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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essed To Bless Oct 30. 2022

고 3 이민자 3

외국어로 나눈 우정

이모네 식구가 살고 있었던 동네는 제법 좋은 학군에 속해있었기에 어찌 보면 나름 덕을 본 셈이다. 한국을 떠날 때 나와 동갑내기였던 첫째 사촌은 이미 대학생이 되어있었고, 둘째와 막내 사촌동생들은 우리 남매와 함께 고등학교에 다녔었다. 수업들이 다 다르고 또 친구 그룹도 그렇다 보니 당연히 공통분모는 없었다. 자기들의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여러 가지 자신들의 일로 그들은 늘 바빠 보였고, 주말이면 멋지게 화장을 하고 놀러 나가는 것을 지켜보며 '미국은 참 파티를 많이 하는 나라구나'라고 생각했다. 


이런 나에게도 친구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나처럼 외국에서 온 학생들이 별로 많지 않은 학교여서 ESOL수업을 듣는 한국 학생이라고 해봤자 나와 동생, 그리고 조기 유학을 온 두 명의 여학생이 전부였다. 그렇지만 유럽권에서 온 학생들이 10명 남짓 됐었고 또 일본 학생들은 적어도 우리 한국 학생들보다는 숫자가 많았다. 인도에서 온 두 명의 남매도 포함해서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우리들은 함께 영어 수업을 들어야 했다. 


다들 영어가 부족했던 터라 모이면 손짓 발짓 섞어가며 대화하는 건 기본이었고, 그나마 조금 먼저 와있었던 다른 학생들은 나와 동생보다는 영어를 수월하게 하는 걸 볼 때마다 부럽기도 했다. 어쨌든 다른 수업보다는 부담이 덜했고 또 부지런히 영어를 배워 하루빨리 다른 수업들을 따라잡고 싶은 욕심이 생기기도 해서 학구열이라면 좀 우스울지 몰라도 열심히 하려고 애를 쓰긴 했다. 


그중에서 나와 같은 고3이었던 친구 두 명이 나에게 유일한 학교에서의 동급생 친구였다. 일본에서 온 키라라와 인도에서 온 네트라였다. 또 두 사람 다 여학생이라 마음도 더 편했었다. 수줍음이 많고 조용했던 네트라와는 달리 키라라는 한눈에 봐도 열정이 넘치고 씩씩한 외향적인 친구였다. 처음에는 일본인이라는 이유로(지금 생각하면 부끄럽지만) 조금 거리감을 두었고, 어색해했던 나와는 달리 그녀는 나에게 호감을 보였고 늘 먼저 말을 걸어왔다. 


이민 온 우리와는 다르게 대부분의 ESOL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길어봤자 2-3년 내에는 자신의 고국으로 돌아가거나 다른 곳으로 이주해야 했다. 대부분 부모님의 직장과 관련되어 미국에 일정기간 머무는 경우였다. 키라라에게는 여동생이 있었는데 멋 부리는 다른 일본 여학생들과는 달리 초롱초롱한 눈을 크게 뜨고는 소박하고 검소한 차림으로 활달하게 학교를 휘저으며 다니던 모습이 귀여운 일본 만화의 캐릭터처럼 사랑스러웠다. 


키라라의 아버지는 다름 아닌 일본에서 유명한 굴지의 신문사 기자였다. 왜곡된 역사를 배우고 있다고 알고 있는 대부분의 일본 학생들과는 달리 아버지의 영향 때문인지 그녀는 한국에 대해 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 보였다. 일본인으로서 부끄러워해야 하는 점들이라며 스스럼없이 나에게 이야기할 때면 오히려 내가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못할 정도로 그녀는 거침이 없었고 늘 솔직했다. 일본 학생들끼리 어울려 다니던 것과는 달리 그녀는 틈만 나면 나와 네트라와 함께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고, 여러 면에서 진취적이고 모험심이 많은 친구라고 느껴져 멋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낯선 곳에서의 고등학교 일 년을 견디고 애쓴 끝에 어느덧 우리에게도 졸업이란 열매가 주어졌다. 주마등처럼 스치는 이 낯선 곳에서의 고3 아닌 고3을 보낸 나의 지나간 일 년이 고스란히 보람으로 다가왔고, 그것은 나만의 노력이나 능력이 아니었음을 비록 스무 살의 나이였어도 나는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 셋은 각자의 길을 향해 떠나면서 흔한 미국의 인사말로 "굿 럭!"이라고 말하며 서로를 힘껏 안아주었다. 낯선 나라에서 고3으로 만난 인연이었기에 비슷한 외로움과 언어의 무게를 견뎌야 했던 우리들의 지난 1년을 칭찬해 주며 서로의 앞날을 진심으로 응원해 주는 말이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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