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리와 강남의 간격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 나의 첫 집은 청량리라는 동네였다.
물론 그전에 살았던 곳들도 있었다고 들었지만 내 기억 속에는 없다. 큰길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오른쪽으로 부드럽게 경사진 언덕을 조금 올라가면 왼편에는 널찍한 앞마당이 있는 교회가 있었다. 그 완만한 둔덕을 어른 보폭으로 스무 발자국쯤 더 가다보면 왼쪽으로 난 첫 번째 길이 있는데 그 어귀쯤에 몸집이 제법 큰 아카시아 나무 한 그루가 서있었다. 친구와 손을 잡고 팔을 뻗어보지만 안을 수 없었던 그 아카시아 나무를 끼고 얼마 못 가 오른쪽으로 우리 집이 있었다. 푸르른 여름이면 향긋한 아카시아 냄새가 골목을 가득 메웠고, 그 잎을 따서 꿀도 빨아먹고 하얗고 탐스런 아카시아꽃을 입안 가득히 넣고는 오물거리며 친구들과 맛있게 먹기도 했었던 기억이 있다.
깔끔하고 단정하셨던 엄마는 매일 아침 늦잠을 잔 나의 머리를 예쁘게 땋아 주시는 것을 잊지 않으셨다. 동네가 같아서 같은 학교를 다녔던 사촌과 찍은 입학식 사진을 볼 때마다 엄마가 보기 좋게 손질해 준 나의 헤어스타일이 꽤 마음에 든다. 그렇지만 그 사진은 나에게 불쾌한 기억을 떠오르게도 한다. 우리 집에는 사진기가 없었고 그때만 해도 입학식이나 졸업식 시즌이 되면 사진사 아저씨들이 돈을 받고 사진을 찍어주시곤 했었다. 우리 둘에게 축 입학이라는 동그란 화관을 들려주신 후 몇 걸음 물러나서 사진을 찍으시려다 말고는 저벅저벅 나에게 걸어오시는 게 아닌가. 그리곤 당신의 손가락에 침을 바르시더니 내 이마를 덮은 잔머리가 지저분해 보인다며 이마 위에 머리칼을 연거푸 쓸어 넘기시던 그 사진사 아저씨의 손길이 너무 불쾌했었다.
이 기억이 지금까지도 왜 이토록 선명한 건지, 그리고 그때 나는 어째서 "싫어요!"라고 말하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짧은 청색 치마에 가슴 왼편에 작은 무지개가 수놓아 있었던 남색 셔츠를 받쳐 입고 그 위에 각이 살아있는 재킷을 입혀 보내셨던 엄마의 코디는 흡족했었고, 그건 나의 유일한 초등학교 입학식 사진이 되었다. 그렇게 시작한 초등학교 1학년의 나는 아무것도 한 거 없이 유난히 나를 예뻐해 주셨던 담임선생님 덕분에 순조롭고 무난한 학교생활을 했었다. 그리고 1학년이 끝나갈 무렵, 아빠는 우리는 강남으로 이사를 갈 거라고 말씀하셨다.
특출하다거나 대단히 성적이 좋았던 것도 아니었을 그래 봐야 초등학교 일한 년이었던 내가 전학 가는 날에, 나를 안아주시고 내 얼굴을 쓸어주시며 너무나 서운해하셨던 성함도 모를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인 그녀의 그 마음씀이 이사 후, 내가 옛 동네를 많이 그리워하게 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나중에 들은 우리 집이 이사 간 이유는 조금 당혹스러웠다. 여느 때처럼 퇴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시던 아빠가 골목길에서 놀고 있던 오빠가 욕을 하고 노는 것을 보시고 크게 충격을 받으셨다고 했다. 안 좋은 동네 환경 때문이라고 생각하셨던 아빠는 주위 사람들의 권유로 그렇게 강남으로 이사를 하게 된 것이었다.
즐비하게 늘어서있었던 키가 큰 아파트들을 마치 시골쥐가 서울에 상경했을 때처럼 신기한 듯 올려다봤었다. 주로 집 근처 땅바닥의 흙들을 나뭇가지로 긁어내서는 그것을 손으로 꾹꾹 뭉쳐 밥을 짓기도 하고, 굴러다니던 빨간 벽돌을 돌멩이로 빻아 고춧가루를 만들어 잡초와 버무려 놓고는 김치라며 소꿉놀이를 하고 놀았던 나였다. 출근하시는 아빠가 잔돈을 주실 때면 허름한 동네 구멍가게로 쏜살같이 달려가며 어떤 군것질거리를 고를까 하늘만큼 땅만큼 행복해하면서 말이다. 그랬던 나는 새로 이사 온 강남의 아파트 단지에서 롤러스케이트나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놀던 아이들을 보며 말 그대로 문화적 충격을 받았었다. 저녁상에서 밥을 푸시며 물가가 비싸다고 투덜대시던 엄마의 불평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우리 삼 남매는 맛있게 밥을 먹었었다.
이제 막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나에게는 여러모로 긴장하게 만드는 학교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채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어린 나였지만 여전히 그 선생님의 성함을 기억하고 있을 만큼 지금까지도 나에게는 내 인생에서 가장 모욕적인 사건으로 남아있다.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학교와 또 새로운 많은 것들로 여전히 낯설어하던 나는 그날 산수 시험을 본다고 더 긴장을 했었던 터였다. 그날따라 일찍 시험을 끝낸 나는, 물론 그러면 안 되었지만 옆자리 친구가 보란 듯이 펼쳐 놓은 그의 시험지에 나도 모르게 눈길이 가버렸다. 이미 나처럼 시험을 다 마친 그 아이는, 웬일인지 제출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었다. 아직 반 친구들을 잘 알지 못했던 나였지만 제법 공부도 잘할 것 같은 그 아이의 인상을 믿은 나는 내가 썼던 답과 비교해서 맞춰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 답들이 그 아이 것과 대부분 달랐었다. 순간 급 자신이 없어진 나는 서둘러 답들을 고치고 나서 선생님에게 시험지를 드렸었다. 그러자 그 담임 선생님은 내 시험지의 답이 죄다 틀렸다시며 탁자 위에 있던 출석부를 냅다 들어서는 내 머리통을 휘갈기셨다. 이런 표현을 쓰고 싶진 않지만 말 그대로였다. 그녀가 온몸으로 내리꽂은 힘에 밀려 안 그래도 체구가 작고 말랐던 초등학교 2학년 생 꼬맹이었던 내 몸이 죄다 부서져 버리는 것만 같았다. 그날 아침, 엄마가 정성스럽게 빚어 주신 머리에 꽂아주셨던 예쁜 머리핀이 마치 폭탄의 파편처럼 교실 바닥 저만치 날아가 버릴 정도였다. 나는 그 머리핀을 주울 생각도 못한 채 황급히 내 자리로 돌아왔어야만 했다.
화끈거리는 볼과 띵한 머리, 그리고 웅성거리는 교실의 분위기와 모든 시선이 나에게 멈춰 있었던 것만 같은 그때 그 기억은, 지금도 몸이 떨릴 만큼 언제 떠올려도 수치스럽고 부끄럽다. 내가 보고 쓴 시험지의 주인공인 그 아이는 내가 머리통을 가격 당한 몇 분 후, 담임 선생님께 잘했다고 과하게 칭찬을 받은 불가사의한 일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당연히 그 아이에게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혼자 집으로 돌아오면서 얼마나 울었던지... 지금까지도 엄마에게 말하지 못한 강남으로 이사하고 나서 벌어진 상처뿐인 아픈 기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