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되는 실패에게 내어준 나의 꿈
가까스로 겨우 졸업만 할 수밖에 없었던 나는 일반 종합대학(Unuversity)이 아닌 굳이 번역을 해보자면 지역대학 (Communuty College)이라는 곳으로 진학해야 했다. 보통은 2년 동안 교양과목이나 본인이 전공하게 될 과목들 위주로 수업을 들으며, 필요한 학점을 얻어서 일반대학으로 옮길 수 있는 발판이 되는 곳이다. 개중에는 일반 대학의 등록금을 절약하기 위해 일부러 이곳을 거쳐 종합대학으로 옮겨가는 미국 학생들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어쨌든 나는 선택권이 있었던 것은 아니기도 했고 나 같은 이민자들의 대부분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이런 커뮤니티 칼리지(지역대학)를 지원해서 공부하게 된다. 등록금이 저렴한 데다가 수업도 일반대학보다는 쉬운 편이고 무엇보다도 일과 병행해야 하는 나 같은 이민자들에게는 이런 옵션이 있는 것도 감사할 따름이다.
한국에서 대학을 다녔었더라면 한 번쯤 꿈궈봤을 그 싱그러운 대학 초년생에 관한 상상, 나 역시 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전공책을 가슴에 품고 아직은 어설프고 촌스러운 화장을 해서 딱 봐도 티가나는 대학 1학년 생의 모습, 학교행사 여기저기 행복하게 불려 다니는 것, 동아리 선배들의 러브콜을 받는 것, 축제를 하고, 밤새워 토론을 하고 또 술을 마실 수 있는 정당함을 가지게 되는 것. 무엇보다도 설레는 마음으로 미팅을 해보는 그런 한국에서의 대학 생활 말이다. (요즘은 많이 다를지도..ㅋ)
그러나 그것은 미국에서 사는 이민자로서의 대학생활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적어도 내 경우에는 그랬다. 어떻게 하면 강의 시간표를 알바시간과 겹치지 않도록 짜서 최대한으로 일하는 시간을 확보하는 일이 우선이었고, 차가 한 대뿐이었던 가족들의 라이드를 고려하며 바쁜 시간을 쪼개 쓰며 사는 게 대부분의 이민자들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여러 가지 파트타임 알바들과 수업을 병행해 가며 남들보다 더 오래 커뮤니티 칼리지를 다닌 후, 일반 주립대학으로 이적을 했다. 주립대학교로 옮겼다는 것을 안 주위 친구들이 학교에서 얼굴 보기가 힘들다고 말할 때마다 가끔은 좀 의기소침해졌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른 시각의 첫 강의부터 그날의 마지막 강의까지의 뺴곡한 시간표, 마지막 수업을 마치자마자 집에서 대충 싸 온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학교 주차장으로 걸어가다 보면 내 눈에 종종 들어왔던 풍경이 있었다.
세계의 대학 다큐멘터리 같은 프로그램에 곧잘 등장했던 그 흔한 장면들 말이다. 온몸에 햇살을 받으며 학교 잔디밭에 누워 책을 읽거나 삼삼오오 짝을 지어 앉아 담소를 나누는 그런 여유로운 모습, 적어도 그때의 나에게는 그건 누리기 어려운 호사스러운 사치였다. 그러나 고생하시는 부모님과 각자의 자리에서 이민자로서의 척박한 삶에 땀 흘리는 식구들을 생각하면 이런 것쯤은 불평할 것이 못된다고 두더지처럼 쑤욱하고 기어올라오려는 그런 생각들을 애써 씩씩하게 꾹꾹 누르며 살았다.
그런 나에게도 (황당할 수 있겠지만) 꿈이 있었다. 바로 저널리스트가 되는 것이었다. 나에게 있어서 그 꿈은 아주 단순하게 시작되었다. 중학교 때였다. 은행 심부름을 해야 했던 친구를 기다리며 손에 잡힌 여성 잡지 한 권을 집어 읽어 내려갔었는데 다름 아닌 미국 여성 앵커 바바라 월터즈에 관한 기사였다. 어디서나 그랬겠지만 미국도 예외일 수 없었던 여성차별과 불모지와 같았었던 여성 앵커로서 인정을 받는 자리까지 도달할 수 있었던 그녀의 성공스토리였다.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나는 '내가 갈 길은 이거다!'라고 결정해 버렸고 주립대학에 편입한 후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저널리즘으로 전공을 선택했다. 나의 처해진 형편과 한계를 숙고해보지도 않은 채 말이다.
다른 전공과는 다르게 당시 우리 학교의 저널리즘과 건축학, 그리고 컴퓨터 사이언스 과는 시험을 치러야 했었다. 나는 특별한 준비도 없이 시험을 보았고 보기 좋게 떨어졌다. 아주 단순한 생각으로 저널리즘을 꿈꿔왔었던 나는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지나칠정도로(?) 당당하게 저널리즘과의 학과장(Journalism Dean professor) 과의 면담을 신청했다. 한눈에 봐도 이성적이고 냉철해 보이는 그의 앞에서 버벅거리는 영어로 저널리즘에 뜻을 두고 있는 학생으로서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나에게 한 번의 기회만 주어진 것은 공평하지 않다 뭐 대충 그런 내용으로 그를 설득했었다. 다시 생각해 봐도 엄청 겁 없이 대들었던 그때의 젊은 용기가 참.. 대책 없게도 보이지만 한편 그립기도 하다.
그날, 의미를 알 수 없는 엷은 미소를 띤 학과정은 나에게 흔쾌히 허가서를 써주었고, 그걸 손에 쥔 나는 '곧 다시 오마!' 라며 제법 호기로운 마음으로 저널리즘 빌딩을 떠났었다. 곧 재시험을 쳤고 결과는.., 또 불합격. 이미 연합고사에 고배를 마신 나였어서 실패의 트라우마(?)는 특별히 쓰다. 그 상실감이 어찌나 컸던지 무슨 일이 있어도 한 번도 빠지지 않았던 알바를 빼먹고 무너지는 마음을 견딜 수가 없어 혼자 있을 곳을 찾아다녔다. 비록 한 학기가 다 되어가도록 다닌 교정이었지만 채플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만큼 나의 대학생활이 단조로웠다는 것을 말해 주는 듯해서 순간 더욱 서글퍼지기도 했다.
교정을 지나가는 학생 아무나 붙잡고 겨우겨우 찾아 들어간 조그만 채플에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어려운 일을 당하면 다 그런 건가. 종교에 상관없이 신에게 따지고 싶은 그런 마음 말이다. 나름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에게 사랑받는다고 확신했지만 그날의 실패는 마시기 힘든 고배였다. 생각해 보면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거밖에는 내가 가고 싶은 길을 생각해 둔 것이 없었기에 앞으로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혼자서만 덩그러니 주저앉아 있는 것만 같았다. 적어도 남 신경 안 쓰고 실컷 울 수는 있었던 건 다행이었다. 잘 들리지도 않는 하나님의 음성을 조만간 들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과연 어디로 가야 할지, 또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떠오르는 생각 없이 그곳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