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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essed To Bless Oct 30. 2022

되지도 않는 영문학

절망과 포기의 순간에 일어날 수 있게 해 준 사람들

교양과목 및 일반 교과목을 다 마친 상태였기에 서둘러 전공을 정해야 하는 시점에서 나도, 카운슬러도 난감한 건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녀는 나만큼 절실하지는 않아 보였던 게 다른 점이라면 다른 점이었을까... 저널리즘을 전공해야만 꼭 그 길을 가는 것은 아니라는 먼저 저널리즘 분야에 종사하시던 지인의 위로 아닌 위로와 카운슬러의 제안으로 나는 영문학이라는 전공을 정하기에 이르렀다. 초등학교 2학년 때의 트라우마에 힘입어 이과 쪽과 담을 쌓은 내가 이민자로서 할 수 있었던 선택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었기 때문에 영문학 전공은 두렵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왕 이렇게 정해졌으니 가야만 하는 길이었다. 


영문학 중에서 나의 전공은 여성문학(Women's Literrature)으로 분리되었다. 영어로 들어도 들리지 않는 셰익스피어 작품을 BBC version으로 들어야 했고, 모든 수업에 과제는 주로 페이퍼를 써야 했었다.  내 컴퓨터가 없어서 일을 끝내고 가족 라이드를 마친 후 다시 40분을 운전해서 학교 캠퍼스 컴퓨터실로 달려갔어야 했다. 어느 날은 너무 피곤해서 이모네로 가서 막내 사촌의 컴퓨터를 빌려서 쓰기도 했고, 그렇게 밤새 리포트를 쓰고 나면 녹초가 되었다. 더구나 나의 허접한 글들을 읽고 교정을 봐줄 language department의 서비스는 욕심조차 낼 수 없었다. 젖은 배추 같은 몸을 이끌고 서둘러 집으로 향해 엄마의 직장에 라이드를 드리고는 그날의 수업을 듣기 위해 아침 출근길이라 길이 더 꽉꽉 막히는 고속도로를 달려 다시 학교로 향하는 경우가 일쑤였다. 


무엇보다도 나를 더 힘들게 했던 것은 아무리 발버둥 치고 글을 써보지만 돌아온 건 말하기에도 부끄러운 점수였었다. 의무적으로 들어야 했었던 중세 문학, 미국 문학, 그리고 번역도 힘든 Ghothic Literature 수업을 들었을 때는 정말이지 길이 보이지 않았다. 유난히 명석해 보였던 중국계 2세의 남자 교수는 피나는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글은 도저히 봐줄 수가 없다는 코멘트를 가득 채워 아주 저렴한 점수와 더불어 되돌려주곤 했고, 중세 문학은 안 그래도 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데다가 읽기도 너무 어려워 책을 열기가 겁이 날 정도였다. 


그렇게 늘 쫓기듯이 내가 써낸 페이퍼들이 훌륭했을 리 만무했다. 그리고 몸부림치는 나의 노력에도 아랑곳없이 매번 돌아오는 중세 문학 교수님의 잔인한 말들이 너무도 아파서 소화하기가 버거울 정도였다. 무너지는 성적만큼이나 무너지는 자존감을 애써 붙들며 다시 알바하러 가면서 '이 캠퍼스에는 내가 있을 곳이 없구나..'라는 서글픈 생각이 나를 더욱 힘 빠지게 했었다. 그때의 나는 정말 어찌할 줄 을 몰랐고, 고등학교 때처럼 과연 졸업을 할 수 있을지가 망막했다. 


그러던 중 내 사정을 듣고 딱하게 여기셨던 어떤 집사님께서 교회의 한 사무실 열쇠를 주시며 그곳의 컴퓨터를 써도 좋다고 말씀해 주셨다.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싶으면서 그때부터는 몸이 조금 덜 고되게 페이퍼를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날도 열심히 머리를 쥐어짜며 반 정신 나간 사람처럼 리포트를 쓰고 있었다. 그때 초등학교 때 이민 와서 명문 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법률사무소에 인터뷰를 하러 다니고 있었던 명석한 후배가 내가 있던 사무실을 찾아왔다. 교회와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던 그녀는 모임이 없을 때도 곧잘 교회에 들르곤 했었나 보다.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언니, 뭘 그렇게 열심히 써요?"

"말 시키지 마~ 나 지금 죽고 싶다.."

"언니, 심심한데 제가 좀 읽어봐 드릴까요?"


순간,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정말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 후로도 별다른 일이 없어 바쁘지 않았던 그녀는 나의 마지막 학기의 모든 글쓰기에 훌륭한 편집자가 되어주었을 뿐 아니라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할 때마다 그런 나를 다독여 준 고마운 후배였다. 비록 우등상을 받고 하는 영광스러운 졸업까지는 아니었을지라도 나를 성원해 준 가족들에게만큼은 축하받을 가족의 경사(?!)였다. 누나는 공부에만 매진하라면서 내 마지막 학기에는 더 많이 알바를 뛰어준 동생과 낮에는 세탁소, 밤에는 바느질을 하시며 그야말로 밤낮을 지새우며 일하셨던 엄마, 군대를 마치고 우리 곁에서 가장으로 묵묵하게 자리를 지켜 준 오빠의 성원, 그리고 가족과 떨어져 한국에서 홀로 다시 터전을 일구어 보시려고 애쓰셨던 아빠가 아니었다면 대학 졸업장은 나에게 없을뻔했다. 


저널리즘에 적을 둘 때만 해도 외국어 수업을 해결해야 했어서 시간과 돈을 아껴보려고 한국어 레벨 시험을 본 적이 있었다.(그 당시 우리 학교에서 한국어는 외국어로 채택되었다)  워낙 꿀꿀하게 구겨서 살았었던 때라 뭐라도 해보려고 발버둥을 칠 때였다. 언어학 빌딩에 가서 시험을 신청했고, 듣기, 말하기, 읽기(이해력), 그리고 작문실력으로 나뉘어 시험을 보았다. 손에 잡히지 않고 늘 공중에 떠다니는 것만 같았었던 영어가 아닌 모국어로 시험을 치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설레었다. 그래서였는지 마지막 글짓기 부분에서 나도 모르게 감정을 너무 쏟아낸 것 같아서 뒤늦은 후회가 몰려왔다. '설마 떨어지기야 하겠나' 싶으면서도 전과가 워낙 화려한지라 묘하게 불안해졌다. 비싼 돈을 지불하고 알바도 빼먹고 치러야 했던 이 시험이 패스가 안된다면 너무 좌절할 것 같았다. 드디어 시험 결과에 따른 허가서를 준비해 두었으니 필요한 전공 부서에 제출해도 좋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의 한국어 평가를 심사한 교수님께서 써 주신 편지에는 내가 평생 가슴에 담을 말이 쓰여 있었다. 해도 해도 안 되는 것들만 맞부딪혀야 했던 낯선 이민생활에서 절망을 느껴갈 때였다. 그리 좋지 않은 머리로 공부하며, 체력 또한 별 볼 일 없었던 내가 연신 아르바이트를 뛰면서도 생각했던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일구어야 하는 삶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낯선 땅에서의 끝도 없는 투쟁 같은 이민자의 삶은 어느새 나를 많이 지치게 했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달아 가고 있을 시점이기도 했다. 어지간히 밀어내고 싶었지만 늘 나를 따라다녔던 언어의 장벽과 타국에서 정착해야 하는 나의 미래, 그리고 수많은 이유를 댈 수 있을 두려움들에 압도당해가고 있던 그즈음에 내손에  들려졌던 그녀의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To Whom It May Concern:

    This is to certify that I have given Ms. Yoshim Chang a thorough test of her proficiency in Korean,  examning of all.....Rated on the U.S. Foreign Service Insitutue of scale of 1-5, she recorded a proficiency of level of 5 in all four skills. In other words, she performed at the level of a college-educated native speaker in every category tested. In particular, the essay she wrote on the written part of the examination was beautifully composed and eloquently expressed; it was almost publishable quality.'



그때 캠퍼스를 걸어오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내가 잘하지 못하는 것들만을 들으며 살았던 대학 생활에서 너도 잘하는 게 있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그동안 참고 있었던 무언가가 나를 건드려버려서 교정을 가로질러 걸아가며 오래도록 울었다. 


그 고마운 격려를 끌어안고 버티며 영문학 전공자로서의 끝을 향해 나아갈 때 나를 붙들어 주셨던 두 명의 교수님들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자네의 글은 언어/문화의 차이와 문법의 문제이지 글의 내용에 대한 평가는 훌륭하네. 그러니 더욱 정진하게나."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의 작품에 관해 열띤 토론을 나눌 때 학생 한 명 한 명의 의견을 경청해 주셨던 미국 문학을 가르치신 노교수가 나에게 해 주셨던 따뜻한 말이었다. 여성문학 교수님이 내 주신 한 이민자의 삶을 취재해서 글을 써야 했던 과제가 있었는데, 한참을 고민하며 마땅한 사람을 찾아보다가 우리 엄마를 인터뷰해서 숙제를 한 적이 있었다. 물론 그때도 후배의 도움을 받아 문법과 글을 매만져 준 덕을 보았었고, 그런 내 글의 내용이 교수와 조교의 마음을 뭉클하게 했다며 수업 중에 유일하게 칭찬을 듣기도 했었다.  훌륭하신 어머니를 자랑스러워할 만하다면서 학과동기들 앞에서 낮아질 대로 낮아져 있었던 나의 자존감을 끌어올려 주시기도 했었다. 


그 과제 덕분에 처음으로 엄마의 이민 이야기를 자세히 들을 수 있었고 몰랐던 사실들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그 많은 어려운 시간들을 오직 신앙 위에 딛고 서서는 가족에 대한 사랑과 책임감으로 억척스럽게 인내하고 지켜내신 엄마의 그 고귀한 희생을 내가 어떻게 글로 다 표현할 수 있었겠는가.. 오직 온몸으로 치러낸 그녀의 그 값진 희생이 교수님의 마음을 움직였던 이유였을 것이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의 수고와 배려로, 나는 될 수도 없는 영문학을 전공하게 된 것이었다. 비록 미팅은 일도 못해 본 대학생활이었지만 절망과 좌절을 느낄 때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나아가야 함을 배우며 또 하나의 관문을 통과하는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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