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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essed To Bless Oct 30. 2022

고3 이민자 4

녹두빈대떡을 버려야만 했던 슬픔

나는 고등학교를 재수하는 덕분에(?!) 한국에서 고등학교 졸업을 하지 못한 채 이민을 왔다. 그러니 미국고등학교의 고 3 수험생으로 편입이 되었고, 그 때문에 한국에서와는 다른 수험생 생활을 시작해야만 했다. 대부분의 고3 아이들은 이미 지원할 대학교들 원서를 준비하고 있었고, 또 웬만한 학생들은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이미 원서들을 제출해 둔 터라 이제 막 이곳에서의 고3을 시작하게 된 나는 이런저런 어려움이 많았었다. 원서를 써내야 할 대학교를 물색하기는커녕 일단은 고등학교 졸업을 해야 하는 소박한(?) 목표를 가지고 시작한 학교생활이었지만 그리 만만치는 않았다. 


미국에는 서머스쿨(Summer School) 이란 것이 있다. 지난 학기에 점수가 잘 나오지 않은 학생들이 동일한 과목을 택해서 성적을 올리려는 경우, 또 앞서서 미리 교과목들을 마치고 싶은 똑똑한 친구들의 경우들이다. 내가 살았던 메릴랜드 주는 고등학교 졸업 시 필히 통과해야 하는 functional Test라는 게 있어서 영어, 역사, 사회, 그리고 수학이 어느 정도 수준에 있어야만 교과과정과 더불어 졸업을 하는 자격을 얻는다. 한국에서 성적표를 이적해 온 나의 교과목들은 예상했던 대로 미국 역사, 영어, 외국어 등이 졸업에 필요한 교과과정에 부족했기에 그해 6월부터 가게 된 여름학교에서 들어야 했던 첫 수업이 미국 역사 과목이었다.

 

먼저 60여 명 가까이 한 반이었던 한국과 달리 여름학교라서 더 그랬을지 모르지만 10명 안팎의 학생수와 대부분은 교사의 강의 후에 질문과 토론으로 진행되는 수업 방식에 놀랐었다. 무엇보다 2차 세계대전 당신 다큐 영상을 수업 중에 시청하면서 생생한 그 당시의 역사적인 자료들을 그대로 가감 없이 보여주고 또 가르치는 수업 내용에서 다시 한번 놀랐다. 그러나 문제는 그 수업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던 나의 비참한 영어실력과 그런 나를 도와주려고 애쓰셨지만 역사 선생님과 소통조차 되지 못하는 내가 처한 현실이었다. 


하지만 정말 감사하게도 나와 같은 수업을 들었던 고3 한국인 2세였던 한 친구가 어눌한 한국말로 나에게 도움을 제안해 주었고, 그녀의 노트를 베껴가며 정말 죽기 살기로 내용을 외웠다. 성적이 좋았던 나는 아니었지만 한국 학생들의 위력이라 할 수 있는 암기는 해볼 만했어서 정말 열심히 외우고 또 외웠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시험문제는 객관식이 아닌 주로 주관식이었기에 너무 난감했었다. 하지만 어쩌랴, 그저 최선을 다할 수밖에. 


선생님의 배려로 사전을 쓸 수 있었던 나는 질문을 이해한 후 외운 내용들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문장이든 단어든 죄다 적어 내려가며 최대한 답안지의 여백을 남겨두지 않으려 했다. 60대쯤 되어 보였던 역사 선생님은 나의 사정을 다 알고 계셔서인지 문법도 엉망이었을 테고 무엇보다 내용도 황당했을 나의 답들을 불쌍히 여겨 주셔서 그 수업은 B를 받고 마칠 수 있었다. 그건 분명 나에게 베풀어 준 그분의 넘치는 친절이었고 그것이 미국에서 내가 받은 첫 성적이었다.


그렇게 여름이 지나고 새 학기가 시작하는 9월이 되었다. 당시 이모집에서 같이 살았었던 나는 학교와 그리 멀지 않은 거리 때문에 도보로 등하교를 할 수 있었다. 미드나 영화에서 보았던 노란색의 학교버스를 탈 수는 없었던 게 그때는 서운하기도 했다. 고작 15분 정도의 도보였지만 매일 아침 학교로 향하는 나의 발걸음은 흡사 전쟁터로 가는 듯했다. 한 번도 신어 본 적도 없는 군인의 무거운 군화를 신고 걷는 것처럼  터벅터벅 끌려가듯 그렇게 매일 울면서 학교로 갔다.

 

미국에서는 각 학생마다 정해진 couselor 가 있다. 말하자면 그 학생의 학년이 요구하는 교과과목에 따라 또 수준에 따라 그 학기마다 과목들을 정하고 시간표를 만드는 것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다. 나에게는 항상 두꺼운 검은 뿔테 안경을 코끝에 걸치시고, 주름이 깊은 커다란 눈을 그 안경 너머로 내려다보셨던 Mr. Livingston 이 지정되었다. 50대 후반의 연령으로 보이는 그는 모든 일에 사무적이었고 그저 또 한 명의 시간표 짜주기에 자신의 시간을 쏟아야 하는 게 몹시 귀찮다는 듯이 무미건조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외국에서 공부하다 온 이 고3 아이를 어떻게 졸업시켜야 하는가 라는 게 그의 큰 골칫거리였을지도 모르겠다. 

 

언어의 문제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그와의 대화는 언제나 힘들었고 불편했었다. 그렇지만 그를 만나려면 꼭 학교 사무실의 비서이셨던 서 선생님(Mrs. Suh)을 통해 예약을 해야 했기 때문에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것은 나에게 숨을 쉬게 해주는 것과 같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한국인이셨기 때문이다. 그녀의 첫인상은 다소 차가워 보였지만 내가 어찌할 바를 몰라서 달려간 곳은 언제나 그녀가 있는 사무실이었고 그럴 때마다 바쁘신 중에도 나를 따듯하게 대해주셨다. 그게 얼마나 눈물 나도록 고마웠었는지 서 선생님은 모르셨을 것이다.


미국의 공립학교가 다 그렇듯이 점심시간도 여러 다른 시간대의 시간표를 가지고 있다. 처음 미국행 비행기를 탔었을 때 긴장되어 기내식을 입에도 못 댔을 때처럼 낯선 곳에서의 언어와 환경이 주는 계속되는 스트레스 때문에 음식을 즐길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어느 날, 그런 나와는 다르게 나보다 점심시간이 앞서 있던 동생은, 


"누나~!, 오늘은 피자가 진짜~맛있어. 그거 먹어~~!"


라고 한국말로 외치며 구내식당을 떠나갔다. 그런 그 애가 대견하기도 하고 '제가 나보다 낫네, 잘 적응하고 있구나..' 싶어 감사도 되었다. 그러나 동생이 말한 그 맛있다던 피자가 나에게는 그저 속이 니글거리는 서양 음식으로만 느껴졌을 뿐이었다. 


그렇게 계속 점심을 먹지 못하고 있던 내가 걱정이 되셨던 외할머니께서는 추석을 지낸 다음날, 내가 좋아하는 녹두 빈대떡을 은박지 포일에 싸주시며 점심시간에 꼭 먹으라고 챙겨주셨다. 나는 할머니의 정성도 그랬고 '오늘은 점심으로 한국 음식을 먹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기대감으로 그 빈대떡을 내 사물함에 넣어두었다. 


다음 시간인 생물교과서를 가지러 내 사물함을 열었을 때였다. 마침 옆을 지나가던 몇몇 남학생들이 코를 킁킁대며 어디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면서 수군대기 시작했다. 순간 나의 귓불까지 빨개지는 것을 눈치채게 하고 싶지 않아 황급히 사물함 문을 쾅 닫고는 서둘러 다음 수업이 있는 교실로 향했다. 수업내용이 한 마디도 귀에 들어오질 않는 건 당연했고, 늘 쥐 죽은 듯이 학교에서 지내고 있었던 나였지만, 그때만큼은 용기를 내서 손을 들고는 선생님께 화장실에 다녀오고 싶다고 말했다.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는 당연히 화장실이 아닌 사물함으로 부리나케 달려갔고, 수업 중이라 텅 비어있던 복도였지만 무슨 죄인처럼 주위를 이리저리 살핀 후에야 얼른 녹두 빈대떡을 꺼내 주머니 속에 숨겨서 쏜살같이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는 되도록이면 학교 건물과 멀리 떨어져 있던 휴지통을 찾아 할머니가 나 먹으라고 싸 주신 녹두빈대떡을 던져 버렸다. 그때 빈대떡을 싸고 있던 은박지가 햇빛에 반사되어 유난히 반짝거려 보인다는 생각도 잠시, 휴지통에 처박혀 버려지는 내가 좋아하는 녹두빈대떡이 마치 구겨질 대로 구겨진 내 모습 같아서 잠깐 동안 휴지통 옆에 서서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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