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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essed To Bless Oct 30. 2022

드디어 졸업!

연애하고 졸업하며 결혼으로 나아가는 중

졸업할 때쯤 알게 된 동기가 있다. 그녀는 한국말이 서투른 2세로 그녀의 가족은 펜실베이니아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오는 졸업식에는 가게 문을 닫을 수 없는 부모님을 대신해 언니만 참석하러 온다고 말했다. 그런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타주에서 공부한 막내딸의 졸업식에 올 수 없으셔서 미안한 마음으로 전화하신 부모님과 안부를 나눈 후, 그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으셨다. 


"...그래서, 네 전공이 뭐라고~? 뭘로 졸업한다고 했지? 컴퓨터 싸이언스라고?"

"대디~ 잉글리시 리러러쳐~! 문핰! 용문핰!"

"뭐라고?? 글쟁이?? 그거 해서 어데 밥 벌어먹고 살겄어~~?"


라고 걱정하셨다면서 어이없게 웃어 보이는 그녀의 맑은 얼굴에는 원망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민자의 자녀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만만치 않은 삶을 등에 지고 살아가시는 부모님의 헌신적인 희생에 대한 고마움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졸업식조차 올 수 없으신 부모님을 원망한다거나 내가 무슨 공부를 하고 있는지 일도 관심이 없는 분들이라고 함부로 서운해 할 수도 없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오직 가족과 자식을 위해 희생과 희생과 희생을 거듭해 온 그들의 말할 수 없는 이민 스토리를 누구보다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자녀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보통의 미국인 가정의 부모가 줄 수 있는 것들을 아주 일찍부터 포기하게 되고, 그로 인해 나름 다른 방식으로 씩씩해지는 법을 터득할 수밖에 없는 게 대부분의 이민자의 자녀들이다. 그런 우리가 서로를 보며 '다 알지...' 하는 얼굴로 위로하듯 미소를 나누었다. 그러면서 혼자 속으로 '미국이나 한국이나 글을 쓰는 일은 배고픈 일이구나..'라는 시대에 뒤떨어진 싱거운 생각을 아주 잠시 하기도 했다.


3년 반이란 시간 동안 롱디 연애를 했던 지금의 남편도 같은 해 졸업을 했다. 우리는 늦깎이 졸업생들이었기에 졸업과 동시에 결혼을 하기로 양가가 진행해 가고 있던 터였다. 그렇게 졸업과 구직, 결혼식이라는 큰 과제들이 내 앞에 놓인 여러모로 많은 책임들을 떠올려야 했던 시기였었다.


5월에 내가 먼저 졸업식을 했고, 오하이오주에서 학부를 했었던 남편의 졸업식이 몇 주 후인 다음 달이었다. 그때 시아버님은 오랜 당뇨로 인해 투석을 받으시면서 건강이 몹시 좋지 않은 상태였었고,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의 졸업은 당신에게 있어서 기쁜 일이었음을 모르지 않았다. 


삼 년 하고도 6개월가량을 떨어져 지내야 했던 우리는 둘 다 넉넉하지 못한 이민자 가족의 아들 딸로서 그저 편지로 엽서로 사랑을 나누어야 했다. 이메일도, 핸드폰도 없었던 그 시절에 매주 토요일 같은 시간에 통화를 하며 상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했던 나름 풋풋한 시절도 있었다. 비록 전화요금이 무서워 서둘러 끊어야 했었고 때론 마음과는 다르게 말다툼을 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은 적도 종종 있었지만 그 시간을 돌아볼 때면 내게도 소박하고 달콤했던 연애 경험쯤은 있다고 말할 수 도 있겠다.  


그가 공부했던 오하이오주는 메릴랜드에서 8시간을 운전해야 갈 수 있는 거리였어서 낡은(!) 그의 고물 자동차를 운전하고 되돌아가는 그 긴 시간 내내 그의 어머님도 나도 마음을 졸였던 게 몇 번이었던지. 남편은 여러 가지 형편상 방학 때마다는 집으로 올 수 없었고 어떻게든 시간과 돈을 아껴 졸업을 서둘러야 했었던 우리 둘은 종종 마음이 조급해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졸업 전 마지막 일 년을 앞두고 문득 들었던 생각은 '혹시 우리가 이렇게 편지로 나누는 연애에 서로에 대한 환상만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염려였다. 남들처럼 서로 부딪혀 싸우고 다투기도 하며 실질적으로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도 필요하다 믿었기에 마지막 여름 인턴십을 같은 지역에서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싶어 여기저기 문을 두드려 보았었다. 


감사하게도 몇 블록을 사이에 두고 Washington D.C. 에 있는 공연 문화를 하는 곳에서 그는 수습 디자이너로, 나는 라디오 방송국에서 인턴으로 일하면서 방학 내내 함께 있을 수 있는 소중한 시간들을 선물로 받기도 했다. 이런저런 일로 남들처럼 다투고 갈등하고 또 화해하면서 현실적으로 결혼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서로에게 헌신된 배우자로 함께 살아갈 준비가 되었는지를 살펴보는 일은 무엇보다도 신중하고 진지해야 하는 일임을 말해 뭐 하겠는가. 


한 여름학기에는 뉴욕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기회가 있었다. 몇몇 젊은 대학생들과 함께 숙식을 하고, 주말마다 메릴랜드와 뉴욕을 오가면서 한인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열악한 동네의 아이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여름학교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내가 했던 여러 개의 알바 중에 아마도 가장 보람을 느꼈었던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대부분 노동자 계급이나 어려운 형편의 이민자 자녀들의 학업을 가르치는 것도 그랬지만, 마땅한 놀이터도 없어 안전하지 못한 동네에서 살던 아이들이 방과 후에도 우리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것도 특히 좋았었다. 다른 대학생들과 함께 지내며 그런 아이들을 잘 가르치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마음을 모았던 특별한 경험은 지금 돌아봐도 참 귀한 시간이었다. 


그중에서 젊은 선생님 한 분은 대부분의 교사들보다 나이가 많았고 이미 결혼 생활을 하고 있었다. 부부가 매주 떨어져 지내야 했던 게 서운했었을 그의 아내가 우리가 있던 숙소를 방문해서 주말을 함께 지내게 되었던 적이 있었다. 당시 남자친구였던 남편의 엽서와 편지가 그곳으로도 배달이 되왔던터라 나는 교사들 사이에서 공공연히 재미있는 놀림감이 되었다. 그런 어느 날 그녀는 나의 연애에 관심을 표하면서 그 남자와 결혼을 할 생각인지를 물어왔고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가타부타 말하기도 뭐해서 어정쩡하게 뜸을 들이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나에게 해 준 말이 있었다. 


"유노(You know) 요심,... 결혼하면 상대방이 180도로 변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면 안 돼. 지금 연애하는 사랑의 힘으로,  요심이 원하는 모든 것을 그대로 맞춰주고 변해줄 거라는 잘못된 기대를 반드시 버려야 할 거야."


라며 결혼을 하게 될 그 사람의 가장 취약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들이 결혼한 후 비록 변하지 않을지라도 내가 이 사람의 그 약점들까지 견디며 포기하지 않고 함께 갈 결심이 됐는가에 대한 답을 가지고 결혼을 결정하는 게 바람직할 것이라는 조언이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그녀의 조언은 현명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녀의 그 뼈 때리는 충고가 내가 허상을 버리고 현실적인 안목으로 남편과의 결혼을 결정하게 된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리고, 3년 반 동안의 연애편지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얼굴 보며 데이트도 해보고, 강도 건너고 산도 넘으면서 그렇게 우리는 졸업을 하게 되었다.  더 깊고 넓은 강, 그리고 훨씬 더 놓은 산이 기다리고 있을 결혼을 향한 여정을 준비하며 나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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