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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essed To Bless Oct 30. 2022

첫 실패

넘지 못한 턱걸이

소위 말하는 강남의 8 학군에서 성적에 관계없이 오로지 뺑뺑이로 우수한 중학교에 들어간 나는, 학교 매점의 저렴하고도 맛있는 햄버거를 특히 좋아했다. 쉬는 시간 종종 친구들과 함께 매점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던 이유 중 하나였을 정도다. (체력장에서 100미터 달리기를 그렇게 열심히 했더라면 기본점수를 받지는 않았었을 텐데...ㅎㅎ)  수업시간에도, 집에 돌아와 앉은 책상 앞에서도 정석을 풀거나 영어 단어를 외우기보다 엉뚱한 상상을 하기가 일쑤였고, 라디오를 들으며 신청곡을 틀어달라는 엽서를 밤새워 심혈을 기울여 만들곤 했다. 그저 친구들과 도시락 나눠 먹고 깔깔거리며 지냈던 나는 그렇게 공부 빼고는 꽉 차게 행복했었던 중학생이었다고 기억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 친구들의 조합은 참 재미있다. 유유상종이란 말이 있다. 성적도, 성격도, 외모도(?!) 서로 비슷한 사람끼리 어울려 다닌다는 말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 때도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을 보면 그렇게 유유상종은 아니었다. 특히 성적이 그랬고, 중학교 때 친구들이 그랬었다. 


전교에서 상위권이었던 친구들도 몇 명, 유머 있고 인기도 많아 연예인처럼 펜레터를 받았었던 친구, 독특하게 말하고 독특하게 생각하는 친구였는데 급기야는 머리와 복장 단속을 엄격하게 했던 학교에 반항하듯 남학생처럼 빡빡머리로 깎고 등교했던 친구, 유난히 얼굴 하얗고 수줍음이 많았던 친구, 한국말을 배우기 위해 미국에서 왔던 교포 친구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제각각 다 달랐지만 모두들 마음이 잘 통했고 무엇보다도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했기에 친구로 지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다들 어디에 살고 있을지... 갑자기 그때 그 친구들이 보고 싶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고등학교에 갈 시기가 되었다. 그때는 고등학교 입학시험인 연합고사라는 게 있었던 시절이었다. 커트라인이 있어 그 점수 안에 들어야 인문계 고등학교를 갈 수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의 그 사건(?!) 이후로 산수와 담을 쌓아버린 나는 국영수가 과목의 전부였던 학교, 그것도 강남의 팔 학군에서의 내 성적표가 무난했을 리 없었다. 그렇다고 소위 말하는 날라리도 아니었지만 공부에 목숨을 걸었던 모범생은 더더욱 아니었다. 부모님께 성적표를 드릴 때마다 등수에 민감하셨던 대부분의 강남 부모님들과는 다르게 성적에 막 닦달하시거나 그래서 나를 크게 꾸중하시지도 않으셨다. 지금 생각하면 죄송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하다. 아마 나쁘지 않은 머리를 가진 오빠에게 기대를 몰빵하셨거나 설마 고등학교는 가겠지.. 하셨을지도. 


고등학교 입시라는 부담을 뒤로하고 친구들과 보낸 추억은 지금 생각해 봐도 참 좋았다. 가을이면 유난히 아름다웠던 교정을 뛰어다니면서도, 방과 후 떡볶이집이나 햄버거를 사 먹으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종알댔다. 때로는 공부하는 줄 철떡 같이 믿으신 부모님께서 주신 간식을 받아먹으면서, 또 해가 어둑해져 깜깜해진 동네 놀이터에서 함께 나눴었던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날 줄을 몰랐다. 지금에서야 우스울 고민 들이었겠지만 그때만큼은 꽤나 진지했고 나름 심각했었다. 우리는 함께 웃고, 함께 울고 그렇게 참 많은 비밀들과 예쁜 추억을 공유한 중학생으로 살았었다.


그랬던 우리들에게 드디어 결전의 날이 왔고, 연합고사를 마쳤다. 그리고 합격자 발표날은 나에게만큼은 선명한 기억으로 남겨지게 된다. 선생님이 호명하실 때마다 두근거리기는 했지만 '설마 나는 아니겠지..' 하는 마음으로 마지막 한 장의 합격자 통지서가 담임선생님의 손에서 다른 학급 친구에게 전해졌을 때의 나의 절망감을 말로 다 할 수 없다. 생각해 보면 날 뭘 믿고 그렇게 공부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엄마가 사주신 책들과 청소년 세게 문학전집은 두꺼운 표지가 닳도록 읽고 또 읽긴 했어도 교과서와는 영 친해지질 않았었다. 어쩌면 나의 실패가 그리 놀랄 일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발표가 있었던 그날, 이 소식을 어떻게 가족에게 말해야 할지 몰라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기가 얼마나 힘들었었는지...  그 순간만큼은 내가 보냈었던 3년이란 시간들을 나름 열정적으로 고뇌하며 알차게(?!) 살아왔었던 중학생의 꽤 진지한 삶이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건 그저 쓸데없이 낭비된 시간들이라고 치부되어도 할 말이 없을 것만 같았다. 많이 겸손한 성적이긴 했지만 고등학교를 걱정해야 할 만큼은 아니라고 믿었던 내가 한심하기까지 했다.  


낙방의 소식을 들은 가족들 중 어느 누구도 한동안  나에게 말을 걸어오지 못했다. 오히려 내 눈치를 보며 나를 피할 뿐이었다. 출장을 가시기 위해 문을 나서던 아빠의 깊은 한숨과 유난히 내려앉으신 어깨가 잊히지 않는다. 엄마는 서둘러 수소문해서 알아보신 고입 학원에 나를 등록시키셨다.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 멀지 않은 강남의 8 학군 고등학교들의 정거장들을 다 지나가고도 하차하지 않은 나를 버스 안에서의 승객들이 쳐다볼 때면 정말이지 쥐구멍을 찾아 들어가고 싶을 만큼 괴로웠다. 고등학생이 되었어야 할 나는 학교가 아닌 입시 학원으로 향하며 날마다 나 자신을 자책하며 지냈었다. 그때의 실패는 오랫동안 낮은 자존감으로 나를 힘들게 했고, 그렇게 시작한 학원생활은 처음 청량리에서 강남으로 이사 왔을 때만큼 낯설었다.


여자 중학교에 다녔던 나에게 더 힘들었을지 모를 남녀 합반을 비켜간 것은 적어도 내게는 참 다행스러운 것이었지만 스파르타식 학원의 학습과 공공연히 행해졌던 많은 채벌의 경험은 구겨질 대로 구겨진 자존심에 커다란 스크래치를 남겼다. (전보다는 훨씬 나아진 거라고는 들었지만 말이다) 여러모로 삐딱했던 나에게 학원의 환경들이 다 힘들게 느껴졌었다. 다른 것보다 나도 실패한 주제에 학원 남학생들이 우리 교실을 기웃거리며 시답잖은 장난을 칠 때마다 그 친구들을 내심 깔보고 업신여겼었던 미성숙한 나의 내면을 보는 게 가장 힘든 일이었다.


분명 내 인생 흑역사의 한 지점이었을지는 몰라도 그곳에서 좋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던 건 결코 흑역사와는 무관하다. 우리는 비록 다양한 이유로 성적이란 턱걸이에 걸려 그곳에서 지내게 되었었지만 꿈 많고 낭만을 지키고 싶었던 평범한 고등학생이 되지 못한 실패자들만이 나눌 수 있는 무언가가 우리를 서로 다독이게 했다. 내면이 아름다운 그들과 친구로 함께 할 수 있어서 안 그래도 자존심이 너덜너덜해진 어린 나에게 친구들은 유일한 위로이자 부끄러움의 시간을 견딜 수 있게 해 준 고마운 순례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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