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과 진지 사이
살다 보면 용서를 해야 할 일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용서의 대상이 어떤 행위를 했는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용서는 신의 은총에 따른 사랑의 실천이며, 자비의 표출이고, 이기심을 버린 상대방에 대한 배려의 결과물이다.
용서는 상대가 어떤 일을 저질렀든 그 상대가 나의 용서를 통해 선에 다가가거나, 다시는 그 행위를 하지 않도록 함에 대한 희망을 갖고 하는 숭고한 행위일 것이다. 그래서, 많은 선현들이라던가 책에서 용서를 인간이 행할 수 있는 미덕 중 하나로 칭송을 할 것이다.
그러나, 간과하면 안 될 것이 있다.
인간은 이기적 본성을 갖고 있으며, 학습하는 동물이라는 점이다.
용서를 할 때에는 언급한 것과 같이 다시는 그 행위를 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겠으나, 진의를 깨우치지 못하거나, 이기적인 마음이 남아있는 경우에는 이 정도는 용서가 되는구나라는 부정적 학습효과로 인해 역효과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메타인지가 부족하면서 이기심이 있는 존재의 관점에서, 용서를 통한 부정적 학습효과는 실패에 대해 어느 수준까지가 용서가 되는지에 대한 측정의 사례가 되며, 상대방이 어느 부분에서 나약함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점이다.
즉, 저지른 행위를 부정적으로 내면화하지 않고, 학습을 통해 행위를 보완하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마치 게임에서 스테이지를 깨고 나갈 때, 어디가 취약하고 다음에는 어디를 공략하면 될지에 대한 것을 습득하듯이 말이다.
이것은 사회생활 또는 아이들의 훈육에 대한 이야기일 뿐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관계에서 용서(관용)의 결과로 배신을 당한 사례는 역사에서도 볼 수 있다. 관점에 따라 다른 의견들도 있을 수 있겠으나, 로마의 줄리어스 시저가 정적관계가 될 수 있는 브루투스에게 호의를 베풀었음에도 배반을 당한 일이라던가, 인조가 광해군의 장수였음에도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좋은 공직으로 후사하였음에도 불만을 갖고 일으킨 이괄의 난을 보면, 용서는 인간의 본성과 관계의 복잡성을 고려해 신중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다.
가까이는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에도 있다. 어두웠던 일제강점기 또는 국민이 주인이 아니던 시대를 지나 역사의 중죄인들에게 베푼 관용의 결과로 대한민국이라는 것에서 떼어내지 못하는 종양과 같은 것이 되어버렸고, 그 종양의 씨앗들이 이곳저곳에 퍼져버린 결과는 모두들 알고 있을 것이다.
간디는 '약한 자는 용서할 수 없으며, 용서는 강한 자의 특징'이라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명백히 드러난 이기심과 죄에 대해서는 내가 내면의 약한 자인지 강한 자인지가 중요하지 않다. 어설픈 용서로 일시적인 자기 안도와 만족을 가질 수는 있겠으나, 이제는 단호한 결정이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후대가 우리를 용서할 길이다.
그렇지 않다면, 상황과 형태는 다를지언정 역사는 반복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