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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어른스러워진다는 것

스물, 이제 매너를 생각할 때(18)

by 조관일

스물, 어른스러워진다는 것


최근에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재미있다고 하기보다는 슬프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서울의 한 콘텐츠 전문 카페가 웹툰 작가 사인회의 예약 오류에 대해 사과하면서 트위터에 공지 글을 올린 것이 사건(?)의 발단이다.

“예약 과정 중 불편 끼쳐 드린 점 다시 한 번 심심한 사과 말씀 드립니다.”


이 공지 글에 일부 트위터 이용자들이 이상한(?) 반응을 보였다. 욕설과 함께 “심심한 사과? 난 하나도 안 심심해” “공지 글은 생각이 있는 사람이 올리는 게 어떨까요.” “어느 회사가 사과문에 심심한 사과를 줌” “이것 때문에 더 화나는데 꼭 ‘심심한’이라고 적어야 했나”라는 글을 올린 것이다.


사과문에서 사용한 ‘심심한(甚深한, 마음의 표현 정도가 매우 깊고 간절한)’의 뜻을 ‘심심하다(하는 일이 없어 지루하고 재미가 없다)’는 뜻의 동음이의어로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것 때문에 대통령까지 나서서 문해력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할 정도로 사회적 파장이 컸다.


실제로 OECD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기본 문맹률은 1%에 가깝지만 읽은 문장의 뜻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실질 문맹률은 75%에 달한다니 보통의 문제가 아니다. 젊은이들에게 권하건대,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 공부도 좋지만 심심풀이라도 천자문 정도는 공부하기를 권한다. 그것이 어른스러워지는 하나의 방편일 수 있다.


철없는 젊은 날은 죽어야 한다


이야기가 조금 빗나갔다. 다름 아니라 어른스러워지자는 이야기를 하려고 여기까지 왔다. 이제 스물쯤 됐으면 어른스러워야 한다. 철이 들어야 한다. 18세가 넘으면 법적으로 성인대접을 받으니 이미 어른이 됐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이 들어도 어른스럽지 않은 사람은 많고도 많다. 하물며 스물임에랴.


어른스럽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린 꼬마에게는 밥투정만 안 해도 어른스럽다고 하지만 스물쯤에는 그 정도로는 안 된다. 한마디로 자기통제를 하고 사회성을 갖추는 것이 어른스러워지는 것이다. 어린 시절, 청소년 시절에는 본능에 충실해도 이해하고 넘어간다. 제멋대로 행동해도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눈감아줄 수 있다. 그러나 스물쯤 됐으면 말을 삼가고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 남들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 아니 폐를 끼치는 것을 뛰어넘어 좋은 인상을 줄 수 있도록 말가짐, 몸가짐을 다듬어야한다. 그게 매너다.


젊음이란 자유로움이다. 그러나 자유분방함은 아니다. 자유분방함이란 격식이나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행동이 자유로운 것이다. 한마디로 제멋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지성이라 불린 아마두 함파테 바(Amadou Hampate Ba). “노인 한 사람이 죽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 없어지는 것과 같다”는 유명한 말로 노인의 가치를 높이 샀던 그는 자전적 성장소설 《들판의 아이》(이희정 옮김/북스코프. 2008)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때 나는 일곱 살이었다. 어느 날 저녁, 식사를 마치고 아버지가 나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오늘 밤으로 마냥 철없는 꼬마였던 너는 죽었다. 지금까지 너는 어렸기 때문에 뭐든 네 멋대로 할 수 있었지. 하지만 오늘 밤부터는 너도 어엿한 어린이가 되어야 한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철없는 꼬마였던 너는 죽었다”라고 하던 아버지의 말씀이 계속 머릿속에 뱅뱅 맴돌았기 때문이다.>


그래 맞다. 이제 철없는 젊은 날은 죽어야 한다. 신세대를 부추기는 주장에 부화뇌동하여 마치 기성세대는 쓸모없고 생각도 없는 존재로 깔보는 자세부터 바꿔야한다. 괜히 삐딱한 자세를 버리고 세상사의 원리를 인정하고 긍정하는 ‘어엿한’ 어른이 돼야한다. 유치원생처럼 나약하게 보호받으려는 생각은 떨쳐버리고 멘탈이 올곧은 청춘이 돼야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의젓하게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매너를 갖춰야 한다.

철없는 젊은 날을 어떻게 죽일 것인지 오늘 밤은 잠 못 이루며 고민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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