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하고 순한 아들이 부탁이 있단다. 태생이 성실하고 예의 바르며 착한 아이. 마음이 습자지같이 약해서 울기도 많이 울고, 예민하기가 그지없던 아이. 부탁하기를 너무 어려워하고,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아복장 터지게 하던 아이. 세 살 터울의 여동생에게 늘 당하던 아이. 그래서 나는 아들이 부탁하는 말은 웬만하면 들어주자는 생각이다. 그런 아이가 어쩐 일로 부탁을 했다.
"현석아, 무슨 부탁인데?"
"사실은요, 엄마. 음…. 음…."
말문을 못 여는 아이를 보니, 처음 마음과 달리 답답함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현석아, 무슨 일인지 얼른 얘기해 봐, 엄마 지금 좀 바빠. 이것들 보이지? 좀 빨리 얘기해줄래?"
나는 고상한 엄마니까 톤 조절에 신경 쓰며 재촉하지 않는 척아이에게 재촉했다.
"엄마, 저 역사 교과서를 새로 사야 할 것 같아요. 어…. 지민이 빌려줬는데 저한테 줬다는데, 어…. 저는 안 받았는데 줬대요."
"뭐라고? 그게 말이 돼? 너는 안 받았는데 걔는 줬다니, 말이 안 되잖아? 다시 한번 정확히 얘기해 봐!"
"어, 지민이가 교과서를 안 가져왔대서 빌려줬는데, 돌려받았거든요. 그리고서 동근이가 안 가져왔다고 빌려달래서 또 빌려주고…. 다음날 지민이가 다시 빌려달래서 빌려줬는데, 내가 오늘 쓰려고 보니 없어서…. 어, 지민이한테 물어봤더니 나한테 줬대요. 그래서 동근 이한테 물어봤더니 줬다고 해서…. 음, 아무리 찾아도 안 보여요."
"야! 교과서를 빌려줬으면 제대로 받아야지! 학생이 교과서도 제대로 관리를 못하면 어떡해? 어이구 답답해서…."
나도 모르게 욱해버렸다. 세상에서 제일 바보 같은 일을 또 저질렀다. 욱하지 않는 엄마가 되는 게 목표인데, 오늘도버럭 큰소리를 냈다. 움찔하는 아이. 아차 싶은 나.
내가 학교에 가서 뒤져볼 수도 없고, 줬다는 아이한테 뭐라 할 말도 없고, 내 아이의 부주의함과 어리숙함을 탓할 수밖에. ‘얜 대체 왜 이리 어리바리한 거야? 아, 속 터져, 정말.’ 속으로 생각하며 감정을 삭였다.
"현석아, 너의 부주의로 학생에게 가장 중요한 교과서를 잃어버렸으니 네가 검색하고 알아봐. 찾아보고 얘기해, 알겠지?"
"알았어요, 엄마. 미안해요."
아이는 대형서점 사이트도 뒤져보고 출판사 홈페이지도 찾아보았다. 그런데 학기 말이라 그런지 교과서를 판매하는 곳이 없다. 시험이 코앞인데 큰일 났다. 생각 끝에, 제본을 하기로 했다. 집 근처에 방통대가 있으니 쉽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교과서를 제본해준다는 곳이 없다. 예상 밖으로 사태가 심각해지고 아이는 더 속상해했다. 그러다 제본업체 한 곳을 찾았다. 부탁하고 부탁했더니 해주신단다. 빌려온 교과서를 한 장씩 복사해야 해서 시간과 돈이 많이 들 거란다. 그래도 교과서니, 알았다고 부탁하고 왔다. 저녁에 찾으러 갔더니 삼만 원을 달란다. 아이 교과서 흑백 복사가 무슨 삼만 원이냐고,너무 비싸니 깎아달라 애원해도 한 치의 물러섬이 없는 사장님. 엄마는 늘 을이고 약자이다. 울며 겨자 먹기가 이런 거지. 삼만 원을 내고 제본 책을 들고 왔다.
"현석아. 이거 얼마 게?"
"아. 잘 모르겠는데요. 얼마예요?"
"삼만 원이래. 삼만 원. 앞으로 더 조심하고! 교과서는 빌려주지 말고, 좀!"
"아, 엄마. 근데 친구가 안 가져와서 빌려달라는 걸 안 빌려주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어? 하긴 그렇기도 하네. 엄마 욕심으로는 안 빌려주면 좋겠지만, 그러면 치사한 사람 될 수도 있으니, 빌려주게 되면 반드시 받았는지 확인할 거지?"
"네, 엄마. 앞으로 더 주의할게요. 정말 미안하고 고마워요."
아들의 확답을 받으며, 아쉬움이 남았다. 내가 이 순간을 어떻게 이끌었으면 좋았을까 생각해보았다. 아이한테 욱하지 않고 어떻게 대화하고 교과서를 다시 마련해주었으면 좋았을까. 엄마 경력 15년이 넘어도 육아는 늘 어렵다. 오늘도 실수하고 후회하며 배웠다.
비싼 역사책을 바라보다 버츄프로젝트의 2 전략인 ‘배움의 순간을 인식하라.’가 떠올랐다. 인생의 모든
순간마다 배울 점을 찾으라는 말이다. 인생의 고비마다 만나는 실패와 좌절에 그냥 주저앉지 않고, 배울 점을 찾고 다시 일어난 사람들은 ‘회복 탄력성’이 높아 긍정적이고 행복한 인생을 산다고 한다. 성공에도 과하게 기뻐하거나, 실패에도 과하게 좌절 않는 사람들. 성공과 실패 모두 인생의 과정으로 여기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는 사람들. 그런 사람이 되려면, 어릴 때부터 무의식에 저장되어있는 암묵 기억이 긍정적이어야 한다. 이번엔 실수했지만너무 상심하지 않고, '나는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다시 도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가 실수하거나 실패했을 때, 엄마들이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암묵 기억을 바꿔주어야 한다. 공부했다는 나도 아차! 하는 순간이 많다. 쉽지 않으니 계속 연습, 또 연습하며 배우는 중이다.
이번 비싼 교과서 복사 사건도 나와 아이에게 배움의 순간이 되었다. 아이에게는 물건을 관리하는 요령. 예를 들면, 물건을 빌려주고 돌려받을 때 어떻게 할지 생각했을게다. 나는 화내지 않고, 침착하게 대화를 유지하며 어떻게 나의 진심을 전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아이가 커가며 걱정거리도 변한다. 엄마도 늘 새로운 상황을 만나야 한다. 그때, 당황하지 않고, 욱하지 않고 아이와 대화하기. 쉽지 않은 미션을 받았으니 미덕으로 무장하고 겸손하게 배워야겠지. 오늘도 배움의 순간을 인식하며, 하루만큼 성장하는 엄마가 된다.
버츄(virtues)란 힘, 능력, 위력을 상징하는 라틴어 virtus (비르투스)에서 유래합니다. '버츄'란 인성(人性)이라는 마음 광산에 자고 있는 아름다운 원석들이랍니다. 그 원석들을 일상에서 잘 연마하면 반짝이는 보석이 되게 할 수 있다는 믿음이 버츄 프로젝트의 핵심이에요. 모든 존재를 미덕의 눈으로 바라보기! 존재 자체를 사랑으로 믿어주기! 버츄 프로젝트는 한 아이의 잠재성을 빛나게 할 최고의 방법입니다!
오늘의 미덕
- 책임감 : 책임감은 맡은 일을 훌륭하게 해냄으로써 다른 이들이 당신을 신뢰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집니다.
- 관용 : 관용은 자신의 기대에 어긋나는 일이 일어나도 그를 인내심과 유연성의 미덕을 통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