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전에 없이 부쩍 체력이 달리는 요즘이다.
예전보다 마음먹은 만큼 몸이 따라주질 않고 그래서인지 계속 누워만 있고 싶은 일상을 보내고 있다. 아무래도 둘째 아이 대학교에 떨구어 주고 오느라고 버몬트로 왕복 20시간, 또 용무가 있어 보스턴을 다녀오느라 12시간, 그리고 친정 부모님 댁으로 메릴랜드 5시간의 연이은 장거리 운전을 했던 지난 석 주의 여파이지 싶다. 그렇다 손 치더라도 이번에는 후유증을 제대로 겪으면서 변해가는 체력의 한계를 만나는 게 그리 기분이 좋을 리 없다. 잠시 우울했다.
며칠째 맥 놓고 힘들어하고 있는 내가 걱정이 되어 보였던지 아이들이 엄마는 그냥 쉬고 있으라며 굳이 나를 안방으로 밀어 넣는다. 큰아이의 진두지휘 아래 이제 막 중학생이 된 막내까지 부엌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며 제법 철든 자식 노릇을 하느라고 애쓰는 모습들을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진다.
쉬어보려고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다가 며칠 전 큰 아이가 내게 한 말이 떠올랐다. 마치 생선가시가 목에 걸린 듯 마음 한 귀퉁이에 박혀서는 영 편해지지가 않는다. 자꾸만 다시 꺼내서 생각해 보게 한다. 자기들도 이제 다 컸으니 엄마도 좀 쉬고, 자기 시간도 가지고, 그랬으면 좋겠다고 토닥거리듯이 해준 말이었다.
어느새 네 아이들도 훌쩍 자라 하나부터 열까지 내 손이 필요한 시기는 지났으니 오히려 감사할 일임에도 이런저런 생각들로 자꾸만 복잡해지는 건 왜일까? 남들 다 가는 오십 고개를 오르면서 내심 무난하게 지나고 있다고 안심하고 있었는데... 요 몇 주 컨디션이 좋지 않은 몸뚱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엉켜버린 생각들로 복잡해진 마음의 빗질이 쉽지 않다.
열아홉에 이민 와서 스물여덟에 결혼하고 스물다섯 해 동안을 아내로, 엄마로 살아온 시간들을 멈춰 서서 생각해 보게 되는 요즘이다. 어떻게 보면 그럴 마음과 시간의 여유가 생겨준 것이기도 하니 고맙기도 하다. 가정에서 주부로 살아온 삶을 "치열하게"라고 써도 되나 싶지만 뭐 그렇게 살았다고 믿기 때문에 그렇게 쓰자.
누구나 다 처음인 인생을 살아가는 거겠지만 전에는 들을 때 귓구녕에도 들어오지 않았던 단어 갱년기.. 폐경기를 몸으로 살아내는 인생의 계절이 나에게도 찾아왔다. 그렇다고 그저 허허로운 시간으로 흘려보내고 싶지는 않은데 말이다. 그래서 생각했다. 남편이 여러 번 격려해 주었던 글을 써보자고.
어쩌면 가장 가깝고 익숙한 나여서 미처 잘 살펴봐주지 못했던 스스로를, 내 시간들을 되돌아보면서 어루만져 주고 싶어졌다. 이 즈음에서 정리하면서 좀 쉬어가도 나쁠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살아왔고, 내가 기억해 낼 수 있는 내 삶의 책장을 넘기면서, 비록 남들은 일도 궁금해하지 않을 "나의 이야기들"을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들려줄 수는 있겠다 싶었다. 이런 별스런(?!) 상 주기를 생각해 낸 나, 칭찬한다. (ㅎㅎ)
마치 오랜만에 다시 만난 옛 친구에게만큼은 그동안 지내왔던 이야기를 서슴없이 편하게 풀어놓을 수 있는 그런 마음이라면 그리 쑥스러워할 이유도 없겠다.
한국에서의 삶, 미국으로의 이민, 졸업, 결혼, 출산, 육아, 그리고 지금은 중년의 계절을 지나가고 있는 내 삶이, 어쩌면 그만그만한 보편의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여러 번 주저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나만이 끌어올려 낼 수 있는 무언가가 분명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으로 지나간 시간들을 꺼내보기로 했다.
그렇게 맘을 먹고 나서 그 안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마음이 벅차오른다. 내 삶에 찾아왔던 사람들,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생각 나는 소중한 말들, 아팠던 말들.... 그 세월 속에 스며있는 행복, 눈물, 감사, 고뇌, 실패, 두려움, 격려, 아픔, 외로움, 후회.... 그렇게 어느 것 하나 버려서는 안 될 삶이 내게 준 값진 보화들로 가득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과연, 나는 무엇을 이룬 것이 있을까?..'
라는 생각으로 문득문득 쓸쓸했던 요즘이었는데 그런 나를 멀찍이 떨어져서 넌지시 바라보자니 영글어가는 내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조금 새삼스럽긴 하지만 어찌 됐든 이런 결심을 하고 보니 이제는 제법 설레기까지 하다. 그동안 열심히 살았고 수고했던 나에게, 따듯하게 말을 걸며 바라봐주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