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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영 Mar 06. 2024

선한 자들의 소름끼치는 무관심과 침묵

일상과 사색

주말에 영화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를 보았다.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1950~60년대의 미국 내 흑인차별에 대한 내용을 드라마로 담은 것으로, 1990년 아카데미상 작품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영화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 중


 나에게 영화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이 있는데, 영화 후반부에 나오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 나오는 부분이었다.


"변화의 시대에 가장 슬픈 비극은 악한 자들의 폭력과 독설이 아니라 선한 자들의 소름 끼치는 침묵과 무관심입니다."


 영화에서는 흑인 차별이 부당함을 알면서도, 침묵하는 백인들에 대해 일갈하는 메시지로 사용되었다.

 



 우리 대다수는 사회에서 선한 자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으며, 악인들은 뉴스에 나오는 소수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스스로는 나름 도덕적이며, 사회규범과 질서를 잘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


 그렇기에 뉴스에서 나오는, 또는 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빌런들을 보면서, 욕을 하거나 비난하지만,  일상으로 복귀 뿐, 나서서 계도하거나 저지하지는 않는다. 괜히 나섰다가 경을 칠 수 있기도 하고, 일이 커졌다가는 법적인 도움을 받기조차 어려워질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 그럴 수 있다. 내가 살아남는 것이 중요한 시대니까..


 그 사이에 오늘도 어떤 악인들은 법을 우습게 여기며 이곳저곳에서 사건사고를 내고 있고, 어떤 악인들은 법 위에 군림하면서, 그들의 무리에 있지 않은 자들에게 이중잣대를 디밀고 있다. 그러한 '부조리'들은 이제 어색하지조차 않아, 굳이 피곤하게 그런 뉴스를 보는 것보다는 채널을 다른 곳으로 돌려서 재미있는 소식들이 가득 찬 곳으로 시선을 돌리기 마련이다.


 나는 선한 자니까(라고 생각하니까) 언젠가 기회가 될 때 행동하리라고 마음을 먹고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 그 시간에, 기회는 이미 나도 모르게 여러 번 지나쳤을 수도 있고 말이다.


 그런 와중에 영화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에서 나온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선한 자들의 소름 끼치는 무관심과 침묵' 연설 부분을 들었을 때, 뭔가 띵하게 머리를 치는 느낌이 왔다.

 지금은 1960년대보다도 더 빠른 변화의 시대. 

 비단 인종간 갈등뿐 아니라, 또 다른 갈등들이 여기저기에서 튀어나오는, 그러면서도 침묵하는 것이 익숙해진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일 수 있다.


 문제가 있더라도 사회가 발전할수록 다양한 갈등들이 생기기 마련이고,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겠지라던가, 누군가 나서서 하겠지라고 생각하 침묵하는 사람들의 시대에, 60년 전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은 다시금 곱씹어볼 만하지 않은가 싶다.


 영화갈등이 깔끔하게 해소되었다기보다 적어도 나에게는  약자로 비추어지는 사람의 양보와 시간이 쌓아준 우정으로 손잡, 아름다운 결말이 강요된 드라마 마무리된다.

 하지만, 현재를 사는 우리들 여러 문제와 부조리에 관심을 기울이고, 고민하고, 작게나마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실행을 함으로써 비로소 '선한 자들의 소름끼치는 무관심과 침묵'으로부터 벗어나 영화보다는 나은 엔딩으로 향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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