라는 어머니의 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다. 그 시절 엄마들은 그렇게 사는 게 당연한 것처럼 가족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며 살아오셨으니 말이다. 그런데 젊어서 소처럼 일했던 아버지가 점점 뒷전으로 밀려나 말이 없어지더니, 어느 날 머리에 뿔이 나도 이렇게 살다 가는 거라며 허허롭게 웃으셨던 그 모습은 지금 생각해보면 가슴이 저릿하다.
그로부터 세월이 흘러 어느새 나도 나이 들었다. 말 수는 점점 줄어들고, 아픈 데는 갈수록 늘어나고 기력도 예전 같지 않다. 그래서인지 유독 자주 아버지가 하곤 했던 "아빠는 괜찮다"는 말이 이젠 새롭게 들린다. 정말 아버지는 괜찮았던 걸까. 왜 '아빠도'가 아니고 '아빠는'이었을까. 혹 힘겨운 삶 저편에서 실은 괜찮지 않은 삶을 살고 계셨던 건 아닐까. 아버지. 그렇게 괜찮다고만 말고 화라도 내보세요. 속으로 이렇게 말하면서 나 스스로 다짐한다. 절대 가족들 위한다는 이유로 그저 "괜찮다"는 말만 반복하지는 말아야지. 그러다 어느 날 불쑥 내 머리 위에 뿔이 솟아날 지도 모를 일이니까. 혹 그 뿔을 보는 가족 중 누군가가 뒤늦게 가슴 아픈 마음을 갖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니까.
2024. 1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