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 외교관 이예
울산의 남과 북을 잇는 도로의 이름은 '이예로'이다.
도로명은 시민들의 공모를 받아 최종 심사를 거쳐 정해졌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최현배' 선생의 호 '외솔로'를 추천했음에도 불구하고 도로명은 '이예로'가 되었다.
그 외에도 '이예'에 대한 소식은 자주, 꾸준히 들려오고 있다.
- 2005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이달의 문화 인물'
이예 선정
- 2010년 외교부에서 '외교를 빛낸 인물'
이예 선정
- 2013년 울산박물관'조선의 외교관 이예, 바다를 건너다’전시회 개최
- 2015년 국립외교원에 이예 선생 동상 건립
- 2018년 소설<이예, 그 불멸의 길>을 원작으로
뮤지컬 공연
그렇다면 '이예'는 누구일까?
고려 말에서 조선 초, 우리나라의 역사는 혼돈의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백성의 삶은 더욱 피폐해지고 있었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왜구의 침입 또한 잦았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의 명성도 왜구의 침입을 용감히 막아내면서
백성의 입소문을 탄 것이 계기가 되었었다.
당시 왜구의 침입은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왜구는 단순한 해적이 아니라, 내륙의 깊숙이 침투하여 생활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우리나라를 마비시켰다.
내륙으로 들어와 왜구는 백성을 포로로 잡아가거나 식량을 뺏어갔다.
공민왕 당시 도평의사사는 “왜구의 침공이 너무나 극심해서 요새 관리들에게 녹봉도 주지 못하고 있다”라고 보고했다.
그리고 이예가 8살이 되던 해인 1380년, 그의 어머니는 왜구에 의해 납치되었다.
이예는 1373년 공민왕 시절에 울주군, 즉 지금의 울산에서 출생했다.
대대로 고려의 선비 집안이었지만, 이예의 삶은 그리 평탄하지 않았던 것 같다.
1380년 8살이 되던 해에 이예의 어머니는 왜구에 의해 납치되었고, 어머니를 되찾아오는 일은 그의 한평생 목표가 된다.
하지만 시련은 또 한번 찾아온다.
1392년, 왜구를 소탕하며 세력을 얻은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이예의 집안에 새 왕조에 협력 할 것을 요구했지만, 이예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이를 거부한다.
이로 인해 조선이 세워짐과 동시에 이예 집안의 신분은 강등된다.
당시 19살이었던 이예는 강등되어 중인이 되고 이후 그는 조선에서 아전(하급관리)으로 일하게 된다.
아전은 아무리 일을 잘해도 최대 종6품까지만 승진할 수가 있지만, 이예는 노년에 종2품까지 승진하게 된다.
과연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여느 때처럼 울주군(울산)에서 하급 관리로 일하던 1936년 12월의 어느 날, 왜구의 침입과 동시에 울주군수 이은이 붙잡혀 간다. (울주군수는 지금으로 치면 울주군청장 정도가 되겠다.)
울주군수 이은을 구하기 위해 당시 24살이었던 이예는 자진하여 왜구에 포로로 잡혀가고, 정성껏 이은의 시종을 든다.
이예는 1397년 2월, 포로로 따라간 지 단 3개월 만에 기지를 발휘해 군수와 함께 왜에서 탈출한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탈출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의 용감함은 널리 알려졌다.
이 공로로 25살의 이예는 신분도 복구되고 벼슬을 받아 일하게 되었다.
1400년 정종 2년에 28살의 이예는 왜에 끌려간 어머니를 찾기 위해 자진해서 회례정사 윤명을 따라 쓰시마섬에 갔으나 찾지 못하고 돌아왔다.
왜에 끌려간 어머니를 찾는 심정이 얼마나 애탔을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이예는 다음해인 1401년(태종 1년)에 사신으로서 왜를 방문한다.
이때 나가사키현 북부에 있는 이키섬에 끌려갔었던 우리나라 포로 50명을 조선으로 귀환시키게 된다.
그 공으로 좌군부사직(종5품)에 제수되었다.
이때부터 1410년에 39살이 되기까지 이예는 억울하게 왜로 잡혀간 사람들을 매년 50명씩 조선으로 데려왔다. 그 과정에서 여러 번 승진해 이후에는 호군(정4품)이 되었다.
1416년에는 오키나와현에 있던 유구국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포로 44명을 찾아왔고, 세종대왕이 즉위한 해에는 중군병마부수사가 되어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정벌을 도왔다.
1420년대에는 부회례정사, 부통신사로서 왜에 다녀왔다.
회례정사가 반장이라고 가정하면 부회례정사는 부반장 정도 되는 지위이다.
20년 전만 해도 특별한 직책 없이 어머니를 찾기 위해 회례정사를 따라갔던
20대 청년 이예는 50대 부회례정사 이예가 되어 왜를 방문한 것이다.
1426년에 세종대왕은 54세의 이예를 일본에 보내며 “(왜를) 모르는 사람은 보낼 수 없어 그대를 보내는 것이니 귀찮다 생각지 말라”며 손수 갓과 신을 하사했다. 이 일화만 보아도 세종대왕이 이예를 매우 신뢰했음을 알 수 있지만, 관련된 또 다른 일화가 있다.
1432년에 이예는 회례정사가 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이때 회례부사로 이예를 따라간 김구경이 세종대왕에게 이예가 사적으로 일본인들과 무역을 했다고 고발하여 논란이 되었으나 이예는 처벌 받지 않았다.
실제로 이예가 사적으로 일본과 무역을 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세종대왕이 이예의 능력을 높이 샀으며 일본과의 외교에 있어서 그에게 많이 의지했다는 점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대일 관계의 실무 사항을 거의 전담하다시피 하였다.
1938년의 어느 날 당시 66세였던 이예는 첨지중추원사로 승진한 뒤 대마도에 가 있었는데, 세종대왕이 쓰시마섬에 관한 잡무로 신하들에게 의견을 묻자 모두 “이예가 돌아오기를 기다려 다시 숙의하게 하옵소서.”라고 했고, 이를 그대로 따랐다고 한다.
1443년에는 71세였던 이예가 왜적에게 잡혀간 포로를 찾아오기 위해 자청해 대마주체찰사가 되어 다녀온다.
또한 같은 해에 왜와 계해약조를 체결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이 공으로 동지중추원사로 승진하였다.
동지중추원사는 종2품으로, 울주군의 군수를 보좌하는 직책인데,
지금으로 치면 외교 분야에서 울산 최고 책임자를 보좌하는 지위인 것이다.
동지중추원사는 이예가 마지막으로 맡은 지위가 되었다.
비록 이예는 어머니를 구해오지는 못했으나, 일생동안 총 667명의 우리나라 사람들을 구해왔다. 그가 위인인 이유에는 ‘단순히 계해약조 체결과 대마도 정벌’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포로로 끌려간 백성 한명 한명을 소중히 생각했던 마음’까지도 들어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조선 초기에 왜에 사신이나 통신사를 파견한 것이 총 48차례였는 데
그중 40여 차례를 이예가 직접 갔다고 하니
당시 외교에 있어 아주 중요한 인물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밖에도 이예는 일본의 자전 물레방아와 사탕수수를 우리나라에 도입할 것을 건의했었다.
일본의 기술들을 우리나라로 들여오는 데 앞장선 던 것인데,
반대로 우리나라의 불교문화와 인쇄문화를 왜에 전파하기도 하면서 문화외교에도 앞장섰다.
이 모든 일들은 그가 뛰어난 외교관으로서 아직까지 칭송받을 만한 인물임을 입증해주는 듯 하다.
조선 순조 때는 이예에게 ‘충숙공’이란 시호를 하사하기도 했다.
또한, 이예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용연사는 현재 석계서원으로 아직까지 남아있다.
석계서원과 그 주위 풍광이 좋다고 하니 가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지금까지 이예에 대해 알아보았다.
(길었는데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들께 너무나 감사합니다.)
아래는 학성이씨 커뮤니티에서 얻게 된 이예에 관한 웹툰인데, 이해를 돕기 위해 첨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