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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진리는 대중에게 어떻게 전파되는가?

사색과 진지 사이

by 오영

만일 신이 있다면, 그 신이 진리이며, 절대선이라고 가정하면, 그 신의 진리는 대중에게 어떻게 전달되고 확산될까?


나는 무신론자, 정확히는 불가지론자로써 최근 특정 종교에서 우리나라의 이슈에 대해 깊숙이 개입하는 것에 대해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던 차에, 얼마 전 인공지능과의 대화에서 인공지능이 발명된 것인가, 발견된 것인가라는 화제의 영상을 본 후, 이 두 가지의 내용에 대해 결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것은 진리라는 것이 있다고 할 때, 그리고 그것이 신의 의지에 의한 결과물이라고 가정할 때, 인간의 인지영역 밖에 있는 진리라는 것이 어떤 과정을 통해 인간사회에 어떠한 형태로 전파될까라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내 의지보다도 더 깊이 의식 속에서 프로세싱이 되었는지 주말의 꿈속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드라마와 같이 전개되었고, 깨어나서 생각난 김에 여러 고민들을 챗GPT와 대화형식으로 주고받았다. 그리고 그 결과를 정리해 보았다.


먼저 진리라는 것은 무엇인가를 간략히 정의해 보자.


진리의 사전적 의미는 명제가 사실에 정확히 들어맞음 또는 논리의 법칙에 모순되지 아니하는 바른 판단이라고 한다. 다른 의미로 거짓이 아닌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진리는 변하는 것인가 라는 질문을 해본다면, 진리는 사회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변화해 온 부분도 있다라고 대답하게 될 텐데 (마치 천동설, 지동설과 같이), 그것은 진리라는 것을 인간이 발견하는 과정에서 또 해석하는 과정에서의 상대적인 변화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이 부분부터 짚어보기로 하자.


첫 번째 질문이다. 진리는 본래의 모습으로 전달될 수 있는가?


진리의 모습에 대한 전달을 이해하기 위해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데아론에서는 우리가 감각하는 세계가 단순한 그림자이며, 실제 진리는 초월적인 세계에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즉, 우리가 보고 듣고 경험하는 모든 것은 완전한 본질(이데아)의 불완전한 모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동굴의 비유를 들었다. 동굴 속에 갇힌 사람들이 벽에 비친 그림자만을 실제라고 믿는 것처럼, 인간은 감각적으로 인식한 현실만을 진리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철학자는 동굴을 벗어나 진짜 세계(이데아의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존재다.


이 개념을 갈릴레오나 케플러가 도입한 개념으로 확장해 보면, 플라톤의 논리는 자연의 법칙이나 종교적 진리에도 적용될 수 있다. 만약 우주의 본질이 수학적이고 기하학적이라면, 그것은 단순히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발견해야 하는 진리일 가능성이 크다. 갈릴레오는 "자연의 책은 수학의 언어로 쓰여 있다."라고 말하며, 우주의 법칙이 본질적으로 수학적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강조했다. 그리고, 케플러는 "신은 기하학을 통해 우주를 창조했다."라고 했다. 하지만 대다수의 인간은 수학적, 기하학적 사고를 직관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며, 그것을 인문학적인 언어로 해석하여 받아들인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발생한다. 진리가 번역되는 과정에서 왜곡되지 않는가?


두 번째 질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진리는 어떻게 해석되고 왜곡되는가?


우주의 법칙이 수학적이라면, 신의 뜻 역시 순수한 형태로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인간이 그것을 직접 이해할 수 없다면, 신의 계시는 반드시 중간 매개자를 통해 전달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신의 뜻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한 사람들은 예언자, 선지자 등의 메신저였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 역시 인간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이다.

신의 계시를 받은 사람이 그것을 자신의 언어, 문화, 경험에 맞게 해석한다면?

그 사람이 속한 사회의 정치적, 종교적 상황이 그의 해석에 영향을 미친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원래의 계시가 조직화되고, 체계적인 교리와 제도로 변한다면?


이러한 과정에서 신의 순수한 뜻이 왜곡될 가능성이 크다. 마치 순수한 수학적 진리가 인간의 언어로 번역되면서 원래의 의미가 달라질 수 있는 것처럼, 종교적 진리도 인간의 경험과 역사적 환경 속에서 변화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세 번째 질문이다. 종교적 계시는 본래의 신의 뜻인가?


챗GPT에 물어보니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진 철학자들은 과거에도 존재했다고 한다. 스피노자는 신의 뜻이 성경을 통해 전달되었을지라도, 그것이 인간의 정치적·사회적 이해관계에 따라 변형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고 하며, 칸트는 종교적 진리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 사고를 통해 검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포이어바흐는 아예 "신의 개념이 인간의 심리적 투영일 가능성이 있다"라고 보았으며, 카를 바르트는 성경이 신의 계시를 담고 있지만, 그것이 인간의 언어로 표현된 순간부터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고 한다.


이러한 철학자들의 공통된 시각은, 진리가 전달되는 과정에서 인간의 해석이 개입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점이다. 인간은 신의 언어(수학적 질서, 보편적 법칙)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자신의 경험적·문화적 방식으로 번역하려 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왜곡과 변형이 일어난다.


이것은 역사적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기독교 초기 교리는 예수의 가르침에서 출발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로마 제국의 영향 아래 조직화되었고, 이후 수많은 신학적 논쟁과 종교 개혁을 거치며 변형되었다. 이슬람교도 무함마드의 가르침이 원형 그대로 유지되지 않고, 역사적·정치적 이유로 시아파와 수니파로 분열되었고, 현재까지 다른 입장을 갖고 있다. 불교 역시 초기에는 단순한 가르침이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대승불교, 선불교 등 다양한 종파로 나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즉, 모든 과정에서 원래의 계시와 교리는 인간의 해석을 거쳐 변화했으며, 그것이 신의 순수한 뜻인지 아닌지는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인간이 신의 진리에 다가가기 위해 필요한 태도는 무엇인가?

만약 신의 진리가 수학처럼 변하지 않는 보편적 법칙이라면, 인간이 그것을 이해하는 방법은 단순한 신앙이 아니라, 탐구와 이성적 사고가 되어야 한다.


첫째, 맹목적인 믿음보다 철학적 탐구가 필요하다.

단순히 종교적 권위를 따르기보다, 신의 뜻이 정말 무엇인지 고민하고 성찰해야 한다.


둘째, 종교적 진리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본질을 탐구해야 한다. 종교는 시대와 환경에 따라 변해왔고, 신의 뜻이 인간의 해석을 통해 조직화된 것이라면, 우리는 그 본래의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마치 과학을 연구하는 것처럼, 신의 진리를 찾는 과정도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논리적 탐구와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셋째, 진리는 해석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인간이 신의 언어(수학적 질서, 보편적 법칙)를 직접 이해할 수 없다면, 우리는 그 해석 과정에서 왜곡이 발생할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즉, 우리는 신의 뜻이 무엇인지 고민할 때, 그것이 인간의 역사적 경험과 관념을 통해 필연적으로 변형되었을 가능성을 인정해야 한다.


정리해 보자. 신의 진리는 어디에 있는가?


이 글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 시작하여, 자연의 법칙이 수학적이라는 점을 논의했고, 이를 바탕으로 신의 뜻이 인간에게 어떻게 전달되는지에 대한 문제를 탐구해 봤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그의 뜻은 절대적이고 완전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것은 해석되고 변형될 가능성이 크다.

신의 진리를 찾는 것은 단순한 신앙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주의 법칙을 탐구하는 것처럼 철학적이고 이성적인 탐구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진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논리적이고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지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신의 뜻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종교적 체계 또는 그것을 주도하는 사람 또는 단체의 이기적 사고에 기반한 정치적 입장을 따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요즘 보니 미국도 그런 듯하다) 그러한 사례를 너무나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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