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과 사색
죽음은 지성을 깨우친 인류의 역사에 있어 가장 두려운 공포의 대상이자 오랜 시간 동안 풀어나가고자 했던 과제이다.
죽음을 인지한 순간부터 종교가 시작되었으며,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과학의 토대가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초의 신화라고 알려진 수메르의 길가메시 서사시의 내용조차 절친의 죽음을 목도하고는 영생을 찾고자 노력하는, 그러나 결국 죽음을 피할 수는 없던 주인공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을 보면 오랜 시간 인류가 죽음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 알법하다.
신화를 벗어나 실제 역사에서 권력 또는 능력을 가진 적지 않은 이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죽음을 극복하고자 했으나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 인류는 드디어 축적된 과학의 힘을 빌어 죽음을 피하는 또는 삶을 연장하는 것에 대한 가능성을 옅보고 있는 시점까지 와있게 되었다. 그 방식이 과연 어떤 방식이 될지는 장담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죽음이라는 것은 인류에게 저주인 것인가? 저주가 아니고서야 오랜 시간 이것을 피하고자 하는 노력들이 설명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영생 또는 상상하기 어려운 긴 삶이라는 것은 축복인가? 많은 사람들은 건강과 삶을 유지하기 위한 재력이 담보된다면, 그것은 축복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타인의 죽음을 지켜봐야하는 고통과, 어떤 형태든 삶의 변주를 계속 이어나가야 한다는 것은 꼭 즐거운 일만은 아닐 것 같다. 마치 모리스 라벨의 유명한 볼레로라는 곡이 변주가 계속되고 끝나지 않는 곡이라면 어떤 곡으로 받아들여질지 상상하면 비슷하지 않을까?
영원히 계속되는 것은 아름답지 않다.
아름다운 것은 변화가 있기에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 줄 수 있는 상대성이 있기에 증명될 수 있는 명사랄까. 그래서 내 생각에는 영생이라는 것이 축복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영원히 아름다울 수 없으니까 말이다.
삶은 탄생과 함께 죽음이라는 것으로 마무리되어야 하는 것이며, 인간뿐만 아니라 생명을 가진 모든 개체는 그 과정을 겪어나갈 뿐이다.
그 과정에 있어, 고난과 역경으로 가득 차 있었다면 안타깝게도 죽음의 순간이 해방으로 받아들여질 이도 있을 테고, 그 순간조차 삶을 저주로 마감 짓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게다. 반대로, 그 과정이 행복과 즐거움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죽음의 순간은 아름다웠던 삶을 느끼게 해주는 순간이 되기에 선물로 생각하는 이도 있을 테고, 행복함을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로 마무리짓게 하는 저주로 받아들이는 이도 있을게다.
시간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기에 자신에게 있어 비교가 되는 죽음을 보게 되겠지만, 필연적으로 맞아들일 수밖에 없다면 삶에 있어서 예기치 못한 갑작스러운 죽음을 피했고 자연스럽게 오는 그 순간이 되었다면, 비로소 축복으로 여길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그 순간을 맞이할 때 고통스럽거나, 슬프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삶을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덧붙임. 최근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영화 프랑켄슈타인을 본 후, 인간이라는 존재와 삶에 대해 생각을 해보는 계기가 되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