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로북극성 Jan 31. 2022

영어강사의 영어 유감

뉴욕, 어디까지 가봤니?



초등학교 3학년 때. ‘너희는 영어를 잘해야 한다’며 아빠가 들고 오신 커다란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와 어학용 테이프. 먹을게 아니라 실망하는 우리 남매에게 아빠는 당부하셨다.



“얘들아, 아빠는 영어 공부도 못하고 컸지만, 이제 세상은 영어를 잘해야 먹고살기 좋아. 삼촌 봐라, 아빠가 월급 쪼개고 쪼개서 월부로 테이프 사다 주고 공부시켰더니 회사 취직해서 미국 출장도 갔다 오잖아. 이거 열심히 듣고 따라서 말해, 알았지? 아빠랑 약속!”



우리 남매에게 그 물건들은 학습용이 아니라 장난감이었다. 카세트 플레이어라는 총에 테이프라는 총알을 넣으면 소리가 나오는! 총알이 발사되는 게 아니라 소리로 발사되는 총! 플레이했다 일시 정지해봤다가, 앞으로 돌렸다 뒤로 돌렸다, 우리는 그 물건을 가지고 놀았다. 조그만 버튼을 누를 뿐인데 내 맘대로 움직여 주는 신기한 기계. 그다 엄마의 잔소리도 듣곤 했다.


"이놈들! 아빠가 사다 주신 비싼 물건, 망가트릴 거야? 그게 장난감이야?"


장난감보다 신기한 기계에서 나오는 소리는 신세계였다. 꼬부랑이라는 말과 쏼라라는 말이 찰떡처럼 들어맞았다. 동생이랑 얘기하곤 했다.


"와! 어떻게 말이 이렇게 굴러다녀?"

"그러니까! 공이 굴러가는 것 같아!"


 그 테이프에서 아직도 잊을 수 없는 말은 ‘미역’이다.

‘미어얼읔’, ‘미얼ㅋ’


 영어책에 미역이 나오지?


책을 찾아보니 그 단어는 milk였다.


밀크?

우유는 밀크 아냐?

왜 미역이라고 그래?


미얼크. 미얼.

밀큰데 이상하게 발음하는 사람들.

내가 아는 것과 다른 소리의 단어들을 만났던 충격은 아직도 남아있다.


© shootdelicious, 출처 Unsplash




영어를 잘해야 한다는 세뇌를 어려서부터 들은 탓일까? 나는 영어가 재미있었다. 수학을 공부해야 할 때도 영어 단어를 외웠고, 사전을 뒤적이며 형광펜으로 아는 단어에 색칠하는 묘미도 끝내줬다. 아주 잘하지는 못했지만, 영어는 내 평생 숙제라는 느낌이 내 머리 어딘가에 박혀 있었다. 대학생이 돼서는 회화학원도 다니고, 리스팅 반도 수강하며 영어를 놓지 않고 지냈다. 원서로 책을 사는 허영도 부려보았다. 서너 장 넘기 말아도 책장에 놓여있는 원서는 폼나니까. 들고만 다녀도 있어 보이니까.




대기업과 IT업체에서의 사무직은 체질에 맞지 않아 유학을 결심했다. 회사에 다니 주말 8시간과 평일 밤 4시간 동안 진행되는 영어교사 자격증 과정을 수강하며 미래를 준비했다. 미국 대학원에 진학하려면 토플 점수가 필요했고, 퇴사 후 석 달간 죽어라고 공부해서 필요한 점수를 받았다. 아빠 말대로 어려서부터 조금씩 준비해 둔 덕을 본 것 같았다. 아빠 말 듣길 잘했네.



© JESHOOTS-com, 출처 Pixabay


그렇게 미국에 도착했다.

그런데 생활해야 하는 그곳의 언어는 내가 죽어라 시험을 준비하고 책을 읽었던 그것과 사뭇 달랐다.

억양. 강약, 연음의 삼총사 닌자가 숨어있다가 불쑥! 나타나 당황하게 했다.


미국에 간 지 며칠 되지 않았던 어느 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안에 있던 미쿡 아자씨가 나를 보고 말한다..


“읍?”

‘순간 당황.’

“읍? 읍?”

‘아. 뭐라는 거야….’

머릿속이 하얘졌다.


“읍?”

하면서 아저씨는 손가락을 하늘로 향했다.


‘아!!! up!!! 올라가느냐고 업? 이라고 물은 거구나!

어흑. 그걸 못 알아들은 거야?’


“예에스, 업.”


아저씨 귀에는 가 닿지도 않을 모기만 한 소리로 대꾸하고 구석에 찌그러져 서는 나.


나…. 4년제 대학 나온 여잔데.

나…. 토플 점수 높은 여잔데….

나…. 영어 선생 하려고 여기 왔는데….


근데

업? Up?

이걸 못 들은 거 실화냐?


© StockSnap, 출처 Pixabay


그때는 너무 비굴했지만 지금은 웃는 이야기!

나의 추억 한 꼭지!


영어강사의 영어 유감!


밀크, 업,

니가 왜 거기서 나와?


뉴욕, 어디까지 가봤니?

© marcoreyesgt, 출처 Pixabay




작가의 이전글 "30년 후에 얘기하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