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는 꿈이 있다. 길몽, 흉몽, 비몽사몽, 태몽, 해몽 등 다양한 종류의 꿈이 존재한다. 꿈은 대체로 현실 세계의 모습이 내면 세계에 비추어진 것이다. 이는 마치 아름다운 풍경이 잔잔한 호수에 비친 모습과도 같다. 바람이 불면 아름다운 풍경은 사라지지만, 그 아래 깊은 호수는 변함이 없다. 꿈도 사라지면 그 아래 깊은 내면 세계가 자리 잡고 있다. 꿈은 내면 세계의 겉으로 드러난 표상과 같다.
꿈이 있는 내면의 세계에는 생각의 세계도 있고, 마음의 세계도 있으며, 정신과 영혼의 세계도 있다. 생각과 마음, 정신과 영혼은 서로 맞물려 움직이기도 하고, 각각 따로 움직이기도 한다. 생각과 마음과 정신은 우리의 몸에 따르며 몸과 함께하지만, 몸이 태어날 때 주어지고 우리가 성장하며 돌보는 영혼은 우리를 미지의 세계와 연결한다.
우리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자연의 섭리를 목격한다. 예를 들어, 연어는 민물에서 태어나 바다로 나가고, 바다에서 몇 해를 보낸 후 다시 태어난 곳으로 돌아와 알을 낳고 생을 마친다. 또한, 우리 옛말에서는 어른이 돌아가셨을 때 “돌아가셨다”고 표현한다. 이는 본래 온 곳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의미이다. 생명이 다하면 재에서 몸은 재로 돌아가고, 대어날 때 생명 안에서 씨가 내려 싹트고 성장한 영혼은 본래 내린 곳으로 다시 돌아간다.
불교에서는 불성(佛性)을, 기독교에서는 영성(靈性)을, 유교에서는 인성(人性)을 이야기한다. 무한한 우주의 세계 속에서 인간은 티끌보다도 작은 실상을 가진 존재이지만, 그 작은 존재 안에 담긴 한없이 크고 영원한 허상의 세계는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하늘의 선물이다.
우리에게는 생각, 감정, 마음, 정신이 있다. 생각의 본질을 자아(自我)라 본다면, 인간의 본질은 영혼(靈魂)이라 할 수 있다. 영혼(靈魂), 혼령(魂靈), 혼(魂), 넋 등은 같은 의미로 사용되며, 우리말에서는 ‘넋,’ 한자어로는 ‘영혼(靈魂),’ 영어로는 ‘soul’ 또는 ‘spirit’로 표현한다.
‘넋 나간 사람’ 또는 ‘넋 빠진 사람’은 ‘정신 나간 사람’ 또는 ‘정신 빠진 사람,’ 혹은 ‘얼 빠진 사람’과 같은 뜻으로 쓰인다. 영혼을 일컫는 ‘넋’은 마치 정신에 감싸여 있는 듯하며, 이는 정적인 영(靈, soul)과 동적인 정신(精神, spirit)이 하나로 작용하는 모습을 닮았다.
영혼의 존재 여부는 누구도 명확히 답할 수 없는 영원한 숙제다. 그러나 영혼이 없다고 단언할 수 없기에, 우리는 영혼에 대한 탐구를 지속하게 된다. 만약 영혼이 존재한다면, 그 형태는 생각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뜬구름과 같은 것인지, 말이나 소리처럼 파동의 형태인지, 혹은 에너지를 지닌 것인지에 대해 궁금증을 갖게 된다. 비록 영혼이 파동, 입자, 또는 에너지의 형태가 아닐지라도, 영혼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살아 있는 존재(being)이다. 영혼은 정신과 상호작용하며 마음과 교류한다.
물질의 구조가 실상의 세계에 속하므로 허상의 세계에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지만, 편의상 영혼을 물질의 원자 구조에 비유해 보려 한다. 원자의 핵을 영혼에 비유한다면, 핵을 둘러싼 전자의 궤도는 정신(spirit)의 상태로 볼 수 있다. 정신의 상태에는 기쁨, 슬픔, 피로, 지침 등 다양한 상태가 있다. 또한 영혼의 영어 표현인 'soul'은 영혼의 세계에서 그 사람 자체를 지칭하기도 한다.
정신 상태는 마음가짐이며, 그 마음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달된다. 마음이 흔들리면 정신도 흔들리고, 마음이 바르면 정신도 바르다. 마음이 기쁘면 정신도 기쁘고, 마음이 슬프면 정신도 슬프다. 이처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정신과 마음의 상태는 인간의 본질인 영혼에 작용하여 조용한 영혼, 쓸쓸한 영혼, 불쌍한 영혼 등으로 표현될 수 있다.
영혼의 세계
영혼의 세계는 허상의 세계이므로, 없다고 생각하면 없고, 있다고 생각하면 있으며, 없다는 가정보다는 있다는 가정이 허상의 세계에 더 가깝다. 영원의 세계는 무한하며, 우리는 그 일부만을 믿음, 명상, 육감, 경험 등을 통해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실상의 세계에서 우리는 길을 따라 살아간다. 하늘에는 비행기의 길, 바다에는 뱃길, 물에는 물길, 산에는 산길, 들에는 들길이 있으며, 삶에도 수많은 길들이 있다. 이와 같이 신앙이나 종교는 우리에게 영혼의 세계로 가는 길을 제시한다. 영혼의 세계로 가는 길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지만, 적합한 길을 선택하는 것이 첫 과제라 할 수 있다.
영혼의 메신저
몸이 생기면 생명이 움트고, 생명 안에 영혼의 씨앗이 싹튼다. 몸이 자라면서 마음과 정신이 점점 분명해지고, 영혼의 씨앗은 뿌리를 내리며 함께 성장한다. 어린 시절의 ‘나’와 나이 들었을 때의 ‘나’가 같은 존재인 것처럼, 어린 시절의 ‘영혼’과 나이 들었을 때의 ‘영혼’도 동일한 ‘영혼’이다.
마음과 정신은 영혼의 메신저이다. 마음이 선하면 영혼이 기뻐하고, 마음이 악하면 영혼이 괴로워한다. 생각이 없어도 영혼은 존재하며, 정신을 잃으면 영혼은 떠나고, 정신을 되찾으면 영혼이 돌아온다. 실재하는 몸이 죽어 사라져도 비물질적인 영혼은 허상의 세계에 영원히 남는다.
허상의 세계에는 죽음이 없다. 예를 들어, 한 번 일어난 생각은 사라질 뿐 죽거나 없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사라졌던 생각이 때로는 다시 떠오르기도 한다. 마치 생각을 담아두는 주머니가 어딘가에 있는 듯싶다. 영혼과 연결된 정신(spirit) 역시 생각과 마찬가지로, 한 번 일어난 정신은 죽거나 없어지지 않고 사라질 뿐이며, 사라진 정신은 다시 나타난다. 정신은 마치 영혼이 존재하는 허상의 세계와 실상의 세계를 이어주는 듯하다.
영혼이 존재하는 허상의 세계에는 시간도 공간도 없다. 오직 지금, 바로 현재의 순간만이 있을 뿐이다. 시간이 없는 허상의 세계에는 과거도 미래도 없으며, 과거와 미래, 그리고 현재가 모두 하나로 존재할 뿐이다. 예를 들어, 영혼의 세계에서 어린 시절의 영혼, 젊은 시절의 영혼, 노년의 영혼이 모두 같은 ‘나’이듯, 그 모든 시점의 ‘나’는 하나의 영혼이다.
과거와 미래의 시간을 초월하는 허상의 세계에서 현재의 순간은 과거와 미래와 함께하며, 그 순간은 영원하다. 영혼의 세계에서 과거에 슬퍼했던 영혼은 지금도 슬퍼하고, 미래에 기뻐할 영혼은 지금도 기뻐한다.
빛 보다 빠른 것은 없다고 한다. 근래에 들어 ‘양자 얽힘’(Quantum entanglement)에 대한 신문 기사가 종종 나온다.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공간적으로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두 부분계에서 정보가 한 계에서 다른 계로 순식간에 이동한다는 이론이다. 두 부분에서 동시에 일어날 수 있는 경우는 빛의 속도를 넘어간다.
정신(精神)이란 사물을 느끼고 생각하며 판단하는 능력. 또는 그러한 작용으로 정의한다. 이와 같은 작용은 행위나 행동을 의미한다. 즉 마음이 정적인 상태라면, 정신은 동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정신은 마음을 움직이고 의식을 갖게 하며 생각을 일으킨다. 정신 없이는 마음도 의식도 생각도 있을 수 없다. 맑은 정신 속에서의 마음과 의식과 생각은 맑고 깨끗하다.
우리 말 속에는 정신을 사용하는 표현이 많이 있다. 이를테면 정신없다, 정신 차리다, 정신 나가다, 정신이 들다 등 다양한 표현들이 있다. 이는 우리 전통 문화가 정신을 중요시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정신의 영어 표현은 spirit 또는 mind이다. 때로는 영혼에 해당하는 soul, 의식에 해당하는 consciousness나 awareness도 정신의 영역일 수 있다. 정기신(精氣神)에 바탕을 한 정신은 마음에 해당하는 mind 보다는 spirit 또는 영혼에 해당하는 soul이나 의식에 해당하는 consciousness 나 awareness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인을 배달민족 또는 한(韓)민족이라 하고, 한국인의 정신을 '은근과 끈기'라고 한다. 이러한 한국인의 정신에 종교가 차지하는 부분은 지대하다. 김철준 교수는 '고대부터 중세 현대에 걸쳐 그때마다 정신 지도이념으로서 종교가 등장했다.' 고 설명한다. 정신문화에 관한 한국의 전통 종교의 관점은 방대한 자료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 글은 한국의 전통 사상의 바탕인 유불선(儒佛仙) 3교와 현대 사상의 바탕인 기독교(基督敎)의 기본 사상 중 본 글의 주제와 연관이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따라서 본 글에서 다루는 내용은 기유불선(基儒佛仙) 4교의 네 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한국 정신문화의 작은 일부분에 불과함을 강조한다.
우리 문화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정신사상은 선도(仙道)에서의 정기신(精氣神) 원리와 맥을 같이한다. 선도에서는 정기신을 사람이 가진 삼보(세 가지 보물)라고 칭한다. 여기서 정(精)은 생명체를 구성하는 근육이나 뼈와 같은 물질로, 이는 초의 기름에 비유된다. 기(氣)는 공기, 원기, 진기 등 생명의 에너지로, 이는 초의 심지를 타고 타오르는 화염에 해당한다. 마지막으로 신(神)은 정신, 마음, 생각 등의 정신작용으로, 초에서 퍼져나오는 빛에 해당한다.
정신과 몸, 마음이 하나로 일치한다는 것은 우리가 지향할 수 있는 인간 본연의 자세라 할 수 있다. 이는 모든 걱정과 근심이 사라지고 자신의 진면목을 통찰하며, 우주의 흐름과 조화를 이루는 초월적 상태, 즉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경지로 볼 수 있다.
초월 상태는 논리의 대상이 아니다. 논리는 논리의 상태에서만 그 힘을 발휘하며, 그 상태를 벗어난 초월적 상태에서는 무의미하다. 마찬가지로, 근심과 걱정도 이 초월적 상태에서는 무의미하다. 이는 마치 거세게 몰아치는 바다 표면과 고요한 바다 속 상태를 비교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초월 상태는 우리의 일상 속에서 지속적으로 유지되기 어렵고, 걱정과 근심의 원인을 직접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가 근심과 걱정의 상태에서 벗어나 고요한 상태로 이동함으로써, 걱정과 근심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움직이는 정신
정신(精神)은 사물을 느끼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 또는 그러한 작용을 의미한다. 이러한 작용은 행위나 행동으로 나타난다. 즉, 마음이 정적인 상태라면 정신은 동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정신은 마음을 움직이고, 의식을 형성하며, 생각을 일으킨다. 정신 없이는 마음도, 의식도, 생각도 존재할 수 없다. 맑은 정신 속에서 형성된 마음과 의식, 그리고 생각은 순수하고 깨끗하다.
우리말 속에는 정신을 사용하는 표현이 많이 있다. 이를테면 '정신없다', '정신 차리다', '정신 나가다', '정신이 들다' 등 다양한 표현들이 있다. 이는 우리 전통 문화에서 정신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정신의 영어 표현으로는 spirit 또는 mind가 있다. 때로는 영혼에 해당하는 soul, 의식에 해당하는 consciousness나 awareness도 정신의 영역에 포함될 수 있다. 정기신(精氣神)에 바탕을 둔 정신은 마음에 해당하는 mind보다는 spirit, 영혼에 해당하는 soul 또는 의식에 해당하는 consciousness나 awareness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정신의 문
우리에게는 정신과 관련된 다양한 표현들이 존재한다. 병상에 정신없이 누워있는 환자에게는 '정신이 좀 드세요?'라고 묻기도 하고, 큰 실수를 했을 때는 '정신 나갔구나' 혹은 '정신이 있냐?'라고 말한다. 정신없이 바쁘게 일할 때는 '정신없이 일했다'는 표현을 쓰고, 이른 아침 비몽사몽한 상태에서는 '정신이 들락말락'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표현들은 우리의 삶 속에서 정신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보여준다.
정신은 호흡이나 마음처럼 끊임없이 움직이는 동적인 존재이다. 하지만 호흡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호흡하고', 마음은 우리가 '마음 먹고' 작용할 수 있는 반면, 정신은 우리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다. 마치 우리 몸속에 정신의 출입문(出入門)이 따로 있는 것처럼, 정신은 스스로 우리에게 들어오기도 하고 나가기도 한다. 정신 없이는 우리가 살아갈 수 없으며, 한 번 들어온 정신은 우리의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한다. 정신의 귀함을 다시금 되새기며, 이를 잘 보살피고 가꾸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낀다.
정신의 일치
정신과 몸, 마음이 하나로 일치한다는 것은 우리가 지향할 수 있는 인간 본연의 자세라 할 수 있다. 이는 모든 걱정과 근심이 사라지고 자신의 진면목을 통찰하며, 우주의 흐름과 조화를 이루는 초월적 상태, 즉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경지로 볼 수 있다.
초월 상태는 논리의 대상이 아니다. 논리는 논리의 상태에서만 그 힘을 발휘하며, 그 상태를 벗어난 초월적 상태에서는 무의미하다. 마찬가지로, 근심과 걱정도 이 초월적 상태에서는 무의미하다. 이는 마치 거세게 몰아치는 바다 표면과 고요한 바다 속 상태를 비교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초월 상태는 우리의 일상 속에서 지속적으로 유지되기 어렵고, 걱정과 근심의 원인을 직접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가 근심과 걱정의 상태에서 벗어나 고요한 상태로 이동함으로써, 걱정과 근심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정신의 힘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라는 말이 있다. 시간의 제약, 탁한 공기, 패스트 푸드의 유혹 등 열악한 여건에서 생활하다 보면 충분한 수면이나 운동에 부족이 생기고,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한 건강한 음식을 섭취하기도 쉽지 않다. 이러한 생활 여건은 건강에 영향을 주며, 각종 스트레스는 건전한 마음과 정신을 흩트리게 된다.
꾸준히 가꾸어 나가는 건강한 정신은 우리의 몸과 마음이 방향을 잃고 방황할 때, 주위의 유혹을 물리치고 바라는 길로 정진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며, 희망과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힘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힘을 우리는 '정신력'이라고 부른다. 정신력은 우리가 고요한 마음을 유지하며, 생활에 충실하고 삶의 진면목을 접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정신집중
우리 속담에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라는 말로 아무리 위급한 상태에 몰려도 정신만 분명히 차리고 있으면 피할 수 있다는 뜻이다. 몸과 마음이 하나로 모이는 정신일치의 상태는 정신이 통일된 상태이다. 정신통일(精神統一)은 정신집중(精神集中)을 통해 이루어진다. 정신집중은 온 마음의 초점을 하나의 일에 몰두하는 행위이다. 정신집중이 이루어지는 상태에서는 아무 잡념도 없으며, 옆에 있는 사람이나 주위의 소음에도 전혀 구애받지 않는다. 사실 정신집중 없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운동, 공부, 붓글씨, 바둑, 피아노 등에서는 정신을 집중해야 원하는 결과가 나오게 된다. 공부나 바둑의 경우에는 두뇌 개발을, 운동이나 피아노의 경우는 동작의 반복을 통해 몸 속에 잠재된 제2의 기억을 계발하며, 궁도나 사격 등의 경우에는 순간을 다루는 인지 능력을 계발하게 된다.
정신집중은 몸을 의미하는 정(精)과 마음을 의미하는 신(神)이 하나를 이루는 정신통일(精神統一)을 이루게 된다. 또한 정신통일은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의 고사성어와 통한다. 즉, 몸과 마음이 하나로 모이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러한 정신통일을 단전호흡 등의 의식적 호흡과 연결하여 마음을 닦는 수양법으로 사용하였으며, 그 효과는 오늘날 현대 사회의 스트레스 문제를 다루는 정신의학 등에서 크게 대두되고 있다.
정신차림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모으면, 평소에 지나치던 주변의 꽃나무가 눈에 들어오고, 빗소리, 바람소리, 새소리, 물소리 등 자연의 소리도 들린다. 이때 우리의 시선을 몸 안으로 돌리면, 호흡을 통해 몸속으로 들어오는 신선한 공기도 느낄 수 있다.
정신차림은 우리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spirit(정신, 영혼, 넋, 기분, 마음)의 흐름을 감지하고 느끼게 한다. 예를 들어, 기쁘고 즐거운 spirit을 가진 사람과 마음을 나눌 때, 우리는 그 사람의 긍정적인 기운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느끼는 이러한 즐거운 기운은 우리를 진심으로 대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져, 그들 역시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게 할 수 있다.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하나로 모을 때, 우리는 자연 속에서 '나'를 발견하고, 주변 속에서 '나'를 찾게 된다. 이는 거대한 우주 속에서 일어나는 자연의 섭리가, 우주의 별만큼이나 많은 세포를 가진 우리의 두뇌 속에서도 일어나 '나'를 형성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현상을 직시한 우리의 선조들은 이를 '소우주'라 불렀다. 대우주의 삼라만상을 주관하는 존재를 조물주라 한다면, 소우주의 신비로운 흐름은 우리 몸의 주인인 '나'를 의식하는 정신이 주관한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