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름이 가져다준 수용과 겸손
1년간의 재수를 마치고 고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집에서 가까운 강남의 한 고등학교였다. 연년생인 남동생은 자신의 동창들과 함께 학교를 다닐지도 모르는 누나를 벌써부터 걱정해 주었다. 그 쪽팔림은 고스란히 나만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로 동생의 마음을 쓰게 만든 한심한 누나의 마음은 더 아팠다. 그렇게 다니게 된 고등학교는 불교재단의 사립학교였다.
일찍 홀로 되셔서 두 딸을 키워내셨던 외할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셨다. 부모님도 다니시지 않았던 교회를 어린 손주들을 이끌고 가주신 할머니 덕분에 교회는 나에게 낯선 곳은 아니었다. 물론 성탄절의 재미난 행사들과 맛있는 간식들, 또 무엇을 하던 놀이터에서 노는 것처럼 살았던 어릴 적 그 시절에는 맛있는 거 주고 재미있으면 장땡이었다. 강남으로 이사 오고 난 후부터는 한동안 교회를 가지 않게 되었지만 중학교도 기독교 학교였어서 채플도 있었고 자연스레 기독교와의 접점은 있어왔던 셈이었다. 그러다가 부모님에게 어려운 상황들이 생기게 되자 처녀 적에는 신자였던 엄마에게 오히려 교회 근처에도 가보지 않으셨던 아빠가 교회에 나가보라는 권유를 하셨다. 때마침 엄마 고향 후배의 개척 소식을 우연히 듣게 되셨고 그렇게 엄마가 다시 나가시게 된 동네 교회에 나도 덩달아 따라가게 되었다.
그런 내가 불교재단이었던 고등학교에 다니게 된 것이었다. 여러모로 꿀꿀했었던 나는, 뭐 선택권이 있던 것도 아니었기에 그저 인문계 고등학생으로 학교에 다니게 된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심학 수업이라는 불교 수업을 들을 때 다른 기독교인 친구들이 갈등하는 것과는 달리 어렵게 고민하지는 않았고 재미있게 귀담아듣기도 했다. 그렇다고 부처님을 사랑하게 될 것은 아니니까 별 문제 삼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심학실에 있었던 방석을 돌리면서 장난을 쳐서 심학 선생님께 긴 대죽으로 꿀밤을 맞기도 했지만 제법 성실하게 불경도 외웠었던 어떻게 보면 개념 없는 고등학생이었다.
재수를 하기는 했어도 그 사실을 굳이 숨기려 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고작 한 살 더 먹은 언니 노릇을 할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그저 중학생 때보다는 말수가 적어졌고, 더 이상 그냥 발랄할 수만은 없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교과서만 빼고 이것저것 손에 잡히는 대로 책 읽는 것을 좋아했던 것은 중학생 때랑 별반 다르지 않았던걸 보면 고등학교에서도 꾸준하게(?!) 공부와 친했던 학생은 아니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낙오의 의미를 곱씹어야만 했던 1년의 시간만큼 성적이 향상되는 터닝포인트의 기회로 삼았다면 좋았으련만 여전히 나답게(!) 쓸데없이(?) 사색하고 무엇이든 읽는 것만 좋아했다. 무엇보다도 더 이상 실패한 사람들을 함부로 깔볼 수만은 없게 되었고, 덕분에 아주 조금은 겸손을 부득이하게 배우는 계기는 되었다. 아무래도 나름 쓰다면 쓴 인생의 첫 실패를 맛보아서였을지도.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