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결혼준비
졸업식도 마치고 양가 인사를 끝낸 후 우리의 결혼 준비는 빠르게 진행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큰 일은 남편이 수술을 해야 하는 일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투석을 받으셔야 하는 아버님을 위해 남편이 자신의 콩팥을 드리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때 아버님은 병원에서 준 호출기, 그때로 말하면 삐삐를 착용하고 다니셨고, 그 용도는 다름 아닌 갑자기 순서가 될 수도 있는 장기기증자의 콩팥을 이식받으실 다음 차례가 되셨기 때문이었다. 당뇨라는 병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던 나는 조금씩 그것에 관해 배우게 되었고 투석을 받으셔야 하는 어려움과 고통도 알게 되었다.
초등학교에 다녔던 어린 두 아들을 뒤로하고 기회의 나라라고 믿고 온 미국에서 고생하시며 가족과 떨어져 사셔야 했던 11년이란 시간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남편 가족에 대해 마음이 아픈 건 사실이었다. 그랬으면서도 그가 이식 수술에 관해 조심스레 말을 건네었을 때, 사실 나는 두 팔 벌려 환영할 수만은 없었다. 그리고 그에 따른 죄책감으로 한동안 괴로워해야 했었다. 그래도 감사했던 것은 친정 식구 어느 누구도 남편의 결정에 반대하거나 싫은 티를 내는 사람은 없었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내가 가족들에게 서운함을 느낄 만큼 친정 식구 모두는 한마음으로 그런 남편을 지지하고 이해해 주었다. 내가 두고두고 친정 식구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 중의 하나다.
수술 당일날 아침, 통역사 대신으로 아버님과 함께 담당 수술 의사와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였다. 이식받으실 아드님의 신장이 아주 건강하고 환자와 잘 맞아서 수술만 잘 된다면 투석하실 필요 없이 앞으로 10년도 거뜬하게 사실 수 있다는 의사의 말에 웃음을 보이셨던 시아버님이 그때는 왜 그렇게 미웠는지 모른다. 먼저 콩팥을 떼어내야 했기에 남편을 수술실로 보내 놓고 아버님이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까지 곁을 지켜드려야 했다. 마음은 그에게 가있으면서 말이다. 아버님도 수술실로 보내드리고 남편의 콩팥을 성공적으로 잘 적출했다는 소식을 들은 몇 시간 후였다. 아직 마취가 풀리지 않아 눈도 못 뜬 채 핏기 하나 없이 하얀 얼굴을 하고 누워있는 송장 같은 남편을 간호사가 병실로 옮겨 왔다. 그때였다. 나도 모르게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마치 그가 죽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두 사람의 수술을 마친 후 의사와 팔로업을 해야 하는 날이었다. 내가 운전사가 되어 두 사람을 태우고 병원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원래 아버님께서 일을 다니시던 곳이라서 뒷길도 많이 아시고 Washington D.C. 지리에 훤하셨을 테니 안 그래도 긴장했을 나의 운전실력이 맘에 들지 않으셨을 것이다. 자꾸 가라고 하는 샛길을 놓치고 있는 내가 못마땅하셨던지
'왜 자꾸 길을 놓치냐? 저 길로 가야 했는데~' 하시며 속상해하셨다.
안 그래도 예비 시아버님을 모시가 가는 길이기도 했고, 시내의 길이 낯설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수술받은 지 얼마 되지 않는 환자 두 사람을 태우고 운전하는 나로서는 여러모로 긴장이 되었다. 그렇게 어쩔 줄 몰라 곤란해하는 나를 보던 남편은 아버님의 거듭되는 참견에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아버님께 화를 냈고 그걸 그냥 넘어가실 수 없으셨던 아버님도 화를 내셨다. 급기야는 신호가 걸린 길에서 차에서 내려버린 남편을 아버님 앞이라 큰소리로 뭐라고 할 수 도 없고 어찌어찌 두 사람을 태우고 병워에 다녀온 적도 있었다.
남편이 다시 함께 살게 된 아버님과의 가정생활이 여러모로 녹록지 않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아무래도 11년을 떨어져 살았던 시간은 가족으로서 새롭게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에서의 갈등을 불가피하게 했을 것이다. 흘러가버린 시간을 조금이라도 되돌릴 수 있을까 해서 남편이 아버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린 결정이라는 것을 알기에 우리 모두에게 유익한 시간으로 돌려받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렇게 우리들의 결혼식을 향한 시간은 여지없이 흐르고 있었다.
둘 다 늦은 20대 후반의 늦깎이 대학졸업생으로서 하는 결혼준비였다. 그래서 부모님에게 가능한 경제적인 짐을 드리지 않고 저렴한 비용으로 해보려고 우리는 머리를 맞대어야 했다. 좀 더 발품을 팔며 더 싼 드레스, 더 착한 가격의 사진사, 신부화장, 함께 살 신혼집 마련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하면 더 간소한 결혼식을 할 수 있을지를 끊임없이 궁리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청첩장만큼은 남편이 멋지게 디자인한 것으로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디자인대로 하려면 청첩장의 비싼 인쇄비 때문에 아쉽지만 포기해야만 했고, 마침 인쇄소를 운영하시던 어느 집사님의 배려로 손님이 쓰다 남긴 카드 제작용 하얀 종이와 봉투를 주실 수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인쇄비는 결혼선물이라시며 흔쾌히 무료로 만들어 주셨다. 별다른 장식 없이, 내가 직접 쓴 간결한 초댓말로 우리들의 심플한 청첩장이 만들어졌다.
인쇄를 마친 청첩장을 가지고 시댁으로 가서 남편과 함께 그것을 부지런히 접고 있던 우리 둘을 물끄러미 지켜보시던 아버님께서는 청첩장 사이에 집어넣는 하얀 종이가 무엇이냐고 물으셨다. 나는 Bridial Registry에 관한 내용을 적은 종이라고 말씀드렸고, 그게 무엇이냐고 물으시는 아버님께 결혼식 부조 대신 우리가 원하는 상점들을 통해 결혼선물을 사서 보낼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버님은 크게 화를 내시면서 왜 부조를 받을 수 있는 것을 선물로 받느냐며 언짢아하셨다. 당신이 그동안 수많은 결혼식에서 부조를 했었는데 아들 결혼식에 선물로 받고 싶지는 않다고 말씀을 하셨다. 옆에서 듣고 있었던 남편은 아버님에게 크게 화를 내며,
"아버지는 결혼이 돈 놓고 돈 먹는장사예요!????"
라며 접고 있던 청첩장을 챙겨서는 문을 쾅 닫고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당혹스러운 상황에 적잖이 놀랐던 나는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라 바쁘게 머리를 굴리고 있었고, 남편의 그런 행동에 더 화가 나신 아버님은 노여움이 쉽게 가시지 않으실 듯 보였다. 순간 나는 아버님 앞에 냅다 무릎을 꿇고는
" 아버님,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아버님께서 초대하실 어르신들에게는 생소하실 수 있으니 저희 친구들과 선후배들에게만 넣어서 보낼게요. 그러니 그건 이해해 주셨으면 해요. 다시 할게요 아버님, 그러니 그만 마음 푸세요..."
라며 우리 엄마 아빠에게도 해본 적 없는 대역 죄인 모드의 모습으로 아버님의 노여움이 가시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때 갑자기 현관문이 확! 하고 열리더니 나가기 전보다 더 화난 얼굴을 한 남편이,
"요심!!, 왜 아직도 거기 있는 거예요? 당장 나와요!"
하면서 문을 다시 쾅 닫고 나가버렸다. 아버님은 도무지 화가 안 풀리셨는지 아님 머쓱해서 그러셨는지 안방으로 들어가 버리셨다. 덩그러니 거실에 남은 나는 나머지 청첩장을 챙겨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남편의 차에 올랐다. 순간 왜 그렇게 눈물이 쏟아지던지...
'내가 이 결혼을 해야 하나.. ' 싶은 생각이 들 만큼 여러 가지로 주체 못 할 감정이 몰려들기도 했었다. 물론 남편은 의도치 않았지만 경솔한 자신의 태도에 대해 사과를 했었고, 다 잘 마무리가 되기는 했었다. 이제는 정말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많은 하객을 바란 건 아니었어도 진심으로 축하받고 싶은 사람들은 꼭 와주었으면 하는 바람은 있었다. 물론 잔치집에는 사람이 들끓어야 제맛이긴 하겠지만 미국에서 손꼽히는 연휴와 결혼식날이 겹쳐 있었던 터라 그렇게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우리의 예상을 뒤엎고 정말 많은 하객들이 참석해 준, 생각할수록 감사하고 잊지 못할 우리 둘을 위한 잔칫날이었다.
우리는 알려진 곳이나 화려한 곳을 선호하지는 않았어서 그때는 관광객이 적고 덜 알려졌던 하와이의 마우이로 허니문을 정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평범한 호텔방이었다. 그래도 허니문이라고 업그레이드를 해 주겠다는 호텔리어의 말에 엄청난 행운이 온 것처럼 좋아하기도 했었다. 대단한 뷰가 있거나 장식이 많은 곳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뭐든 즐겁고 만족스러워하던 우리가 아니었던가.
신혼여행을 앞두고 시아버님께서 사진 많이 찍고 오라며 비싼 카메라를 빌려주셨지만 뭐가 잘못됐었는지 빛바래고 그나마 반쯤 잘린 서너 장 외에 신혼여행 사진도 별로 건진 게 없었고, 안 그래도 짧았던 신혼여행의 반토막을 남편의 귀에 미역이 들어가는 바람에 호텔방에 내내 누워만 있기만 해서 그 옆에서 책만 읽고 와야 했던 사건 사고 많았던 신혼여행이었다.
하지만 그저 함께 할 수 있어서 마냥 행복했었다. 우리 부부는 신혼의 보금자리로 돌아온 후, 이어진 양가 인사, 신혼집 정리, 가장이 된 남편의 첫 출근, 등의 분주한 석 달이 훌쩍 지나갔다. 때론 아득하고 멀게만 느껴졌기도 했지만 그렇게 결혼식의 관문을 지나왔고 우리는 이제 어엿한 부부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