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은 멈춰도 나는 살아야하니까

by 틈하나

"내게 있어서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애쓰는 시간들이 쌓이고 쌓이다가 결국 죽음으로 가는 것.

그것이 인생이었다. 나의 평판을 위해 애쓰고, 나의 생계를 위해 애쓰고, 나의 건강을 위해 애쓰고...

그 끝에 행복이 있어야 하는데 희한하게도 대부분 불행이 있었다. 중요한 것이 스윽 빠져나가고 허울만

남은 느낌" - 김아영의 <모든 걸음에는 이유가 있다> 중에서 -


방송작가로 살아온 시간이 20년이 넘었다. 서브 작가로 일하던 시절, 하루하루는 그야말로 전쟁이었다. 아이템을 잡고, 구성안을 짜고, 대본을 쓰기까지 모든 과정이 시간과의 싸움이었고, 결국엔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어떤 날은 노트북만 켜놓고 멍한 상태로 한 줄도 쓰지 못한 채 새벽을 넘기기도 했고, 어떤 날은 결과가 두려워 도망치고 싶었고, 그렇게 간신히 하나를 끝내면 그 다음을 걱정해야 하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숨 돌린 틈도 없이 달렸던 시간이었다.


메인 작가가 된 된후엔 또 다른 싸움이 시작됐다. 이제는 프로그램 전체를 책임져야 했다. 방향을 잡고, 제작진을 이끌고, 방송의 완성도를 끌어올리 일. 후배 작가들의 원고를 수정하면서 '내가 이 말을 이렇게 바꿔도 될까?' 하는 수없이 많은 감정이 오갔다. 누구보다 냉정하게 판단하면서도 끝내 미안함이 남는 일이었고, 그럼에도 더 냉정해져야 하는 시간들이 나를 힘들게 했다.


서브일 땐, 내가 내 일만 잘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메인은 달랐다. 언제나 예민하게 흘러가는 사람들 사이의 공기 속에서,

말 한 마디, 표정 하나에도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책임감, 부담감, 죄책감, 미안함, 두려움...

그 모든 감정이 하나 둘 쌓여 오히려 모든 게 무덤덤해질 때쯤 읽게 된 책 한 권.

김아영 작가의 『모든 걸음에는 이유가 있다』


"물은 마셔도 다시 목마르다. 한가득 마신 다음에는 더 이상 목마르지 않을 것 같지만, 한 시간만 지나도 우리는 자연스럽게 물을 찾는다. 승자는 경주마처럼 달리다가 생긴 갈증에 몸부림칠 것이고, 패자는 아무것도 얻지 못해 생긴 갈증에 허덕이겠지. 가진 것을 잘 지켜내는 것도 참 수고스러운 일이라는 걸 말해주는 사람은 잘 없다."


나는 늘 다음을 향해 뛰어왔다.
더 많은 걸 해내야 하고, 더 잘해야 한다고 믿으며. 그래야 살아남는다고, 그래야 인정받는다고.

그런데 돌아보면, 나는 늘 목말랐다.

뭔가를 해냈을 때도, 칭찬을 받았을 때도 잠시 시원해졌을 뿐.

곧 또 다른 갈증이 밀려왔다.


"무엇 하나 지나칠 수 없는 일상을 살아내는 중인데도 자꾸 더 나아가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언제 행복해질 수 있을까?"


이 문장을 읽으면서, '나는 지금 행복한가?' 스스로에게 물었다.


너무 오랜 시간, 나는 ‘멈추면 안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모든 걸음엔 멈춤이 필요하고, 멈춤 뒤에 따르는 '쉼'을 마주하는 순간도 필요하다는 걸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내가 선택한 이 길이 누군가에겐 꽤 그럴싸해 보일지 몰라도,

그 안에서 나는 얼마나 버티며 살아왔는지 나만큼은 알아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앞으로만 달리느라, 나는 나를 얼마나 놓치고 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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