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과 진지 사이
7년 즈음 전에 블라디보스토크에 아내와 함께 놀러 간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블라디보스토크 시내는 관광지여서였는지 어찌어찌 영어로 소통을 하면서 잘 다녔는데, 우수리스크라는 좀 더 북쪽의 도시로 이동하기 위해 기차역에서 표를 예매할 때였다. 역무원이 영어가 안되어, 구글번역이었나 아무튼 온갖 수단을 다 동원했음에도 표를 사는 곳을 찾는 것부터 왕복표를 구매할 때까지 1시간 반정도 걸릴 정도로 꽤나 애먹었던 기억이 있다.
지금이라고 생각해 보면, 아마도 챗GPT나 스마트폰에 온디바이스로 제공되는 실시간 통역기능을 이용했을 것이고, 그랬더라면 수월하게 해결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되는 재미있던 추억이다.
요즘의 일상에서도 업무를 하거나, 해외기사를 볼 때에 AI를 이용한 통번역을 사용할 때가 종종 있는데, 수년전과 비교하면 이제 꽤나 잘하고 있어서 굳이 영어를 또는 외국어를 배워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영화 '설국열차'에서 펜던트 같은 것을 목에 대고 말하면 번역해 주는데, 지금도 펜던트는 아니지만, 대신 스마트폰을 이용하면 되니, 바야흐로 AI 통번역 시대가 온 것이다.
*사실 현재 기술로도 펜던트모양의 온디바이스 기기로 못 만들 이유도 없겠다는 생각이다.
문득 생각한 외국어라는 것을 구사함에 있어 단계를 나눈다면 이렇지 않을까 싶다.
1단계 : 의사소통 못함
2단계 : 어느 정도 필수적인 의사소통 가능
3단계 : 유창한 의사소통
4단계 : 상대와 공감대 형성가능
나의 단계를 정하자면 2단계 정도 수준일 것 같다. 유창하지는 못할뿐더러, 말하기보다 듣기 능력이 좋지 않은데, 10년 즈음 전부터는 굳이 영어공부를 더 하지 않고 있다. 이유는 전에 올렸던 글에도 적었다시피, 회사 내에서 고객사 고위층에게 감사메일을 보낼 때 목격한 굉장히 유창하면서도 격식 있는 언어를 구사했던 사람을 보고 나서는, 내가 아무리 공부한다 해도 비즈니스 영어세계에서 내가 그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기에, 그냥 현 수준을 유지하고 당시 미래에 AI 통번역의 발달을 기다려야겠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그 사람이 내 생각으로는 4단계 정도의 수준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업무상으로 여러 사람들과 소통을 하다 보니, 요즘 느끼는 나의 생각은 위의 단계가 사실 외국어뿐 아니라 모국어에도 적용되는 즉, 모든 언어라는 것에 적용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언어구사를 통한 대화라는 것이 의사소통을 위한 가장 중요한 수단 중 하나로, 단순히 나의 말을 전하고, 상대방의 말을 알아듣는 것이 1차적인 목적이겠으나, 궁극적으로는 상대방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최종 목적이 아닐까 생각해서다.
우리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이니 모두들 한국어야 아주 유창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회사에서(회사에 다양한 사람들이 많다 보니) 대화나 통화를 하기만 하면, 상대방의 화를 돋워서 싸우는 사람들이라던가, 메일을 보면 어떤 의도로 적었는지 맥락도 없고, 의도한 내용도 모호한 사람들이 적지 않게 목격되는데, 이것을 보면 위에 말한 언어의 단계가 3단계 : 유창한 의사소통이라고 해서 꼭 그 나라의 언어를 정말 잘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상대방의 입장이나, 대화소재의 배경에 대한 이해도를 고려해서 대화하는 능력 즉, 공감능력이 없는 사람은 언어를 아무리 잘해도 AI통번역과의 차별점 없다는 것이다. 이런 유형의 사람은 외국어를 잘하더라도 그 나라 사람들과 표면적인 상호의사 전달만 할 수 있을테고, 심지어 자국인과의 대회에서도 공감대 형성을 못해서, 상호 만족하거나 원하는 결과를 얻는 대화를 못하는 사람들일테니까 말이다.
그렇기에 AI시대에 외국어를 한다는 것은 최소한 우리 세대가 배워왔던 언어의 구사능력을 현지의 발음으로 잘해야 한다는 그런 것을 전제로 할 것이 아니라, 먼저 상대방 국가의 문화와 그 문화에서 자란 사람에 대한 이해를 하는 능력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고, 비단 이것은 외국언어 영역이 아니라, 사회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의 공통된 역량으로 키워져야 할 것이라고 본다.
결국 AI 통번역 시대에 필요한 것은 어린 나이에 영어유치원에 보내서 유창한 혀굴림으로 말하는 것을 가르치기 전에, 사람과 사람 간의 교감과 공감능력을 키워, 상대의 문화나 입장을 이해하는 상황에서 그 나라 언어를 구사해야지만, 앞으로 더욱 발달할 AI통번역보다는 우위에 있구나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다.
덧붙임. 이렇게 적었지만, 저도 말하다 보면 내 주장만 하는 경우가 있으니, AI보다 나은 사람이 되려면 더 반성을 해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