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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가져도 괜찮은 사회에 대해

사색과 진지 사이

by 오영

기술과 인공지능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해 가는 시대, 앞으로 전개될 사회의 변화를 바라볼 때, 우리는 더 이상 과거 산업화 시기의 인구정책을 반복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출산율 관련 내용을 노키즈인 내가 언급하기에는 여기저기에서 불편한 소리를 들을 수 있겠으나, 기술발달과 사회유지라는 상호 이질적 측면에 관심이 많은 오영 씨이기에 감히 위의 주제로 글을 적어보고자 한다.


출산율 저하는 단지 국가의 경제성장률을 떨어뜨리는 문제가 아니다. 이는 공동체의 구조와 미래 세대의 지속 가능성, 나아가 인간의 삶과 존재 방식에 대한 총체적인 질문이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가 논의해야 할 저출산 해법은 단순히 '나이가 들면 결혼을 해야 한다', '결혼을 했으면 아이를 낳아야 한다'라던가 ‘얼마나 낳을 것인가’가 아니라 ‘왜, 그리고 어떻게 아이를 낳고 기를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 전환이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저출산과 관련해 '아이를 갖도록 하는 사회', '가질 수 있는 사회' 그리고 '가져도 괜찮은 사회'의 차이점과 그에 따른 질문을 해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먼저, '아이를 갖도록 하는 사회'다.


이 사회는 출산을 유도하기 위해 다양한 경제적 인센티브를 제공한다. 자녀 수에 따라 세금을 감면하고, 출산장려금을 지급하며, 때로는 비출산자에게 경제적 부담을 더 부과함으로써 출산을 장려한다. 이는 마치 경제적 선택지로서의 출산을 제안하는 사회이다.


분명 단기적으로는 효과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출산을 하나의 '이익과 손해의 계산'으로 환원시키는 순간, 아이는 축복이 아닌 다른 수단이 된다. 더구나 이러한 접근은 사람들 사이에 '출산의무'라는 사회적 압박을 조성하며, 아이를 낳지 않은 이들을 암묵적으로 비정상으로 규정하게 됨으로써 출산의 자유를 해치는 비윤리적 구조가 되어 결국 지속 가능한 해법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둘째,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사회'다.


여기서 관점은 바뀐다. 이제 출산은 강요의 대상이 아니라 가능성의 문제다. 아이를 낳고 싶은 사람이 실제로 낳을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는 것이 국가와 사회의 역할이다. 육아휴직, 보육시설, 교육비, 주거비 등 실제 삶의 무게를 덜어주는 정책들이 이 사회를 구성한다.

그러나, 이 역시 전제가 있다. '아이를 갖고 싶다'는 욕망이 여전히 살아있을 때만 가능한 이야기다. 과도한 경쟁사회, 고립된 도시생활, 미래에 대한 불안 속에서, 사람들은 아이를 낳을 용기조차 잃게 될 수 있다. 그래서 '가질 수 있는 사회'는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이 되지는 못한다.


게다가 기술 발전으로 노동의 절대량이 줄어드는 오늘날, 과거처럼 출산을 통한 생산력 확보 논리는 점점 설득력을 잃게 되며,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노동인구는 사회가 책임져야 하는 계층으로 변화될 뿐이다. 이제는 단순히 인구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구조와 속도로 인구를 구성할 것인가에 대한 전략이 중요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다음 단계의 사회상이 요구되는 것이다.


바로, '아이를 가져도 괜찮은 사회' 다.


진정한 변화는 여기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괜찮다’는 말은 단순한 허용이 아니라,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이 개인과 가정의 고통이 아니라 기쁨이고, 사회적으로 존중받는 행위이며, 공동체에 긍정적인 파장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라는 전제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이 사회에서는 출산이 ‘노동인구의 생산’이나 ‘소비인구의 증가’라는 기능적 이유를 넘어서, 공동체의 회복, 정서적 유대, 삶의 의미를 창출하는 행위로 받아들여진다. 육아는 모두의 책임이며, 비혼부모, 다문화가정, 공동양육 모델도 차별 없이 존중받는 사회를 말한다.

기술이 노동을 대체하는 시대에는 오히려 인간의 감정, 관계, 공동체성 등 윤리적인 부분이 더 중요한 요소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디스토피아적인 SF영화에서 보아온 그런 사회로의 변화를 방지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결국, 앞으로의 관점에서 '아이를 가져도 괜찮은 사회'란 결국 인간을 ‘일하는 존재’가 아니라 ‘존재하는 존재’로 존중하는 사회이며, 이 사회가 아이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곧 그 사회가 인간을 대하는 철학을 보여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존재를 위한 사회를 지향해야 하기에 서로에게 '누가 얼마나 많이 낳느냐’를 묻기 전에, ‘누가 태어나도 괜찮은 사회인가’와 '태어난 아이들과 보살피는 가정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화합할 수 있는 사회인가' 를 먼저 묻는 태도가 필요하다. 출산은 사회나 국가가 강제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이제 개인이 홀로 감당할 수 있는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관계의 선택이고, 미래를 향한 신뢰의 표현이다. 그래서, 국가의 역할은 국민에게 아이를 낳으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낳고 싶을 때 ‘괜찮다’고 말해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갖도록 하는 사회’에서 벗어나 ‘가질 수 있는 사회’를 지나, ‘가져도 괜찮은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출산율이라는 숫자보다 더 중요한 질문을 만날 것이다.


바로, “우리는 누구를 위해 어떤 사회를 만들고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덧붙임. 최근 일련의 뉴스에서 보는 인공지능의 발달, 출산율의 과제와 '견부견자'에 해당하는 이슈들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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