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과목 다른 수업
미국은 한국에서처럼 학생이 교실에 있고 선생님이 움직이는 게 아니라 백과사전 같은 두꺼운 교과서를 들고 학생들이 해당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교실로 부지런히 옮겨 다녀야 한다. 그래서 다음 교실이 좀 멀기라도 하면 이동하는 동안 서둘러 가느라 숨을 몰아쉬며 책상에 앉기도 한다. 한국에서처럼 그 쉬는 시간 10분을 여유롭게 친구들과 깔깔거리며 수다하기도 하고, 순식간에 도시락을 까먹기도 하고, 또 매점으로 신나게 내달렸던 그 소소한 기억이 참 예쁜 추억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졸업을 해야 하는 수업 중에서 외국어 수업 점수도 부족했었고 시간도 없었던 터라 독어, 스페인어 같은 새로운 외국어가 아닌 그나마 한국에서 배웠던 불어로 외국어 수업을 들어야 했다. 나는 불어에 흥미는 있었지만 독특한 발음을 재미있어했을 정도였고, 미국의 교과과정과 진도 내용도 달랐을 뿐 아니라 회화, 문법 등 여러모로 모자랐다.
첫 불어 수업, 연세가 있어 보이시는 지긋하신 할머니 교사셨다. 얼마나 열정적이셨던지 학생들이 들어오는 교실 입구에서 서서는 학생들 한 명 한 명 이름을 부르시며 불어로 인사해 주셨다.
"봉쥬루~마드모아젤 요심~~!"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그녀는 불어로 시작하셔서 불어로 수업을 마치셨다. 물론 간간히 영어로 문법 등을 설명해 주시기는 하셨었지만 뭐 그렇더라도 나에게는 그다지 도움이 되질 못했던 상황이어서 이래저래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내가 영한사전뿐 아니라 불어 사전을 들고 와 수업 중에도 열심히 뒤적이는 게 안쓰러워 보이셨던지 나를 보실 땐 천천히 영어로 말씀해 주시는 친절을 베풀어 주시기도 했다.
다음은 영어시간, 그날은 셰익스피어의 멕베드 제3막을 공부하는 차례였다. 한눈에 보아도 성실하고 보수적일 것만 같은 그녀는 할머니 스타일의 촌스러운 곱슬 파마에 빈틈없이 꽉꽉 채워진 성실한 내용으로 수업을 하셨지만 아이들에게 흥미를 이끌어내기에는 부족하셨던 것 같다.
그렇지만 적어도 내게는 맥베드의 3막을 원문 그대로 다 읽고 또 암기해서 독백하게 해 보고, 인물들의 감정과 생각들을 자신이 분석해 온 내용으로 토론해 보도록 이끄는 수업방식은 무척 흥미로웠다. 물론 나는 과묵한 학생이긴 했지만 적어도 그들이 토론하는 말들을 귀담아들어보려 애썼고 한국에서는 경험해 볼 수 없었던 미국의 수업방식을 이해만 할 수 있었다면 무척 흥미로운 시간들이었지 않았을까 싶다.
다음은 꿈에서라도 보고 싶지 않은 숫자들의 향연, 수학 시간. 수학공식들이 한국에서 푸는 형식과는 사뭇 다른 것들이 제법 있어서 어렵기는 했지만 적어도 많은 영어가 필요 없었고 대부분 칠판에 문제들을 풀어보게 하는 그나마 한국과 가장 비슷한 수업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족히 190cm는 넘어 보이는 장신의 키를 한 Mr. Cameron 선생님이 나를 호명하셨다.
"Hey Yo! Why don't you solve the problem on the board!
(요심, 이번 문제는 네가 칠판에 문제를 풀어라!)"
라며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그때였다. 조용했던 교실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돼버렸다.
"Who is Yo? Is it serious? Really? Her name is Yo? "
("누가 "요야?" 정말 저 애 이름이 "요"야??" : 요샛말로 '대~~ 박~!)
라며 주로 짓궂은 남학생들이 책상을 두들기며 큰소리로 웃으며 놀려댔다. 순간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우물쭈물 도살장 끌려가는 소처럼 칠판 앞으로 걸아나가고 있었다. 학교 축구 코치이기도 하셨던 수학 선생님은 운동장을 통째로 씹어 드실 수도 있을만한 우렁차고 걸걸한 목소리로,
" Shut up! (입 닥치고 조용히 해!")
라시며 책상을 치시며 나(이름)에 대한 그들의 비웃음을 종식시키셨다. 그러나 나는 보았다. Mr. Cameron도 웃고 있었다는 걸.
나중에 사촌 아이로부터 듣게 된 것은, 중간 이름(middle name) 이 없는 우리나라 표기의 내 이름 장요심을 미국식 표기로, first name과 middle name, 그리고 last name으로 이름을 세 토막을 내버려서 일어난 일이었다. 게다가 first name으로 한 내 이름 요(Yo) 자는 미국에서 "야!"라는 의미란 걸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나 이민 온 타향에서나 유별난(!?) 내 이름 때문에 겪는 고초의 연속이 다 아빠 때문이라고 원망했었다.
정말 들어가고 싶지 않은 수학 교실에서 그나마 견딜 수 있었던 이유는 나보다 몇 주 뒤에 전학 온 중국 상해 출신의 같은 반 여학생 때문이었다. 언제나 교실에 먼저 와서 앉아있던 그녀에게 관심이 갔던 건, 그저 검은 머리에 피부색이 나와 같다는 이유만은 아니다. 그녀는 수업시간에 늘 딴청을 했다. 그 딴청은 다름 아닌 떨어져 사는 부모님께 편지를 쓰는 일이었다. 빼곡한 한자로 순식간에 편지지를 가득 메워가는 게 얼마나 신기하던지... 종종 그런 그녀를 지켜보곤 했었다.
그녀가 얼마나 부모님을 그리워하는지 한 개도 못 알아먹는 글씨들이었지만 적어도 내 눈에는 거침없이 써 내려가는 그녀의 손끝에 매달려있는 그리움이 보였다. 둘 다 서툰 영어로 몇 마디의 이야기를 나누곤 했고, 내 이름을 한자로 써보이니 얼마나 좋아해 주던지... 뜻풀이를 해주면서 내 이름이 아주 멋진 이름이라고 칭찬해 주기도 했다. 불과 몇 주 전에 그런 놀림을 당한 이름이었는데 말이다. 맘 바꿔 이번에는 아빠에게 감사했었다.
나의 앞자리에 앉았던 그녀는 수업내용이 시시했던지 아예 수업을 듣지 않았어도 늘 100점을 맞았었다. 동양인은 수학을 잘하는 인식을 적어도 같은 동양인인 그녀만이라도 해내 주는걸 속으로는 감사하면서, 또 부끄러워하면서 그녀와 함께여서 제일 싫어하는 수학 수업을 그나마 견딜 수 있었다.
다섯째 시간인 미술실을 가는 길은 비교적 가벼운 마음이었다. 왜냐하면 다른 수업에 비해서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되고, 조용히 그리거나 만들면 되었으니까. 무엇보다도 미술실을 가려면 항상 지나가야만 하는 교실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우리나라 태극기와 중국 국기, 그리고 일장기가 나란히 걸려있어서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알고 봤더니 미국 정부와 동양사에 대해서 배우는 교실이었다. 알아듣기 힘들겠지만 왠지 나도 그 교실에서 그녀의 수업을 듣고 싶을 만큼 그곳의 태극기가 나의 걸음을 멈추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냥 걸려있는 태극기만 보는데도 이렇게 눈물이 날 수 있는 거구나..'
라며 나라를 떠나면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처음으로 마음에 와닿았던 순간이었다. 그녀의 수업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후 하루는 그 선생님과 복도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 순간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목례로 인사를 했다. 걸음을 멈추고 그녀 앞에 서서는 정확하게 그녀를 향해서만 한 인사였다.
한국에서 있었을 때처럼 흠씬 복도를 내달리다 선생님과 마주치면 그렇게 얼렁뚱땅 해버린 인사 말고 딱히 설명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이유들의 감사를 담아, 그리움을 담아,... 그렇게 꾸우벅... 진심으로 인사를 드렸다.
그러자 그녀도 가던 길을 멈춰 서서는 분명하게 나를 바라보시고 그녀 역시 90도 각도로 깍듯이 목례를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잠시 어쩔 줄 몰라하기도 했지만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위로를 받았고, 그 후로 그녀의 교실을 지날 때마다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서서 그 태극기를 한참 동안 쳐다보고 가곤 했다. 그녀가 수업 중에 가르치는 한국에 관한 것들은 왠지 다 좋은 내용일 것만 같았다.
운동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나는 한국에서처럼 체육시간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미국은 한국과는 다르게 체육수업, 다시 말하자면 운동을 꽤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다.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어느 정도의 스포츠 활동과 학교 외에 봉사, 다양한 경험들이 있어야 소위 말하는 좋은 학교에 들어갈 수 있는 확률이 높은 편이다. 또한 체육과정의 수료가 학생의 신체적 건강뿐 아니라 리더십과 지덕체를 겸비할 수 있게 도와준다고 믿었고, 그러므로 학업에 매진하는 것 못지않게 스포츠에 참여하는 것을 장려하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그럼에도 좋은 대학도, 운동에 대한 관심은 더더욱 없었던 나는 체육 시간이 다가오는 것이 몹시 싫었다. 무엇보다도 팀을 나눠야 할 때, 정말 그 순간만큼은 어디 지구 밖에라도 나갔다 오고 싶었던 심정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딱 봐도 그리 잽싸 보이지 않아 자기 팀으로 데려올 만한 인재가 되지 못했었으니까 말이다. 거의 매번 늘 마지막에 끼어 파는 부실한 무엇처럼 마지못해 나를 데려가야 하는 팀원들의 눈빛은 곱질 못했다. 나름 팀에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몸을 날려보지만 언제나 역부족임을 아프게 인정하는 시간들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어릴 적 동네에서 고무줄놀이하며 놀았을 때에는 그래도 나름 유명했었는데... 내 머리 위로 한껏 올려져 있던 검은 고무줄을 발을 뻗어 있는 힘껏 휘익~하고 멋지게 끌어내려 겅중겅중 잘도 뛰어다녔었는데 말이다. 그렇게 마지막 노래까지 다 마친 후에 실패했던 우리 팀 친구들과 아무도 데려가고 싶어 하지 않아 했던 깍두기 한 명까지 몽땅 다 다시 구원해 냈을 때의 환희를 느끼기에는 이곳은 내게 여전히 낯설고 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았었다. 깍두기란 패배에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존재라고 말했던 어느 시인의 말이 위로가 되기는커녕, 마지막으로 뽑혀가며 내가 겪어야 하는 수모가 너무 크다고 느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