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생활은 스트레스의 연속이다. 끊임없이 다가오는 스트레스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마음을 힘들게 하고, 심지어는 부지불식간에 우리의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한다. 이런 현상은 우리의 주변에서 자주 발생한다. 물론 걱정과 근심이 없었던 시대는 없었지만, 오늘날 우리가 겪는 걱정과 근심은 그 강도가 심해 많은 사람들을 심적 질환으로까지 이르게 한다.
이에 대한 해소책으로 최근에 주목받고 있는 것이 '명상'이다. 명상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삶의 본질에 관한 질문에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명상의 길은 그다지 쉬운 길이 아니다. 장소적 제한이 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반면, 명상의 방법을 이용하여 순간을 다스리는 마음의 수양은 일상에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하고 가족관계를 돈독히 하며 마음의 평화를 이루는 데 도움을 준다.
감정의 절제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인간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인간관계 없이 혼자 살아갈 수는 없다. 이러한 인간관계를 잘 유지하기 위해서는 감정의 절제(節制, self-control)가 필요하다. 유교에서는 감정의 절제를 극기(克己)라는 말로 표현하며, 유교의 중심 사상인 인(仁)을 실천하는 방법으로 제시한다. 반면 기독교에서는 절제를 성령의 열매로 설명한다.
긍정적인 감정의 표현
적절하게 사용하는 긍정적인 감정 표현은 우리의 마음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편안하게 해준다. 감정의 표현은 사실 언어를 초월하지만, 언어는 우리가 감정을 표현하도록 마음의 길을 열어주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연인 사이에 오가는 사랑의 속삭임, 부모와 자식 간의 끈끈한 정, 부부 간의 따뜻한 보살핌 등은 언어와 함께 감정이 전달된다.
배고픈 사람에게 밥 한 끼를 해주듯이, 도움을 준 사람에게는 감사의 말 한마디를, 슬퍼하는 이에게는 안식을 주는 말 한마디를, 분노하는 이에게는 평화를 주는 말 한마디를, 절망하는 이에게는 희망을 주는 말 한마디를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한마디의 말들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준다.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위안은 공감하는 표현이다. 정혜신 씨는 자신의 저서 '적정심리학'에서 이에 대한 좋은 실례를 제시한다. 예를 들어, 집에 딸아이가 '엄마, 나 죽고 싶어'라고 말할 때, 공감하는 대화는 감정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게 뭐냐?'와 같은 표현은 대화를 끊어버릴 수 있지만, '네가 그런 마음까지 드는구나. 언제부터 그랬는데? 그래서 네가 그랬구나. 얼마나 힘들면 그랬겠니?'와 같은 감정이 이입된 대화는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하고 지지하는 데 중요하다.
긍정적인 말과 침묵
'말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다' (Speech is silver, silence is gold)라는 영어 속담이 있다. 말을 중요하게 여기는 영어권 사회에서 '침묵'에 대한 재조명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침묵'을 중시해온 우리의 전통 관습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사실 바쁘게 생활하다 보면 말보다 침묵에 더 무게를 두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침묵은 늘 우리 주변에 있다. 상대방의 말을 긍정적으로 조용히 들어주는 것, 명상을 통해 마음의 정화 상태에 이르는 것, 스님들의 묵언 수행, 수도원에서의 침묵 기도 등 여러 예가 있다. 이러한 침묵은 말없이 고요한 마음의 표현이다.
말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힘이 되는 말, 해가 되는 말, 상처 주는 말, 격려의 말, 칭찬하는 말, 위로하는 말 등 다양하다. 사소한 말 한마디로 오랜 인간관계가 틀어질 수도 있고, 따뜻한 말 한마디가 약이 될 수도 있다. 말 속에는 긍정적인 힘도, 부정적인 힘도 함께 있다. 때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막힌 상황이 있기도 하고, 말없이 마음을 전하는 이심전심(以心傳心)도 존재한다.
말하지 않고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그러나 말을 많이 하다 보면 내 의도와 다르게 뜻이 전달되어 이런저런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긍정적인 말을 하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생각이 먼저 자리 잡아야 하며, 상대방에게 그 뜻이 바르게 전달될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도 필요하다. 긍정적인 말 속에는 따뜻한 마음이 깃들어 있다. 긍정적인 말은 말의 기교가 아닌, 말이 필요 없는 침묵의 말일 수도 있다. 자주 접하는 침묵의 시간은 우리의 마음을 고요하게 해주며, 긍정적인 말을 하도록 도와준다.
인정과 이해심
다른 사람들의 입장에 대한 공감을 감정이입(empathy)이라고 한다. 다소 낯설게 느껴지는 '감정이입'이라는 단어는 실제로 인간관계를 원만하게 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며, 심리학 분야에서도 매우 중요한 용어로 다룬다. 이에 대해 우리에게 조금 더 친근하게 다가오는 용어로는 인정(人情)이나 이해심(理解心)을 들 수 있다.
'나는 나' '너는 너'라는 생각은 개인주의적 입장이다. 그러나 '내가 너'의 입장에서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할 때, 보다 바람직한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한계를 감안해보면, '내가 너'가 될 수는 없다. 상대방의 모든 것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부분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내가 너'가 되는 경우, 오히려 예상치 못한 문제들이 발생할 수 있다. '내가 너'의 '너'는 결국 내가 만든 '너'일 뿐, 상대방 본래의 모습은 아니다. 이렇게 내가 만든 '너'와 교감을 하다 보면 사실상 '나와 나'의 교감이 되며, 심한 경우에는 슬픔과 고통의 수렁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인정과 이해심의 입장에서 본다면, '내가 너'라는 입장이 아니라 '나와 너'의 공존의식이 더 바람직하다. 이러한 공존의식은 인간관계를 보다 성숙한 단계로 승화시킬 수 있다.
부정적인 감정의 표현
사람이 스트레스 없는 생활을 영위할 수는 없다고 한다. 또한 스트레스 중에는 도움이 되는 좋은 스트레스도 있다. 다만 어려운 스트레스가 도를 지나치게 지속되면 불면증 등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소하기 위해 우리는 정기적인 운동, 충분한 휴식, 따뜻한 인간관계 등과 같은 활동을 해야 한다.
화가 나는 첫째 요인은 '너'와 '나'의 인식이라고 한다. '네가 어떻게 나에게 이렇게 할 수가?' 화가 나면 목과 등의 근육이 굳어지고 호흡이 가빠진다. '너'와 '나'의 인식이 없는 '무아'의 상태에서는 '화'도 없고, 이에 따르는 몸에서 일어나는 물리적인 현상도 사라진다.
화에 대해 마태복음 5장 22절은 이렇게 경고한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또한, 골로새서 3장 8절에서는 '분노, 격분, 악의, 중상, 또 여러분의 입에서 나오는 수치스러운 말 따위는 모두 버리십시오.'라고 가르친다.
앤 웨이먼(Anne Wayman)은 화가 본능적인 반응이라고 본다면, 분노는 화를 계속 가지고 있으려는 선택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분노는 현재의 시간을 상처받던 시점으로 돌이켜서 우리를 영원한 과거의 노예로 만들게 된다고 한다.
신학자 리차드 맥브라이언(Richard McBrien)은 사랑의 반대말이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무관심이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와 같은 무관심이 사회에 만연할 때, 그 사회는 병들게 된다. 신학에서는 '무관심(無關心)'을 '죄(罪)'라고까지 설명하는 경우도 있다.
느낌에 대하여
느낌은 '몸의 감각이나 마음으로 깨달아 아는 기운이나 감정'이라고 정의된다. 느낌은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며, 인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뜨겁고 차가운, 무겁고 가벼운, 덥고 추운, 기쁘고 슬픈, 찌르는 듯이 아픈 등 많은 느낌들을 인지한다. 또한, 무언가 다가오는 듯한 느낌을 가지는 경우도 있다, 말로 정확히 표현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오감과 육감
우리는 오감(五感)—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의 다섯 가지 감각(感覺)을 가지고 생활한다. 이러한 본능적인 감각은 동물들이 인간보다 우월하다고 한다. 개의 후각, 새의 시각, 동물들의 청각 등 그 예는 많이 있다. 지진을 느끼는 동물도 있고, 멀리서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는 해일(海溢)을 느끼는 짐승들도 있다. 이러한 오감 이외에도 과학적인 방법으로 실험실에서 증명할 수는 없지만 본능적으로 느끼는 육감(六感)도 있다.
예를 들어, 어릴 때 듣던 홀어머니 이야기가 있다. 전쟁터로 나간 외아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던 어머니는 매일 밤 물 한 사발을 상에 놓고 정성을 다해 천지전능하신 하늘에 기원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깜짝 놀라 깨면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며칠 후 집으로 온 편지 한 장을 받고, 가슴이 철렁거리고 아들의 전사 소식에 한없이 운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인간의 본능인 육감의 이야기라고 본다. 어머니가 밤에 놀라 일어난 순간이 아들이 전쟁터에서 전사한 순간일지도 모른다. 이 동시 사건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과학이 발달하여 빛의 속도를 계산해내었고, 빛의 속도가 우주에서 가장 빠른 물체의 속도라고 한다. 즉, 빛은 초당 30만 km를 이동한다. 이 속도는 1초에 지구의 둘레를 7바퀴 반 도는 속도이다. 지구에서 화성까지의 거리는 빛의 속도로는 짧게는 3분, 길게는 20분이 걸리며, 우주선의 속도로는 40일에서 1년 정도 걸리는 거리이다.
우리의 생각을 미래로 가서, 사람이 화성에 정착하기 시작했다고 상상해 본다. 그리고 홀어머니의 이야기를 생각해 본다. 사랑하는 아들이 화성에 갔다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원하는 홀 어머니의 마음과, 아들이 예상치 못한 사고로 화성에서 목숨을 잃게 되는 순간을 상상해 본다. 아들의 죽음이 우주에서 가장 빠른 속도인 빛의 속도로 어머니에게 전달된다면, 어머니의 놀람은 아들의 죽음에서 3분에서 20분 후 일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육감이 아들의 죽음과 동시에 일어난다고 한다면, 어머니의 육감은 빛보다 빠른 매체로 보아야 할 것이다.
경험이 주는 느낌
우리의 신경계에는 무릎 반사처럼 의지와는 관계없이 선천적으로 이루어지는 무조건 반사와, 맛있는 음식을 보면 침이 고이는 경험적으로 이루어지는 조건 반사가 있다. 또한, 우리는 어떤 힘들고 새로운 일을 배울 때 흔히 '감을 먼저 잡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때 '감을 잡는다'는 말은 새로운 일이 몸에 익숙하도록 여러 번 반복하여 익힌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누구에게나 선천적 요소인 재능이 있다. 그러나 재능은 후천적 요소인 노력이 없으면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좋아하는 운동이나 일에 대한 특정한 재능이 없어도, 그 일에 정성과 노력을 기울이면 풍요로운 삶의 멋을 느낄 수 있다. 예를 들어, 운동이나 악기를 잘 하려면 끊임없는 연습과 반복이 필요하다. 이러한 반복은 손이나 몸의 근육이 우리의 생각보다 앞서 스스로 행동하도록 하며, 이를 '근육 기억' 또는 '감을 잡는다'고 이야기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기억력을 두뇌의 활동에 국한한다고 생각한다. 학교를 다니면서 영어 단어 하나를 더 기억하고, 수학 문제 하나를 더 풀어야 하는 경쟁의 시대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기억력이 우수하면 우수할수록 더 나은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사실 기억력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두뇌의 활동이며, 둘째는 훈련과 연습을 통해 이루어지는 근육의 활동이다. 기억력은 두뇌만의 점유물이 아니다. 피아노 등의 악기를 연주하는 음악인들, 야구나 골프 등의 운동 선수들은 오랜 훈련과 연습을 통해 근육 기억을 개발한다.
호흡이 주는 느낌
호흡은 생명의 시작이며 생명의 징표이다. 호흡 없이는 생명이 없다. 호흡은 들숨과 날숨으로 구성되며, 이러한 들숨과 날숨이 반복되는 동안 우리는 생명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와 같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호흡을 우리에게 익숙한 직선적인 시간의 '크로노스' 개념으로 본다면, 호흡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에 이루어지는 행위이며, 호흡의 반복은 현재의 연속이다. 따라서 의식적인 호흡은 우리를 현재에 머무르게 한다.
한편, 이러한 호흡을 순간의 '카이로스' 개념으로 본다면, 우리가 행하는 모든 호흡은 들숨과 날숨의 순간들의 연속이다. 호흡을 느끼는 순간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의 순간'이다. 이러한 '현재의 순간'은 직선적인 시간의 '크로노스' 개념으로는 순식간이지만, '카이로스' 개념에서 그 순간의 느낌이 우리의 마음에 남을 때, 그 느낌은 영원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호흡을 느끼는 '현재의 순간'이 '영원한 현재'로 남을 수 있다.
감정과 느낌의 묘약
감정과 느낌에도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항상 함께 한다. 때로는 긍정적인 면이 앞서기도 하고, 때로는 부정적인 면이 더 두드러지기도 한다. 이러한 양면성은 음과 양의 자연스러운 순리에 따른 것이며, 삶의 복잡성과 균형을 반영한다.
긍정적인 면만 남기고 부정적인 면을 없애려는 노력은 힘들 뿐만 아니라, 자연의 순리에도 어긋난다. 대신, 긍정적인 면을 키우고 부정적인 면을 줄이려는 노력이 자연의 순리에 맞으며, 보다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감정과 느낌의 세계는 말이나 논리 이전의 세계이며, 노력 없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일은 없는 세계이다. 감정과 느낌은 예술과 음악의 모태가 되며, 서로를 이해하고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도와준다.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더 긍정적일 수 있도록 방향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