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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essed To Bless Oct 30. 2022

고 3 이민자 1

열아홉 살 이민자

엄마에게는 한 분 밖에 없는 여동생이 있으셨다. 이모는 내가 초등학교 때 이모부 가족이 사시는 미국으로 이민을 가셨다. 초등학교 입학을 같이 했던 동갑내기이자 단짝 친구인 사촌은 그렇게 핫 코코아와 햄버거가 맛있는 나라로 떠나가버렸다. 온 친척이 죄다 공항으로 마중 나가 손수건 흔들며 눈물 콧물 흘렸던 그 시절 촌스러웠을진 몰라도 정감 있었던 배웅을 했다. 상실감까지는 아니었어도 한동안 서운한 마음이 꽤 오래갔었다. 


종종 미국 생활을 적은 소식을 전해오며 사진들을 보내왔던 이모의 편지는 미지의 세계에 관한 나의 궁금함과 막연한 상상력을 조금은 해소해 주었다. 사진의 색깔마저 이국적이라고 느꼈었고, 그 속에 담겨있던 사촌들의 모습에서 버터 냄새까지 나는 것 같았다. 웨이브가 있는 머리스타일, 디자인과 색감이 한국에서의 스타일과 사뭇 다른 옷차림, 노란 머리 파란 눈의 친구들과 같이 찍은 생일파티 속의 그녀들은 왠지 조금 더 행복해 보이기까지 했다면 나의 지나친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즈음에 부모님은 어려운 결정을 내리셔야만 했다. 다름 아닌 이민의 가능성을 고려해 보는 것이었다. 엄마의 친척분 보증을 선 게 잘못되어서 집을 잃어버리게 된 흔하디 흔한 그런 사건이 우리 집에도 일어났던 것이다. 하나뿐인 이모가 이민을 가신 후 외할머니께서 뒤따라 가셨고, 그 후로 이모는 엄마에게 여러 번 러브콜을 하시긴 했지만 그만저만한 한국의 삶에 큰 결핍을 느끼진 못하셨던 아빠는 아예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이셨다.  또 낯선 나라, 낯선 생활에 새롭게 도전하시기에는 아빠의 그때 연세도, 또 당신의 성향 자체가 여러모로 힘드시지 않으셨을까 싶다. 


아무튼 이모와 할머니가 계신 곳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엄마는 비행기를 타실만 했고 또 자녀들에게 어쩌면 기회가 될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시고 미국으로 향하셨다. 그렇게 일 년을 넘기도록 떨어져 살게 될 줄은 모른 체 말이다. 엄마도 곧 돌아오실 생각이셨겠지만 이모의 설득과 앞으로의 삶을 생각하면 한국에 남아있는 우리에게 영주권을 줄 수 있는 쪽으로 어쩔 수 없이 가족이 떨어져 살기로 결정을 내리신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 봐도 엄마의 선택이 결코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미국으로 가신지 두 해가 가까워 갈 때쯤 엄마는 영주권을 받게 되셨고 자녀 초청이 가능할 수 있었다. 당시 군 복무 중이었던 오빠와는 함께 떠날 수 없었던 나와 동생은 고3으로 한국을 떠나게 되었다. 그 당시 나에게 있어서는 미국 이민은 마치 구원을 받게 된 일 같기도 했다. 왜냐하면 무시무시한 한국에서의 고3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그걸 피해 갈 수 있는 정당한(?!)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떠나기 전 인사를 하러 찾아 간 모교에서 평소에 별로 친하지도 않았던 친구들까지 복도로 나와 꼭 편지하라며 여학생다운 선물들과 함께 친절한 작별인사를 해주었다. 적어도 고3 지옥을 비껴간다는 사실만큼은 그들에게 있어서 나를 부러워할 만한 이유였을지도 모르겠다. 어찌 됐든 그들의 응원과 따듯한 인사가 내게는 고마운 기억이다. 


그렇게 모든 수속을 마치고 동생과 나는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10시간이 넘게 비행기를 타고 뉴욕의 JFK공항에서 내려 엄마가 계신 곳으로 가기 위해 갈아타야 했던 비행기는 한국 여객기가 아닌 미국 항공사였다. 어린(?!) 우리 남매만 오는 게 영 걱정이 되셨던 엄마는 내내 기도만 하셨다고 했다. 그래서였을까...  다행히도 우리 남매의 옆자리에는 외국 출장 경험이 많았던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아저씨가 타셨었는데 우리 남매의 상황을 듣고 흔쾌히 도와주시겠다고 하셨다. 입국 신고서 작성부터 심지어는 당신이 타고 가셔야 할 다음 비행기를 뒤로하고 우리 남매가 안전하게 갈아탈 수 있도록 도와주신 후 떠나셨다. 


지금 생각해도 여간 고마운 분이 아니었다. 그때 성함이라도 여쭤봤어야 했었는데.... 두고두고 죄송하다. 이만큼의 나이가 돼서 돌아보는 인생 속에는 얼마나 많은 익명의 사람들의 보수를 바라지 않는 친절과 도움이 있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셀 수 없는 사람들이 나의 삶의 무게를 함께 들어주고, 또 도움의 손길을 베풀어 주었던 것에 진심으로 감사하다. 그렇기에 나 또한 빚진 마음으로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동생과 함께 이모네 식구가 살고 계신 미국의 메릴랜드주(Maryland)는 미국의 수도인 위싱톤 디시(Washington D.C.)와 근접해 있는 곳이었다. 1989년 4월 8일, 아마도 어느 이민자이던지 고국을 떠나 처음 그 나라에 도착한 날짜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때의 온도, 풍경, 첫인상,... 냄새조차도 선명한 기억으로 남겨질 만큼 말이다. 과연 이민이란 인생에서의 커다란 전환점이어서 일 것이다. 나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지금도 4월만 되면 그날, 미국에 도착해서 이모 댁을 향해 달리며 끝도 없이 줄지어 서 있던 그 벚꽃나무들의 행렬이 떠오른다. 마치 오랜 시간 동안 고생하며 이곳에 오느라 수고했다고 우리 남매를 향해 두 팔 벌려 환영해 주는 듯 한 그런 화사한 기억이다. 비록 피곤한 몸이긴 했어도 곧 엄마를 만나게 될 거라는 기쁨과 앞으로 미국에서의 삶에 대한 기대, 그래서 뭐든 해낼 수 있겠다는 의지가 가득했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눈물과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을 이민자의 삶임을 짐작도 못한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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