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바쁘다. 아이는 나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악을 쓰고 손에 잡히는 모든 물건을 던진다. 영유아 키우기는 시기 별로 봉착하는 어려움들이 있다. 새벽에 다섯 번 깨기, 밥 뱉어버리기, 부모 때리기, 안아달라고 조르기…. 도장 깨듯 열심히 달려가도 다음 챕터가 보란 듯이 기다리고 있다. 아들 내외를 도우러 먼 지방에서 서울로 온 시어머니도 손자의 행패(?)에 혀를 내두르고 일주일 만에 짐을 싸셨다. 남편은 그런 어머님께 간곡히 부탁했다.
"선우를 조금만 키워주실 수 있을까요? 둘 다 회사 다니며 키우기가 너무 힘드네요. 아버지랑 상의 부탁드려요."
시부모님은 수락했고, 우리는 어른들의 배려와 희생으로 패를 쥐었다. ‘육아 프리패스권’. 유치원 또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우리의 삶에 온전히 매진할 수 있는, 그 어떤 프리패스보다 간절했던 것. 그런데 어쩐지 쌍수 들고 아이를 맡겨버릴 수가 없다. 아이를 곁에 두기도 죽을 만큼 힘든데 멀리 두자니 더 힘들다. 어느덧 엄마가 된 거다. 전입신고, 어린이집 이전, 옷가지와 장난감들을 택배 편으로 보낼 프로세스까지 모두 구상해놓고도 실행 버튼을 누를 수 없다.
‘한 번만 더 참자. 여기서 포기하면 난 실패한 부모다’
내가 나약한 것인지, 우리 애가 누가 봐도 까다로운 것인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무언가에 대해 객관적 평가를 내리려면 비교군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식만 키우는 평범한 부모들은 이 ‘비교군’이라는 것이 없다. 담 너머 바라보는 남의 집 자식들은 키워본 적이 없으니 온전한 비교군이 아니다.
그래서 어린이집 선생님들에게 물었다. 영유아를 가장 많이 키워 본, 육아의 달인들. 선생님께서 보시기에 우리 애는 어떤지. 꾸밈없이 솔직하게 말해달라고 했다. 선생님은 다소 난감한 기색을 보이시더니 나를 어린이집 안으로 들이고는 꽤 솔직한 평을 전해주셨다. 종합해보자면, 어린이집에서 쫓겨날 만큼 폭력적이진 않지만 무난한 아이는 아니라는 평.
오늘도 결정하지 못했다. 내일도, 모레도 이러한 상태가 유지될 것이다. 언제 행사할지 모르는, 그러나 1년 이내로 만료될 육아프리패스권을 일단은 덮어둔 채. 어떤 선택을 할지 나 자신도 모르겠다. 최선을 다하는 하루하루가 쌓이면 봐줄만한 미래가 되겠지, 자식도 그렇겠지. 이것이 현재의 내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스탠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