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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상과 허상 Oct 17. 2024

전통 사상의 개요

지금은 사라져가지만, 우리의 전통문화에서 60살을 환갑(還甲) 또는 회갑(回甲)이라고 한다. 갑 을 병 정 무 기 경 신 임 계 (甲乙丙丁戊己庚辛壬癸)의 10간(干)과 자 축 인 묘 진 사 오 미 신 유 술 해 (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의 12지(支)가 맞물려 돌다가 다시 제자리에 돌아오는데 60년이 소요된다는 계산이다. 

세상은 변해서 요즈음에는 60살 환갑 잔치를 보기가 쉽지 않을 정도이다. 아무튼 60살 회갑이 되면 10간(干)과 12지(支)를 사용하는 사주팔자(四柱八字) 조차도 새롭게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한다.


영혼(靈魂)에 대하여

영혼은 '육체에 깃들어 마음의 작용을 맡고 생명을 부여한다고 여겨지는 비물질적 실체'라고 하며, '혼', '영', '넋' 등의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넋이 나가다', '넋이 빠지다', '넋이 없다', '넋을 놓다', '혼이 나가다', '혼을 부르다' 등의 표현이 있다.


살아있는 영혼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는 우리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설화이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어릴 적에 듣던 설화, 어려서 부르던 동요, 부모님 과의 기억 등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부모님 과의 아름다운 기억은 보모님의 영혼이 내 마음속에 살아있다고 느끼게 한다.

마음 깊은 곳에는 나를 인식하는 자아(自我) 또한 자리하고 있다. 나에 대한 인식은 이름을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모세는 하느님을 인식하기위해 하느님의 이름을 구한다. [참고: 탈출기 3장 14절]  우리 조상들은 이름 이외에 자신을 칭할 때는 호(號)를 사용하였고, 자식들에게는 '나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예명을 가지기도 한다.

한평생 사시고 세상을 떠나시는 부모님들을 우리는 돌아가셨다고 이야기한다. 조상의 혼을 중요시하는 시베리아 샤머니즘에 따르면, 영혼이 처음 온대로 돌아간다는 의미이다. 처음 온대로 다시 돌아가셨다고 하는 부모님의 영혼은 '나다'라고 하는 자아의 이름을 가지고 우리의 마음속에 살아있다.


무속(巫俗)의 영혼관(靈魂觀)

무속에서는 인간을 육신과 영혼의 이원적 결합체로 보며, 영혼이 육신의 생존적 원력(原力)이라 믿는다. 영혼은 형태가 없는 기운으로서 인간 생명의 근원이며, 인간의 생명 자체를 영혼의 힘으로 믿는다. [참고: 김승혜, 김성례. 그리스도교와 무교. 158]  또한 영혼을 사령(死靈)과 생령(生靈)으로 분류하며, 사령(死靈)은 사람이 죽은 뒤에 저승으로 가는 영혼, 생령(生靈)은 살아 있는 사람의 몸 속에 깃들어 있는 영혼을 뜻한다. 영혼은 인체와 같은 모양이지만 꿈이나 환상 또는 무당을 통하여 볼 수 있고, 공중을 자유롭게 떠다니며 시간이나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불멸의 것으로 믿고 있다.  또한 영혼은 살아있는 사람과 동일한 인격을 가지는 것으로 생각하여 사람과 똑같은 인격적인 대우를 한다. [참고: 기진오. 무속신앙(무당)]


무당(巫堂)과 굿

한국 무속 신앙에서는 무당(巫堂)과 굿이 기본을 이룬다고 볼 수 있다. 무당(巫堂)은 신령세계와 인간세계 사이의 중재자로, 춤을 통해 신을 내려오게 하는 사람이다. [참고: 김승혜, 김성례: 그리스도교와 무교. 16]

굿은 신과 인간이 만나는 소통의 장으로, 굿의 목적에 따라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굿, 죽은 사람을 위한 굿, 마을을 위한 굿 등으로 구분된다. 굿을 미신으로 여기는 부정적인 시각도 있지만 무속 신앙 안에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참고: 홍태한. 굿(巫祭)] 


신내림

강신(降神)이라고도 불리우는 신내림은 신이 무당에게 내리는 현상으로, 신이 무당의 몸에 내려와 무당의 의식을 지배하게 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 때 무당은 자신을 통제하는 자의식을 벗어나, 초월적 세계와 현실세계를 연결하는 반의식 상태로 변하게 된다. [참고: 강정원, 신내림]  신이 인간에게 내릴 때 손과 팔이 떨리며 신바람이 나고 신명(神明)이 난다고 표현한다. [참고: 김열규. 신명(神明)]

신명(神明)나는 소리는 신바람 나는 소리이다. 마귀를 쫓아내는 힘을 지닌 무속의 신명나는 장단은, '덩덩 쿵덕쿵'과 같은 굿거리 장단일 수도 있고,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지닌 신바람 나는 소리일 수도 있다. 신명나는 소리는 귀로 듣는 밖에서부터 들려오는 소리라기 보다 마음속에 울림이 따라올 때 가슴속 깊은 곳에서 느끼는 감정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파도소리, 바람소리, 새소리도 마음이 평화로우면 신명 나고 신바람 나는 소리로 바뀔 수 있다.


신들림

아이들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면서 재미있게 노는 걸 다른 말로 '애들이 신나게 노네'라고 한다. 신이 나다, 신이 들리다, 신바람 나다 라는 표현은 일반성을 넘어 특정한 사건에 최고 수준으로 몰입하는 경지, 즉 신앙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무당이 굿할 때 신과 만나는 순간이나 맨발로 작두를 타는 행위 등을 보고 우리는 '신이 들렸다' 또는 '신들림'이라고 한다. 사실 이와 같은 신들림은 우리가 우리 일상 생활 속에서 이따금씩 경험하기도 한다. 온 정신이 하나로 쏠릴 때 평상시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일들을 이루어 내는 현상을 '신들림'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운동 경기나 동물의 세계에서도 목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야구 투수가 퍼팩트(perfect) 경기를 끌고 가는 것, 투수와 타자와의 기 싸움, 개구리가 뱀 앞에서 얼어붙는 경우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살풀이

무속 의식(巫俗儀式)에서 살풀이 춤은 재액(災厄) 즉 살(煞)을 푸는 춤이다. 살풀이 한다는 말에서 살(煞)은 악귀(惡鬼)의 나쁜 소행으로 인간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재앙을 뜻하며, 무속에는 조상살, 부정살 등 190여 종류의 살(煞)이 있다고 한다. [참고: 이필영. 살(煞)]

이러한 살은 '살이 끼다' 또는 '살이 들리다' 등의 표현으로 우리의 생할 속에서 사용된다. '살이 끼다' 라는 표현은 본연의 마음에 마귀가 들어와 끼어 들었다 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으며, 살풀이는 이렇게 마음 속으로 들어와 끼인 살을 풀어 내보낸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마음 속으로 들어오는 살(煞)은 마귀이며, 마귀가 마음을 짓 누르기는 하지만 마귀와 마음은 별개이다. 이와 같은 마귀와 마음의 관계는 성경에서 여러 번 인용되기도 한다. 


기독교의 영혼관(靈魂觀)

기독교는 동양의 전통 사상을 이루는 유불선(儒佛仙) 3교(三敎)와는 차이가 많이 있다. 유일신, 부활, 사후 세계, 영혼불멸 등에 대한 믿음이 강조되는 종교이다.  


영혼(靈魂)의 구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유한한 세계이며, 우리 안에 존재하는 영혼이 영원히 사는 하느님의 세계는 무한한 세계이다. 우리 안에서 잠자고 있는 영혼을 깨우고 그 영혼을 하느님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 영혼의 구원이다.


영성(靈性)과 정신(精神)

예수님은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을 함께 가지신 분이시다. 예수님께로 인도하여 주는 영성은 우리 안에 내재하는 신령한 품성으로, 영어로는 immanent nature 또는 spirituality라고 한다. 또한 영성은 '하느님은 영(靈)이시다' [참고: 요한 복음서. 4:24] 라는 복음 말씀에 따라 영의 본질 또는 하느님의 현존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느님 현존의 세계는 영의 세계이며, 영원한 생명의 세계이다.

히브리어에서는 영(靈, spirit)이 생명, 호흡, 바람의 뜻을 지니고 있다.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한다는 것은 호흡으로 주어진 인간의 생명이 영원한 생명으로 거듭나는 신비의 변화이다. 이와 같은 영(spirit)은 의식적 차원을 넘어서서 혼(soul)과 몸(body)을 연결하며 통합하는 어떤 실체이다. 이와 같은 영(spirit)은 모임이나 공동체 안에서 강하게 느끼게 된다.
 

 

도교(道敎)와 선도(仙道)의 이해

노자(老子, 기원전 약 600년)와 장자(莊子, 기원전 약300년)에서 비롯되는 도가(道家)의 철학은 도덕경(道德經)에 바탕을 두고 있다. 도덕경(道德經)은 상편 37장의 도경(道經)과 하편 44장의 덕경(德經)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교의 도래

우리 나라에는 고대로부터 도교를 수용하기에 적합한 토착적인 고유 문화 현상으로서 단군신화 등의 신선사상 및 그것들과 연관이 있는 각종의 방술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며, 고구려 말기 보장왕은 연개소문(淵蓋蘇文)의 건의로 당나라에서 도교(道敎)를 도입하여, 국가적인 종교로 발전한다. 도교는 삼국시대 후반기에 고구려, 백제, 신라에 영향을 미쳤으나, 도교의 발전은 국가적이라기 보다는 민간 신앙의 형태를 띄어 왔다. 


도교의 이해

도교와 불교에서는 일체의 상념과 집착을 떠나 무아(無我) [산스크리트어: 아나트만 (Anātman)]의 경지에 이르러 아무런 생각이 없는 고요한 무심(無心) 또는 적정(寂靜)의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상태를 추구하며, 무념무상의 상태는 스스로의 자신 조차를 잊고 있는 무아지경 (無我之境)의 경지로 인도한다. 무아지경은 무위자연 (無爲自然)의 경지이기도 한다. 도(道)를 인간 땅에 구현하는 덕(德)의 실천에서 유가(儒家)는 인위적인 수양과 노력을 강조하며, 도가(道家)는 형이상학적이고 신비주의적인 무위(無爲)를 강조한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스스로 이루어지는 자연의 섭리에 따라 우주를 주관하는 하늘의 도(道)를 깨닫게 된다. 이러한 무위자연 사상은 1960년대 미국인들이 발전시킨 '히피문화'에 많은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덕성(德性)

도교(道敎)의 덕성(德性)은 자연의 법칙인 도(道)를 따르며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무위(無爲)의 덕목(德目)을 제시한다. 도덕경 제2장은 '도(道)를 도(道)라 하는 것은 진정한 도(道)가 아니고, 이름을 이름이라 하는 것은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 하늘과 땅은 이름 이전에 있었고, 이름은 만물의 어머니' 라고 한다. 논리의 모순 같아 보이지만, 진정한 도(道)는 이름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도(道)는 하늘과 땅이 생기기 전에 이미 있었고, 소리도 형체도 없으며, 무엇에 의존하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으며, 계속 움직이지만 없어지지 않는 만물의 근원이다. 

도덕경 제37장은 '도(道)는 늘 함이 없으면서도 아니함이 없다 (道常無爲 而無不爲)' 라고 한다. 또한 제48장은 '무위에 이르면 아니함이 없다 (無爲而無爲不爲)' 라고 설명한다. 하늘의 도(道)는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 그대로인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법칙에 따른다. 무위(無爲) 라는 말은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안 하면서 무엇인가를 한다는 '함이 없는 함', 즉 무위지위 (無爲之爲)를 뜻한다. 자연(自然)의 삼라만상 (森羅萬象)은 무위(無爲)의 모습이며, 인위(人爲)가 없는 이러한 자연(自然)이 무위자연 (無爲自然) 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집중수행 방식으로 입산수도(入山修道)를 발전시킨다. 도(道)를 닦기 위해 수도자들은 속세를 버리고 산속에 들어가 세속에 물들은 마음을 깨끗이 닦으며, 자연의 법칙을 따르며, 우주의 진리로 통하는 길을 닦아, 무위(無爲)의 도(道)를 통하여 우주와 일치하려고 했다. 인간의 덕(德)은 인위적인 행위를 버리고 자연의 법칙인 무위(無爲)의 도(道)를 따르며 유유자적 (悠悠自適) 하게 살아가는 삶의 자세이다. 이러한 도(道)와 덕(德)의 일치는 인간이 정신적으로 누릴 수 있는 초월의 상태, 즉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삶을 의미한다. 


도가사상(道家思想)

도가사상(道家思想)은 우주 자연의 법칙인 무위(無爲)의 도(道)의 원리와 인위적인 행위를 버리고 자연의 법칙에 따르는 인간의 덕(德)을 제시한다. 우주 만물의 근원인 도(道)는 무(無)에서 시작된다. 무(無)는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긴 하지만, 없는 것이 아니라, 빈 그릇과 같아서 무엇인가를 담을 수 있다는 뜻이다. 즉 우주 만물의 유(有)를 창조하는 한없이 큰 그릇을 의미하는 무(無)이다. 

도(道)는 인위(人爲)가 없고 '함'이 없는 무위(無爲)이다. 무위(無爲)는 아무 하는 일 없이 가만히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함'이 너무도 자연스럽고 자발적이어서 보통의 '함'과는 너무도 다른, 즉 '함' 이라고 할 수도 없는 '함'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무위(無爲)의 '도'는 비방하고 폄하하는 등 일체의 인위적인 행위를 모두 버리고 '덕'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 길이다.

도(道)는 욕심이 없는 무욕(無慾)이다. 무욕(無慾)의 '도'는 아무런 꾸밈이 없고 자연 그대로인 숲 속의 나무처럼, 자기 중심의 이기심과 욕심을 버려야 '덕'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 길이다.

도(道)는 잘못된 선입견이나 지식이 없는 무지(無知)이다. 무지(無知)의 '도'는 이기심을 위해 사용하는 지식 등을 버려야 '덕'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 길이다.


선도(仙道)의 이해

한국의 전통 종교는 유불선(儒佛仙)이다. 유불선의 선(仙)은 선도(仙道) [또는 선교(仙敎)]를 의미하며 도교의 기본사상과 맥을 같이 하며 동아시아권 정신문화에 깊은 뿌리를 내린다. 선도(仙道)의 선(仙)사상은 인간이 역리(易理)에 따르는 우주(宇宙)와 합치하여 자연(自然)과 조화(調和)를 이루는 선인(仙人)의 경지를 지향한다.


역리(易理)

역리(易理)는 우주 만물의 생성변화에 관한 원리를 설명한다. 역리(易理)를 담은 역경(易經)은 유교와 도교에서 경전으로 분류되는 책으로, 구석기 시대에 동이(東夷) 겨레의 삼황오제(三皇五帝) 중 태호복희(太皞伏羲)가 8궤 이론을 그리고 후에 주 문왕과 공자가 완성했다고 한다.

역(易)의 태극은 우주생성과 구성을 의미한다. 역(易)에는 태극이 있고, 태극은 음(陰)과 양(陽) 양의(兩儀)를 생기게 하고, 양의는 사상(四象)을 생기게 하고, 사상은 팔괘(八卦)를 생기게 하며, 여기에서 만물이 생겨난다고 한다. 따라서 만물의 근원이 태극이다.

태극(太極)은 음과 양이 나누어지기 이전의 혼돈(混沌)상태의 기운(氣)이다. 역(易)의 사상에서 태극은 우주의 본체인 기(氣)의 원초적 형태이고, 태극 그 자체는 형상과 성질이 없으며, 음양(陰陽)은 태극의 기본 현상이다.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은 우주만물을 음과 양의 변화로 설명하는 음양설과, 만물의 생성과 소멸을 설명하는 오행설을 통합한 이론이다. 음양설은 역(易)의 이론과 한자(漢字)를 완성했다는 동이(東夷)의 태호복희(太皞伏羲) 가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천지만물이 음과 양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원론(二元論) 사상이다. [참고: 청산거사. 국선도법] 예를 들어, 위-아래, 높고-낮음, 여자-남자 등과 같이 대립적이지만 서로 보완적으로 성립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오행설은 하(夏)나라의 성왕(聖王) 우(禹)가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오행설은 금(金), 수(水), 목(木), 화(火), 토(土)의 다섯 원소가 음양의 원리에 따라 행함으로써 우주의 만물이 생성하고 소멸하게 된다고 보는 이론이다.


단리(丹理)

단리(丹理)는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인간의 실천사상으로, 자연을 음양(陰陽)의 상관원리로 움직이는 대우주(大宇宙)로 이해하는 우주관(宇宙觀)을 가지며, 인간을 기(氣)와 혈(血)의 상관원리로 이루어지는 소우주(小宇宙)로 이해하는 인생관(人生觀)을 가진다. 자연계와 인간계의 생성변화는 음양오행(陰陽五行)의 법칙을 따르므로, 우주와 인간을 역리(易理)로 이해할 수 있으나, 우주와는 달리 인간만이 지니고 있는 정신작용은 정기신(精氣神)의 원리에 따르는 단리(丹理)로 이해한다. 따라서 우주의 음양 상관원리를 오행(五行)의 움직임으로 관찰하며, 인간의 기와 혈의 생성변화를 정기신(精氣神)의 원리로 관찰하며, 단전호흡의 수련을 통하여 인간이 자연과 하나로 조화를 이룬다는 가르침을 제시한다. [참고: 청산거사. 국선도법] 

선도(仙道)에서는 정기신(精氣神)을 사람이 가지는 삼보 (세가지 보물) 라고 칭한다. 정(精)은 생명체를 구성하는 근육, 빼 등의 물질로 초의 기름에 해당하며, 기(氣)는 공기(空氣), 원기(元氣), 진기(眞氣) 등 생명의 에너지로 초의 심지에 타오르는 화염에 해당한다. 한편 신(神)은 정신, 마음, 생각 등의 정신작용으로 초의 화광 또는 빛에 해당한다.

정기신(精氣神)의 원리는 삼단전(三丹田)의 작용으로 이어진다. 삼단전(三丹田)은 뇌(腦) 부분의 상단전(上丹田), 가슴(心) 부분의 중단전(中丹田), 배꼽 3치 아래 부분의 기해혈에 위치하는 하단전(下丹田)을 지칭하며, 하단전은 정(精), 상단전은 신(神), 중단전은 기(氣)의 중심점으로 본다. 또한, 정(精)의 기운은 신(神) 또는 기(氣)와 작용하여 정신(精神) 또는 정기(精氣)를 이루게 된다. 

단전은 도교에서 일컫는 빈 그릇과 같다. 즉, 도(道)는 무(無)에서 시작되며, 무(無)는 없는 것이 아니라, 빈 그릇과 같아서 무엇인가를 담을 수 있다는, 즉 우주 만물의 유(有)를 창조하는 한없이 큰 그릇을 의미한다. 우리의 몸의 기운의 중심을 이루는 단전의 그릇은 우주의 그릇과 하나로 조화를 이루게 한다. 단전은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기(氣)의 원천이며, 기(氣)를 기르고, 허(虛)함을 채우는 기(氣)의 그릇이다.


기(氣) 

동양 철학의 개념인 기(氣)는 천지 만물을 생성하는 원리이며 원천이 되는 기운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주 하늘에는 천기(天氣), 거대한 산에는 정기(精氣), 대기(大氣) 속에는 우리가 숨쉬며 들이마시는 공기(空氣), 그리고 우리 몸 속에는 타고난 원기(元氣)가 있다고 본다.


기(氣)와 혈(血)

기(氣)란 기운을 말하고, 혈(血)은 피이며, 기혈(氣血)은 기(氣)의 힘으로 혈관을 통해 움직이는 피(血)를 의미한다. 기혈(氣血)이 흐르는 통로를 경락(經絡) 이라 하며, 경락은 상하로 흐르는 통로인 경맥(經脈)과 좌우로 흐르는 통로 낙맥(絡脈)의 합성어이다. 기혈의 통로인 경맥에는 경혈(經穴)이라고 부르는 침(鍼)을 놓거나 뜸을 뜨는 350여개의 혈(穴)자리가 있다. 또한 맥(脈)은 피의 흐름을, 맥박(脈搏)은 심장의 박동을 지칭하며, 맥진(脈診)은 피의 흐름과 심장의 박동을 근거로 이루어진다.

경맥에는12경맥과 기경8맥(奇經八脈)이 있다. 12경맥에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5장6부 [오장(폐, 비, 심, 신, 간), 육부(대장, 위, 소장, 방광, 삼초, 담)]에 연결되는 11개의 경맥, 그리고 후천적으로 기운을 만드는 삼초(三焦) [상초(上焦, 폐, 심장), 중초(中焦, 위), 하초(下焦, 소장/대장)]를 중심으로 하는 1개의 경맥이 있다. 기경8맥은 인체의 중앙을 상하로 관통하는 독맥(督脈)과 임맥(任脈)을 비롯하여 고유한 경혈이 없이 12경맥의 경혈을 연결하는 6개의 맥 등 총 8개의 맥을 말한다. 한편 낙맥은 경맥에서 갈라져 나와 전신을 좌우로 그물처럼 얽는 기혈의 통로를 말한다. 


기(氣)와 에너지

기(氣)를 에너지로 보는 사람이 많이 있다.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기(氣)가 에너지이고 에너지가 기(氣)라고 말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함이 있는 것 같다. 즉, 기(氣)가 에너지라고 보기 보다는, 기(氣)가 움직일 때 생기는 기운이 에너지라고 보는 것이 기(氣)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호흡을 통하여 취하는 대기(大氣)속의 공기(空氣)가 우리의 몸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기운의 원천으로 본다면, 영혼속에 있는 영기(靈氣)는 우리의 정신과 마음을 움직이는 기운의 원천으로 볼 수 있다.


불교의 이해

불교는 석가모니 (기원전 560년, 본명 산스크리트어: 싯다르타 가우타마, 팔리어: 싯다타 고타마)가 35세에 보리수 아래에서 달마(達磨, dharma: 진리)를 깨침으로써 부처가 된 뒤, 제자 등 많은 사람들에게 행한 설법 내용을 기본으로 한다. 부처가 깨친 진리는 형이상학의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존재하는 구체적 양식, 즉 연기(緣起)로 설명되는 상호 의존관계 속에서 인연에 따른다는 원리이다. 부처(佛陀, Buddha)는 붓다, 불타, 불 등의 호칭으로도 사용되고 있으며, 산스크리트어로 '깨달은 자', '눈을 뜬 자'라는 뜻으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불교의 도래

불교는 372년 소수림왕 2 년에 고구려에 전파되었고, 이어서 384년에 백제에 전래되었다. 신라는 520년 법흥왕 7년에 불교를 공인하였다. 이후 불교는 통일 신라 시대와 고려 시대를 거쳐 조선 초기까지 발전한다.


불교의 이해

한국, 중국, 일본의 불교는 부처(佛, buddha) 중심인 대승불교(大乘佛敎, Mahayana Buddhism)이며, 남방 지방에서 발달한 소승불교(小乘佛敎, Hinayana Buddhism)는 부처의 가르침인 법(法, dharma, 달마, 達磨, 진리) 중심이다. 대승불교는 모든 사람이 깨우칠 수 있는 자비와 연민의 성품인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다는 보살사상 (菩薩思想)을 강조하며, 제2의 석가모니로 불리 우는 인도(印度)의 용수(龍樹, 나가르주나, Nagaryuna, 150-250)의 공(空)과 연기(緣起)에 기본 원리를 둔 중관사상(中觀思想, madhyamaka) 또는 중도사상(中道思想, madhamapratipad)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참고: 김승혜, 서정범, 길희성. 선불교와 그리스도교. 74-91. 207-210]


덕성(德性)

불교의 덕성(德性)은 불자의 실천 덕목(德目)으로 6가지 수행, 4가지 자세, 4가지 마음을 제시한다. 6가지 수행은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 등을 말하며, 보시는 자비심, 지계는 계율, 인욕은 참음, 정진은 부지런함, 선정은 고요한 마음, 지혜는 깨달음을 지칭한다. 4가지 자세는 자비를 베풀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말을 하며, 선행을 하고, 어려움을 함께 나눔을 포함한다. 4가지 마음은 즐거움을 주려는 마음, 고통을 없애 주려는 마음, 기쁨을 함께 기뻐하는 마음, 평등하게 보는 마음을 말한다.


자주 접하는 불교 용어

불성이란 부처의 본성이다. 이 불성은 본디 모든 중생에게 부여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불성 사상이다.

보리(菩提)는 팔리어(Pali)와 산스크리트어(Sanskrit)에서 수행자가 최종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참다운 지혜, 깨달음, 또는 앎의 경지를 일컫는 용어인 '보디(Bodhi)'의 한자어이다. 보리수(菩提樹)는 석가모니가 그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붙여진 성스러운 나무이다.

반야(般若)는 산스크리트어로 프라즈나(prajna)라고 하며, 인간이 생명의 진리를 깨달을 때 얻는 근원적인 지혜를 말한다. 특히 대승의 반야는 체험과 실천을 통하여 법(法, 진리)을 체득하는 자각에서 비롯되며, 이 반야의 자각을 통하여 인생의 의심이 해소되고, 인간과 만물의 진실을 터득할 수 있다.

열반(涅槃)은 번뇌가 소멸된 깨달음의 세계를 의미하며, 깨달음의 지혜인 보리(菩提)를 완성한 경지를 의미한다.

견성(見性)은 깨달음을 얻은 경지를 의미한다. 선종(禪宗)에서는 중생의 마음속에 부처가 될 수 있는 본성인 불성(佛性)이 숨어있다는, 즉 마음이 곧 부처라는 교리를 바탕으로, 복잡한 교리를 밟는 수행법 보다는, 선법(禪法)을 통하여 마음을 직관(直觀)하여 곧바로 불성을 발견하여 부처가 되는 견성성불(見性成佛)이 근본적인 과제이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은 염화시중의 미소와 함께 마음과 마음을 통한 지혜의 교류를 의미한다. 부처님이 영산(靈山)에서 대중에게 연꽃을 들어 보였을 때 제자 가섭이 그 뜻을 깨닫고 미소를 지어 부처님의 마음에 회답했다는 불교의 유명한 고사(故事)이다.

백팔번뇌(百八煩惱)는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번뇌를 108가지로 분류한 불교 교리이다. 백팔번뇌 산출법의 한 예로는 눈 귀 코 혀 피부 뜻의 육근(六根)과 육근의 대상인 색깔 소리 냄새 맛 감각 법(法)의 육진(六塵)이 서로 작용하여 일어나는 좋고, 나쁘고, 좋지도 싫지도 않은 세 가지 인식작용을 서로 곱하여 (6x6x3=108) 백팔번뇌가 이루어진다.


중도(中道) 사상

용수(龍樹)의 중관사상(中觀思想)으로도 알려져 있는 중도사상(中道思想)은 고행이나 낙행 어느 한쪽의 극단에 집착함이 없는 중도(中道)에 진실한 깨달음의 길이 있음을 강조하며, 팔정도(八正道)의 실천을 통하여 깨달음을 구하는 불교 교리이다. 팔정도는 공(空)과 연기(緣起)에 기본 원리를 둔 여덟 가지의 바른 길로, 불교의 실천 교리이며, 팔성도(八聖道)로 불리 우기도 한다. 여덟 가지의 길은 (1) 정견(正見) - 바르게 사물을 보고, (2) 정사(正思) - 바르게 생각하고, (3) 정어(正語) - 바르게 말하고, (4) 정업(正業) - 바르게 행동하고, (5) 정명(正命) - 바르게 생활하고, (6) 정정진(正精進) - 바르게 노력하고, (7) 정념(正念) - 바르게 마음을 챙기고, (8) 정정(正定) - 바르게 선정함을 포함한다. 


공(空) 사상

공(空) 사상은 대승 불교(大乘佛敎)의 기본 원리로서, 도교의 무(無) 사상과 일맥상통하는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우선 공(空) 사상(思想)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어의 한계를 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선가에서는 '물은 물이 아니다'라고 한다. 이 말의 뜻은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이 물은 방금 말했을 때의 물의 상태가 이미 아니라는 뜻이다. 즉 아무리 우리가 우리의 언어로 설명을 하려 해도 그 물의 순간 상태는 우리의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의 순간 상태를 구태여 말로 표현하자면 '이 물은 그 물이 아니다, 그러나 물은 물이다' 즉 일단 부정(否定)을 하고 다시 긍정을 할 때 그 의미에 접근할 수 있다는 원리이다. [참고: 김승혜, 서정범, 길희성. 선불교와 그리스도교. 175-177]

한편 야기 세이이지는 이러한 공(空)의 해석을 도교의 무의 개념을 이용한 해석으로 간주하고, 상호 의존에 따르는 열림의 개념을 이용한 불교적 해석 방법을 소개한다. 즉 벽 하나를 사이에 둔 두 방의 경우, 나눔의 벽이 양쪽 두 방에 100%씩 속하게 된다는 사실에 입각하여, 자연 속에서의 만물은 인간 모두에게 자신의 100% 구성 요소가 된다는 열림의 개념을 강조한다. [참고: 야기 세이이치.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잇다. 125-132.]  이 개념을 조금 더 확대해 본다면, 공(空)은 이 세상 모든 것을 포함하여 너와 나를 가르는 나눔이 없고, 테두리가 없는 완전한 열림, 즉 우주론 적인 원형 상태로 볼 수 있다.


연기(緣起) 사상

연기(緣起)는 인연생기(因緣生起)의 줄임 말로, 현상계의 모든 존재는 인(因)과 연(緣)의 인과법칙(因果法則)에 따라 생겨나고 소멸한다는 불교 교리로서, 인연(因緣)은 결과를 낳는 내적 또는 직접적인 원인 '인'(因)과 외적 또는 간접적인 원인 '연'(緣)을 뜻하며,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연으로 생겨나고 인연으로 소멸한다는 의미이다.

인과법칙(因果法則)에 따르는 인과응보(因果應報)는 전생에 지은 선악의 행위에 따라 현재의 행복과 불행이 결정되고, 현세에서의 선악의 행위에 따라 내세에서의 행복과 불행이 결정된다는 가르침으로, 업보사상과 윤회사상과 함께 한국인의 윤리의식과 내세관에 깊은 영향을 주고 있다.

업보(業報)는 행위 '업'(業, karma)에 따른 결과 '보'(報, vipāka)를 의미하며, 윤회(輪廻)는 열반에 이르지 못한 사람은 죽어도 그 업(業)에 따라 육도(六道)의 세상에서 생사를 거듭한다는 의미이다. 육도(六道)는 고통이 심한 지옥도(地獄道), 굶주림의 고통을 받는 아귀도(餓鬼道), 짐승의 고통을 받는 축생도(畜生道), 노여움이 가득 찬 아수라도(阿修羅道), 인간의 고통을 받는 인도(人道), 행복한 하늘 세계의 천도(天道) 이다.


내세관(來世觀)

불교의 내세관은 업보 사상(業報思想, karma)과 윤회설(輪廻說)에 기초하여 이루어진다. 업보(業報)는 인과응보(因果應報)를 의미하며, 현세의 삶은 전생(前生)에서 지은 업보(業報) 때문에 생긴 것이고, 현세의 삶은 다음 생애의 모습을 결정한다. 인간은 현세에서 업(業)을 짓는 한, 삶과 죽음이 반복되는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해탈(解脫)을 통해서만 이러한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올 수 있다.


참선(參禪)의 토착화 

참선(參禪)에서 '선'(禪)의 원형은 팔리어로 ‘쟈나(jha-na)’, 산스크리트어로 ‘디야나(dhya-na)’로서, 이것을 선나(禪那)로 음역한 것이다. 선은 고요한 마음 상태를 의미한다. 참선은 선종(禪宗)의 수행 법이다. 선종(禪宗)은 인도(印度)의 보리달마(菩提達摩, 4-5 세기)가 중국으로 건너와 전수한 교단이다. 선종(禪宗)은 달마(達磨), 혜가(慧可), 승찬(僧璨), 도신(道信), 홍인(弘忍), 혜능(慧能)의 6조(祖)로 이어지며, 이후 혜능을 중심으로 하는 남종(南宗)과 신수(神秀)를 중심으로 하는 북종(北宗)으로 나뉜다. 한국의 참선으로 알려진 화두(話頭)를 간(看)하는 간화선(看話禪)은 남종의 남돈선(南頓禪)에서 발전하여 대혜(大慧)에 이르러 크게 일어났으며, 고려의 지눌(知訥)이 대혜의 간화선을 받아들인다. 

달마를 비롯한 초기의 선종은 논리적 경향이 강했으나, 비논리적인 경향의 선(禪)으로 바뀌어,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의 명제를 중시하여, 단번에 깨닫는 돈오(頓悟)의 수행방식을 강조한다. 교종(敎宗)은 서서히 깨달어 감을 추구하는 점수(漸修)의 방식을 취한다. 이와 같이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의 가르침이 중국으로 전래되면서 중국의 전통 사상과 도교의 영향으로 참선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참고: 야기 세이이치.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잇다. 125-132.]  근래에 들어 이와 같은 형태를 토착화(inculturation)로 표현한다. 


간화선(看話禪)

간화선(看話禪)은 화두를 참구하는 선의 수행 방법으로, 우리 나라 불교 역사에 많은 영향을 끼친 수행 방법이다. 중국의 선종(禪宗)은 인도에서 온 달마(達磨) 조사로부터 시작되어 제6조 혜능(慧能)의 남종선(南宗禪)과 신수(神秀)의 북종선(北宗禪)으로 갈라진 뒤, 남종의 남돈선(南頓禪)이 크게 성하였다. 남돈선은 논리성보다는 직관적 사유를 통하여 깨달음을 얻는 수행법이며, 남돈선에서 파생한 간화선은 화두를 간(看)하는 수행법이다.


돈오점수(頓悟漸修)

선종에서 단박에 이치를 깨쳐서 부처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돈오(頓悟)라 한다. 그러나 이치는 단박에 깨칠 수 있다고 할지라도 그 동안 오랫동안 익혀 온 습관은 단박에 끊어 버릴 수 없다. 따라서 이치를 깨친 후 마치 습기를 제거하듯이 차츰차츰 단계를 밟아 올라가 나중에 크게 깨치는 수행 방식을 점수(漸修)라고 한다. [참고: 서산. 선가귀감. 34]


줄탁동시(啐啄同時)

참선(參禪)에서 수행자가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참구(參究: 참선하여 진리를 구함) 할 때 사용하는 주제를 화두(話頭) 또는 공안(公案) 이라고 한다. 줄탁동시(啐啄同時)는 선종의 선어록인 '벽암록'에 나오는 공안의 하나로, 선가에서 사제(師弟)간의 행동이 동시에 이루어질 때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을 표현한 말이다. 

줄탁동시(啐啄同時)의 '줄(啐)'은 암 닭이 알을 품고 있다가 달이 차서 알 속의 병아리가 안에서 껍질을 쪼는 것을 의미하며, '탁(啄)'은 그 반대로 어미 닭이 그 소리를 듣고 밖에서 마주 쪼아 껍질을 깨뜨려 주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 이러한 행위는 동시에 일어나야만 온전한 병아리가 될 수 있다는 말이며, 선가에서 스승이 제자를 지도하여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것에 비유하는 표현이다. 마치 어미 닭이 소중하게 알을 품듯이, 스승이 열심히 정진하는 제자를 끊임없이 보살피며 그 상태가 무르익었을 때 깨달음의 길로 이끌어 주는 것을 뜻한다.

병아리를 비유로 하는 이 줄탁동시는 우리의 일상 생활속에서도 이따금씩 일어난다. 예를 들어, 가끔 생각이 날락 말락 하는 일들이 있다. 그게 뭐였던가 하고 지난일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옆에서 누군가가 한 마디  해 줄 때 '탁'하고 생각이 나는 경험이다.
 

 

유교의 이해

중국 춘추 시대 말기에 공자(기원전 550년)가 체계화한 사상인 유교(儒敎)는 건실한 윤리성을 기반으로 인간의 외형적 관계를 설정하며, 인(仁)과 중용(中庸)의 덕(德)을 강조한다. 유교는 개인 과 사회의 윤리관을 제시하는 학문의 종교로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마땅히 행해야 하는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에 대한 지침을 덕목으로 제시한다. 예를 들어 '수신제가치국평천하' (修身齊家治國平天下) 사상은 개인의 수양과 사회 도덕의 실천 방향이다.


유교의 도래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한 시기는 기원전 3세기의 위만조선과 한사군 시대로 추정되며, 유교의 경학사상(經學思想)이 전래된 것은 삼국시대이며, 고려 말에 주희(朱熹)의 성리학(주자학)이 들어온 후, 조선시대에 정치이념으로 크게 발전한다.


유교의 이해

윤리적이며 학문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유교는 우리의 생활 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다. 자신을 닦는 일, 가정에서의 서열, 어른의 공경, 사회에서의 분별, 조상에 대한 경외 등 가정과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윤리관을 제시한다.

유교의 경전은 4서3경(四書三經)으로, 3경(三經)은 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 4서(四書)는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이며, 유교의 중심사상은 인본사상 (人本思想) 이다. 인본사상은 고대 동아시아 문명의 유산으로, 시(詩)나 서(書) 등의 경전에 수록되어 있으며 공자(孔子)와 맹자(孟子)에 의해 집대성되고 순자(荀子) 등에 의해 계승 발전된다. 


덕성(德性)

유교의 덕성(德性)은 인(仁)과 덕(德)의 품성을 갖춘 인간의 본성(本性), 도덕적(道德的) 의식, 또는 어질고 너그러운 성품을 지칭한다. 

인(仁)은 '어질다'라는 뜻으로 '얼이 짙다'에서 나온 말이며, 인(仁)의 한자는 사람을 뜻하는 '인(人)'과 둘을 뜻하는 '이(二)'의 두 글자가 모여서, 두 사람이 친하게 지낸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인(仁)은 유교의 인본사상의 핵심개념으로, 공자는 감정의 절제(節制)와 예(禮)의 갖춤이 인(仁)을 실현하는 길이라고 설명한다. 논어의 안연편(顔淵篇)에서 공자는 제자 안연(顔淵)에게 '극기복례(克己復禮)가 인을 행하는 것(爲仁)' 이라고 설명한다. 극기(克己)는 절제 (節制, self-control) 또는 자제의 뜻으로 지신을 다스리는 일이며, 복례(復禮)는 예(禮)를 갖추는 일이다. 따라서 극기복례(克己復禮)는 자신을 다스리고 예를 행하는 일이다.

덕(德)은 공정하고 포용성 있는 마음이나 품성(品性)의 뜻으로, 다양한 의미의 종합적인 개념으로 볼 수 있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으로 사덕(四德: 仁義禮智)을 제시한다. 사덕(四德)은 믿음(信)과 더불어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다섯가지 덕목으로 인간관계의 근본인 친의별서신 (親義別序信) 오륜(五倫)의 바탕이다. 


중용(中庸) 사상

중용사상은 모든 결정에서 항상 중간의 도(道)를 택하는 유교교리로서 형이상학적인 개념에서 출발하여 가치론 적인 수양방법의 내용을 담고 있는 유교의 인본사상의 핵심 개념이다.

중용(中庸)의 '중(中)'은 음(陰)과 양(陽) 양극(兩極)의 중앙점으로 공간적으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 없이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며, '용(庸)'은 시간적으로 언제나 변하지도 바뀌지 않는 안정된 상태이다. 따라서 중용의 실천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중덕(中德)과, 꾸준히 서로 떨어지지 않는 관계를 유지하는 용덕(庸德)을 갖추어야 한다. 


윤리관(倫理觀)

유교는 인(仁), 의(義), 예(禮), 지(知), 신(信), 덕(德), 충(忠), 서(恕), 효(孝), 제(弟), 경(敬) 등 많은 윤리적 덕목을 제시한다. 그 중에서 다른 사람 들과의 관계 속에서는 예(禮)를 중시하며 삼강오륜(三綱五倫)은 공맹(孔孟)의 교리에 입각한 유교의 기본적인 사회 윤리이다. 삼강은 임금과 신하(君爲臣綱), 어버이와 자식(父爲子綱), 남편과 아내(夫爲婦綱)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하며, 오륜은 부모는 자녀에게 인자하고 자녀는 부모에게 존경과 섬김을 다하며(父子有親), 임금과 신하의 도리는 의리에 있고(君臣有義), 남편과 아내는 분별 있게 각기 자기의 본분을 다하고(夫婦有別), 어른과 어린이 사이에는 차례와 질서가 있어야 하며(長幼有序), 친구 사이에는 신의를 지켜야 한다(朋友有信)'는 내용이다. 삼강오륜에 따른 도리는 어버이는 자식을 친애(親愛)로, 어머니는 자애(慈愛)로, 형은 아우에게 우애(友愛)로, 아우는 형에게 경애(敬愛)로 사랑을 실천한다. 


내세관(來世觀)

공자는 사후 세계에 대해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랴(未知生 焉知死)' 라고 제자 계로(季路)에게 설명한다. 즉, 죽음은 절실한 문제이나, 삶을 알아야 죽음을 알 수 있으며, 삶의 기본인 사랑과 존경, 인간의 본질인 인 (仁)을 강조한다. 따라서 유교에서는 윤리성과 도덕성을 기반으로 제사(祭祀)를 중요시한다. 제사는 조상에 대한 존경의 마음인 '효(孝)'의 표징일 뿐만 아니라 하늘에 관한 천 사상(天思想)까지 포함한다.

 

신유학(新儒學)

중국 송(宋)과 명(明)대 당시 유학자들은 현실 생활에 토대를 둔 유교사상이 불교의 공사상 이나 도교의 무사상 등에 비해 사상적으로 취약함을 인지하고, 당나라 시대까지 성행하던 훈고학(訓詁學)에서 벗어나 송(宋)대에 성리학(性理學), 명(明)대에 양명학(陽明學)의 새로운 사상체계를 정립한다.


훈고학(訓詁學)

훈고학(訓詁學)은 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의 경서를 존중하고, 경서의 음독과 훈고(訓詁: 단어의 의미)를 중시한 학문체계로 송(宋)나라 시대에 이르기까지 성행한다. 이러한 훈고학의 발전은 성인들의 말이나 경전을 학자들마다 다르게 해석하는 결과를 야기한다.


성리학(性理學)

성리학(性理學)은 중국 송(宋)대에 들어와 공자와 맹자의 유교사상을 주자(朱子, 12세기)로 불리우는 주희(朱熹)가 성리(性理)와 이기(理氣) 등의 형이상학 체계로 체계한 학문으로 주자학(朱子學), 이학(理學) 등의 명칭을 가진다. 성리학은 경서의 음독을 중시하는 종래의 훈고학과는 달리,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의4서(四書) 중심의 경학(經學)이며,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을 중시하고, 이(理)와 기(氣)를 이원화하여 불교의 마음(心)과 도교의 기(氣)를 이(理)를 통해 해석하며, 이(理)를 중심으로 하는 불교, 도교, 유교의 통합적 구도를 제시한다.


이기론(理氣論)

이기론(理氣論)은 우주의 생성과 변화를 이(理)와 기(氣)로 설명하는 성리학(性理學)의 이론으로 이학(理學), 기학(氣學) 또는 심학(心學)이라고도 한다. 우주는 형이상의 것인 이(理)와 형이하의 것인 기(氣)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기(理氣)의 결합에 의하여 만물이 생성된다고 한다. 성리학(性理學)에서 이(理)는 형이상적인 태극(太極) 또는 도(道)와 같은 추상적인 원리로 보며, 기(氣)는 형이하적(形而下的)인 음양5행 (陰陽五行)의 원리로 본다. 사람의 품성인 성(性)은 이(理)이고 사람의 본연의 것이며, 심(心)은 이(理)가 있는 곳이며, 형이하적(形而下的)인 음양의 작용으로 본다.


성정론(性情論)

성정론(性情論)은 인간의 마음을 성(性)과 정(情)으로 설명하는 성리학의 이론이며, 성선설과 성악설 등 학설의 형이상학적 근거를 마련한다. 성(性)이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본래의 선천적인 성향을 뜻하며, 정(情)은 마음속에 잠재해 있는 본성이 외부의 사건과 마주칠 때 일어나는 마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성선설(性善說)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의 고사(故事)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맹자의 교육 이야기이다. 맹자(孟子, 기원전 4세기)는 인간의 본성으로 사덕(四德: 仁義禮智)을 제시한다. 사덕(四德) 중 중심 덕목인 인(仁)은 어질다는 뜻으로, 공자가 선(善)의 근원이자 행(行)의 기본이라고 강조한 유교의 핵심 개념이다. 맹자는 인간의 마음에는 인(仁), 의(義), 예(禮), 지(智) 등 사덕(四德)을 제시하며, 인간의 본성이 선(善)하다는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한다. 또한 맹자는 사덕(四德)에 따르는 네가지 마음을 제시한다. 즉, 인(仁)은 측은지심 (惻隱之心) ['측은한 마음' 또는 '남의 어려운 처지를 그냥 보아 넘길 수 없는 마음']이며, 의(義)는 수오지심 (羞惡之心) [불의에 부끄러워하는 마음], 예(禮)는 사양지심 (辭讓之心) [양보하는 마음], 지(智)는 시비지심 (是非之心)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 이다. 이에 대한 예로 맹자는 다음과 같은 경우를 설명한다. 사람들이 길을 가다가 어느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보게 된다면 누구든지 다 아이를 구하려고 할 것이다. 이는 인간의 기본 마음에 측은지심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성정론(性情論)은 인의예지(仁義禮智) 사덕(四德)을 성(性)의 덕목으로, 측은, 수오, 사양, 시비의 사단(四端)을 사덕(四德)에서 나온 정(情)의 덕목(德目)으로 이해한다. 즉, 성정론(性情論)으로 볼 때 맹자의 성선(性善)은,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보았을 때 선(善)한 측은지심의 정(情)이 마음에서 일어난 것은 인간 본래의 성(性)이 선(善)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성악설(性惡說)

순자(荀子, 기원전 3세기)는 공자의 사상 중 예(禮)를 강조하였고, 사람의 본성은 착하다는 맹자의 성선설에 반하여, 인간의 본성은 악하여, 이기적이고 서로 질투하며 미워하고 싸우기 때문에 예의를 배우고 정신을 수련하여 선하게 변화시켜야 한다는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한다.

맹자가 말하는 인성(人性)은 사람의 마음을 의미하고 순자가 말하는 인성은 사람의 욕망을 의미한다. 순자는 인간의 인성이 비록 악하지만, 후천적 노력에 의해 선하게 변화시킬 수가 있다는 '인위(人爲)'의 개념을 강조한다. 인위는 인간의 능동적인 행위이며, 선천적 본성을 후천적으로 개조할 수 있는 능력으로, 악한 본성을 완전히 선하게 바꿀 수 있다면 모두가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양명학(陽明學)

양명학(陽明學)은 중국 명나라의 왕양명(王陽明)으로 알려진 왕수인(王守仁, 15세기)이 정립한 학문으로, 군주들의 왕권 강화에 이용되는 주자학에서 사라져가는 도덕윤리를 되살리기 위해 윤리학의 방법론에 중점을 두는 실천철학으로 볼 수 있다.

양명학의 기본 주장은 심즉리(心卽理), 치양지(致良知), 지행합일(知行合一)로 집약된다. 심즉리(心卽理)는 마음(心)이 곧 우주만물의 근본원리임을 뜻하며, 이(理)와 기(氣)를 일원화합니다 [이즉기(理卽氣)]. 이에 반해 성리학의 핵심 명제인 성즉리(性卽理)는 인간 본래의 성향이 우주의 원리임을 뜻하며, 이(理)와 기(氣)를 이원화한다.

치양지(致良知)는 맹자의 성선설의 실천 과제로 선(善)을 행하고 도덕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양지(良知)를 따르고 키워야 한다는 뜻이다. 양지(良知)란 배우지 않고 생각하지 않아도 선천적으로 아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어린 아이가 자기 부모를 사랑할 줄 알고, 커지면 형을 공경한다는 맹자의 가르침에서 유래한 말이다.

지행합일(知行合一)은 앎과 행동이 일치해야 한다는 뜻으로 실천을 강조하는 말이다.
 

 

기독교의 이해

기독교는 예수를 그리스도 구세주(救世主)로 받아들이는 종교이다. 세계 기독교 역사를 볼 때, 초세기 기독교는 313년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할 때까지 10여 차례에 걸쳐 박해를 겪었다. 이러한 박해 속에서도 꾸준히 성장한 기독교는 사도 바오로를 통해 예시된 바와 같이 유다인의 종교에서 세계적 종교로 변모한다. [참고: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3장 7-9] 

유다교는 유다인들의 민족 종교 또는 지리적으로 제한된 범위 안에서 유지되는 지역 종교로 볼 수 있다. 제한적인 여건 속에서 시작된 기독교는 지중해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지역으로 전파되면서 당시 중심 문화였던 헬레니즘 문화와 철학을 만나 보다 복잡한 사상체계를 갖춘 종교로 전개된다.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가 만나 아기가 탄생하듯이, 역사가들은 하나의 문화가 다른 종류의 문화와 만날 때 새로운 문화가 탄생될 수 있다고 말한다. 신학자 윌리암 죤스톤(William Johnston)은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셈족의(Semitic) 종교 문화가 그리스 중심의 헬레니즘의 철학과 신비 문화와 만나는 것을 '중대한 만남 (momentous meeting)' 이라고 표현한다. 


기독교의 도래

유교적 전통 사회인 조선 시대에 18세기 후반 마테오 리치(Mateo Ricci, 利瑪竇, 1552~1610년)의 천주실의(天主實義)가 전해지면서 이벽, 이승훈, 정약용, 권일신, 김범우 등과 같은 실학자들 사이에 서학 (西學)이라는 학문으로, 천주교에 대한 연구가 시작된다. 이벽의 요청으로, 1784년 이승훈은 북경 북천주당에서 그라몽(Jean de Grammont, 梁棟材)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고 십자고상, 교리서, 묵주 등의 성물들과 천주교회 문서들을 조선으로 가지고 돌아온다. 그는 이벽, 정약전, 정약용 등에게 대세(代洗)를 하였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초기 천주교회가 시작된다. 이와 같이 기독교의 한국 천주교회는 스스로의 힘으로 외부 선교 활동 없이 자치 교회를 세우면서 시작된다. [참고: 한국 천주교주교회의. 한국 천주교회사]

1784년 교회가 세워진 지 10년 뒤에는 대략 4,000명의 신자가, 1800년에는 대략 1만여 명의 신자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대부분 정치적 특권이 없고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이었으며, 많은 여성이 포함되어 있었다. 교회가 비약적으로 발전하자 조선은 천주교인들이 조상에 대한 제사 의식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박해(迫害)를 단행한다. 신해박해(1791), 신유박해(1801), 기해박해(1839), 병오박해(1846), 병인박해(1866) 등 100여 년 동안 이어진 박해 과정에서 많은 순교자들이 있었으며, 그들 중 103위는 1984년에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박해 이후, 19세기 말에는 선교사들에 의해 개신교가 들어오기 시작한다.


기독교의 이해

기독교는 예수님의 부활을 중심 신앙으로 하는 계시 종교이다. 계시(啓示)는 '나타남' 또는 '드러남'을 의미하며, 신(神)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수동적인 행위로서, 그리스어로는 아포칼립시스(apocalypse), 영어로는 레버레이션(revelation) 또는 애퍼리션(apparition) 이라고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기 전에 예언하신 대로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시어 제자들에게 당신의 모습을 나타내신 예수님의 부활은 인간의 죽음을 이기는 역사적인 사건으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여 그리스도안에서 거듭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믿음의 길이다.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상의 죽음을 뒤 돌아보게 한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없이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한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은 고통과 속박 속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절실하게 갈구하는 구원과 해방의 메시아 사상과도 일치한다. 알파요 오메가인 (요한 묵시록 1:8)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죽음은 육의 삶의 끝 이자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다. 부활로 거듭난 그리스도의 수난은 우리를 인간의 굴레를 넘어 하늘나라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한다. 삶 속에서 생기는 마음의 갈등은 우리가 삶 속에서 겪는 우리의 수난이다. 수난의 어려움 속에서 수난과 싸워 이기며, 복음에서 보이듯이 사랑의 실천으로 마음의 평화를 구할 때, 우리는 부활을 사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4복음서와 사도행전 (마태 28,16-20; 마르 16,14-18; 루카 24,36-49, 요한 19-23, 사도 1,6-8)에서 전하고 있다. 요한 사가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사흘만에 부활하시어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 나타나신 후,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요한 20:19, 21) 하고 말씀하시고,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요한 20,22-23) 하고 말씀하신다.


덕성(德性)

기독교의 덕성(德性)은 대신덕(對神德) 3가지와 대인덕(對人德) 4가지를 합하여 7가지의 덕목을 포함한다. 대신덕 (對神德)은 향주덕(向主德)이라고도 하며 '믿음, 희망, 사랑' 또는 '신덕, 망덕, 애덕'의 세 가지이며,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요구와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직접적 관계를 나타내는 기본 덕이다. 대인덕(對人德)은 사추덕(四樞德) 이라고도 하며 '현명, 정의, 용기, 절제'의 네 가지이며, 인간이 하느님의 뜻에 맞는 생활을 하며 인간 상호 간의 관계에서 지성과 양심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는 덕이다. [참고: 가톨릭 교회 교리서. 1834항] 대신덕과 대인덕의 7가지 덕목을 영어로는 Christian Virtues이라고 하며, Theological Virtues의 Faith, Hope, Love세 가지와 Human Virtues의 Prudence, Fortitude, Justice, Temperance 네 가지이다. 이러한 7가지 덕목(德目)은 '믿음, 희망, 사랑, 현명, 정의, 용기, 절제'이며, 성령칠은 (聖靈七恩: 배려, 지식, 지혜, 치료, 용기, 신심, 경외심)과도 연결된다.

꽃을 가꿀 때 물을 주듯이, 덕성을 가꾸기 위해서는 마음을 다스리는 수련이 필요하다. 마음 다스리기는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한다. 성령의 선물인 은사와는 달리, 성령의 열매는 본인의 노력이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그 열매를 맺게 된다. 마음 다스리기 수련은 칠 덕목, 특히 대인덕의 절제(self-control)의 덕목이 인간관계 및 가족관계를 평안하게 할 수 있는 열매를 맺게 하는 덕(德)을 갖추게 도와준다. 이와 같은 절제의 덕목은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5장 22-23절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이다.')에서 제시하는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 중의 하나이다. 성령의 열매는 성령의 은사와는 달리 본인의 부단한 노력으로 얻어진다.


영성(靈性)

가톨릭 사전에서는 영성을 본질적으로 순수한 비물질성(非物質性)이며 정신적인 속성, 일반적으로 신령스럽게 총명한 품성(品性)이나 성질로서, 성령의 도움으로 형성되며, 하느님과 자신, 이웃, 그리고 세상에 대한 초월적 사랑으로 형상화된다고 설명한다. [참고: 가톨릭대사전. 영성]

스페인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1491~1556)의 이냐시오 영성은 당시 르네상스 사조에 영향을 받아 자신의 주관적인 영적체험을 바탕으로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여 살아가는 지혜로서, 인간이 가르쳐주는 지혜가 아닌 성령께서 가르쳐주는 말씀으로 살아가는 삶, 즉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의 지혜라고 설명한다.

요한 복음서 4장 24절은 '하느님은 영이시다.'라고 밝힌다. 요한 복음서 15장 26절은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 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라고 밝힌다. 따라서 성령은 영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보호자이며 '진리의 영' 이다. 또한 사도 바올은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8장 9-10에서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사시기만 하면, 여러분은 육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게 된다. ~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 성령께서 여러분의 생명이 되어 준다.'라고 선포한다. 따라서 영성은 우리의 마음 속에 살아 역사(役事)하시는 하느님의 성품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요한 복음서 6장 63절은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라고 밝힌다. 즉 영성은 우리의 마음 속에 역사 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이며, 영원한 생명이다. 


성령강림(聖靈降臨)

기독교는 신비로 이루어진 종교라고 할 만큼 예수님의 부활, 성령 강림, 삼위일체 등 많은 신비를 지니고 있다. 중동 지역에서 발전해온 이러한 신비 개념이 우리에게는 낯선 개념이었지만 불과 백 여년 사이에 우리의 전통 사회에 기반을 쌓은 것 역시 신비 아닌가 싶다.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의 마음 속으로 들어오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사도들 조차도, 유다인들의 오순절(五旬節) 축제 때 성령의 은사가 있기까지 그러하였다. 이에 대한 내용을 사도 행전(사도 2장:1-4)이 전하고 있다. '오순절이 되었을 때 그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진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굳건 해지고 용감 해져 스스로 복음을 살고 선포하면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그리스도 교회가 탄생하게 하였다. 오순절(Pentecost) 날의 이 신비를 기독교에서는 성령 강림일로 기념하고 있다.


사랑의 계명

한국인에게 사랑의 상징은 희생과 봉사로 엮어진 어머니의 끝없는 사랑일 것이다. 이러한 마음의 사랑이 기독교의 중심사상의 하나이다. 기독교 사랑의 정신은 마태오 복음서와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에서 잘 알 수 있다. 마태오 복음서 22장 37-40절: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또한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 13장 13절: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된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이다.'

영혼을 움직이는 사랑의 정신은 생명의 양식으로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한다. 사랑의 정신은 평소 행할 수 없었던 일들도 가능케 한다. 가슴 속에 한(恨)이 되어 얼어붙어 있는 빙점(氷點)들도 녹여내어, 우리가 영혼의 세계를 직접 체험하게 한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의 가르침 중 가장 어려운 실천 중의 하나가 용서이다.

용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에 포함되어 있다. 7종류의 희망으로 되어 있는 주님의 기도의 첫 3종류는 하느님의 영광에 관한 것이고, 뒤의 4종류는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는 내용이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 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는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웃을 용서할 수 있게 해 달라는 5번째의 청원 기도이다.

마태오 복음서 18장 21-22 (루카 17,3-4)에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용서에 대해서 설명한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 라도 용서해야 한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가장 어려운 게 용서라는 것을 경험한다. 입에서는 용서를 외쳐도 마음이 따를지 않는 경우가 있고, 마음으로는 용서를 한다고 해도 입으로는 나오지 않는 경우가 있고, 마음과 입으로 용서한다고 해도 실제 행위로 따르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와 같이 행하기 어려운 용서는 성령의 도움이 필요하며, 이를 행하는 사람이 진실한 기독교인이다.

진정 기독교의 하느님은 용서의 하느님이다.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주님의 기도에서도 용서를 강조한다. 또한 마태오 복음서 6장 14-15절: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용서는 회개와 함께 한다. 루카 복음서 17장 3-4절: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한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하늘나라는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주여지는 선물이다. 마태오 복음서 4장 17절에서 예수님께서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라고 선포한다. 또한 루카 복음서 15장 7절: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 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마태오 복음서 18장 12절: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러나 주의해야할 점도 있다. 예수님은 루카 복음 13장 25-27절에서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이라야 들어간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 라고 경고하신다. 이는 용서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해야 한다는 뜻이다. 


마음의 어려움

삶에는 걱정과 어려움이 따르게 된다. 쓸데없는 걱정도 있기는 있지만, 크고 작은 걱정과 어려움은 누구나 가지는 게 현실이다. 어려움은 짐과 같아서 나눌 때 가벼워진다. 혼자 짊어지면 무겁고, 우리의 마음을 지치게 한다.

너무 힘들고 몸과 마음이 지쳐 주저 앉고 싶을 때, 마태복음 11: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의 말씀은 힘과 희망을 준다.


마음의 소리

우리의 삶은 소리와 함께한다. 우리가 여러가지 소음공해속에서 시달리기는 하지만, 모든 소리가 우리를 어렵게 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음악소리, 바다가 들려주는 파도소리,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 호흡하는 숨소리 등의 많은 소리들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도와준다.

그런가 하면 때때로 부르짖고 싶은 마음의 소리도 있다. 마음의 소리는 잔잔한 호수처럼 고요할 수도 있고, 거센 파도와 같이 걷잡을 수 없이 밀려들어올 수도 있다. 거센 파도 소리는 우리의 마음을 송두리채 빼앗아 가기도 하지만, 거센 파도 소리에 '스르르' 잠이 드는 섬집 아기를 그려볼 때, 거센 파도 소리는 우리의 온갖 고뇌를 말끔히 씻어가는 생명의 소리로 바뀌어 지기도 한다. 

이러한 생명의 소리는 하느님의 부름으로 이어진다. 예수님은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후 하느님의 음성 (마르 1:9-11, 루카 3:21-22)을 들었고, 사도 바울은 기독교인들을 잡으러 길을 떠나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라고 하는 주님의 음성 (사도 9:4)을 듣는다.


두 얼굴

밤이 저물면 아침이 밝아 오듯이, 한 해가 저물면 새해가 밝아 온다. 새해의 첫 달은 영어로 January이며, 이 단어는 두 얼굴을 지닌 그리스의 야누스신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즉 한 얼굴은 지난해를 다른 얼굴은 새해를 지칭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육체적으로 한 얼굴을 지니고 살아가지만, 우리의 마음 깊은 속에는 선과 악의 두 얼굴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악이 없는 절대선이 하느님의 세계를 의미한다면, 악을 물리치고 선을 추구해야 하는 삶이 우리의 세계이다.

살면서 상처를 주지도 받지도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상처로 얼룩진 악을 물리치고 용서와 화해의 선을 추구하는 일이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과제이다. 용서는 성령의 도움이 요구되는 어려운 과제이다. 선과 악이 공존하는 마음의 세계에서 맺혀 있는 마음을 풀고 용서하는 마음을 찾을 때 그 보상은 매우 크다.


마귀 사탄의 잠입(潛入)

우리말에 '마귀에 들렸다' '마귀에 씌었다' 라는 말이 있다. 이 세상에 마귀가 실제로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의 마음에 마귀가 끼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귀에 대하여 마귀의 모습은 육체가 없는 타락한 천사의 모습이라고 한다. 이러한 마귀의 모습은 변화무쌍하여 자신의 모습을 욕심의 씨로 변화시켜 쉽사리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기도 한다. 이러한 마귀는 우리의 주변을 맴 돌면서 우리의 마음속으로 들어갈 기회를 노린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마귀의 유혹도 있고, 천사의 배려도 있다. 우리가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고 잘못을 뉘우칠 때 우리는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 개과천선 (改過遷善)은 이러한 마음의 변화를 설명해 주는 고사성어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어린아이의 마음은 순수하고 깨끗하다. (어린이들을 사랑하시다: 마태 19:13-15, 마르 10:13-16, 루카 18:15-17) 사람이 성장해 가면서 이렇게 깨끗했던 마음 속으로 마귀의 유혹이 들어오게 된다. 마음 안으로 들어온 마귀는 마음속에 집을 짓고 우리의 마음을 거느리려고 한다.

성경에서는 마귀 들린 사람에게서 마귀를 쫓아내는 권능에 대해서 여러차례 언급한다: 아이에게서 마귀를 내쫓으시다 (마태17:14-21, 마르 9:14-29, 루카 9:37-43) 마귀들과 돼지 떼 (마태 8:28-34, 루카 8:26-39, 마르 5:1-20) 예수님과 베엘제불 (마태 12:22-32, 마르 3:20-30, 루카 11:14-23, 12:10), 바오로의 ~ 병자들에게 대기만 해도, 그들에게서 질병이 사라지고 악령들이 물러갔다 (사도 19, 12).


마귀 사탄의 유혹

살면서 어려운 질문중의 하나가 '왜 사느냐?'는 질문 같다. 열심으로 하는 일은 잘 안 풀리고 날씨는 구물거리고 구성진 노랫가락이 머리 주위를 감싸면 마음이 우울해지기 마련이다. 이렇게 마음이 힘들 때 던져지는 이러한 질문은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질문으로 바뀔 수도 있다. 

예수님도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광야에서 40일을 단식하시고 인간의 한계를 느끼실 때 마귀 사탄으로부터 세가지 유혹을 받으신다. 이러한 유혹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사탄아, 물러가라'로 기록되어 있다. (마태 4:10)

인류의 시작은 사탄인 뱀의 유혹에서 시작된다. 이러한 유혹은 늘 우리의 생활 속에 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문제'는 이러한 유혹에 대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는 지혜이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마태 22,15-22; 마르 12,13-17; 루카 20,20-26)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질문의 답은 수학 문제의 답과는 다르다. 마귀 사탄의 질문을 단호히 물리치고, 주어진 하루 하루를 감사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게 답이다.


수호천사

살면서 뒤를 돌아볼 때 아찔했던 순간들이 있다. 어떤 경우는 어떻게 내가 사고없이 그 상황에서 무사히 빠져나왔는지 믿어지지 않는 순간들도 있다. 천만다행의 순간 우리는 안도의 긴 한숨을 쉬면서, 보호의 손길을 베푸신 수호천사에게 감사의 인사가 절로 나온다. 그리고는 바쁜 다음길을 계속 간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그 감사의 기억이 점차 사라지게 된다. 

주위에 어려움을 겪는 이를 내일처럼 도와주고 기뻐한다. 감사하는 사람에게 더 주고 싶은 게 우리의 마음이다. 그러다가 그 사람이 나에게서 도움 받은 기억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꺼꾸로 달려드는 경우도 경험한다. 어쩌면 사람이 저럴 수가 있나 싶고, 분하고 억울한 심정이다. 내가 받은 감사는 시간이 가면서 잊어버리고, 보상 없이 내가 베푼 도움에 대한 실망은 시간이 지나도 기억에서 사라지지를 않는다. 예수님은 끊임없이 감사의 기도를 하느님께 드린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실 때도 (요한 6:11), 죽은 나사로를 살릴 때도 (요한 11:41)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리신다. 또한 사도 바울은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데살로니가 전서 5:18) 라고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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