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먼저 감을까, 몸부터 씻을까. 양치부터 할까? 각자의 정해진 루트가 있겠지만 그날의 게으름과 기분 탓에 따라 바뀌곤 한다. 지극히 사적인 시간, 온갖 상상과 내일의 계획과 어제의 후회와 오늘의 감정을 고스란히 남긴 채 따뜻한 물에 흘려보내고, 싱그러운 향기에 파묻혀 머리부터 발끝까지 손길을 전달하는 시간. 중얼중얼 혼잣말을 하기도 하고, 그때 왜 그랬지 왜 그랬지를 되뇌기도, 괜히 헛웃음을 칠 때도 있지. 다행히 샤워할 때 노래를 부르는 편은 아닙니다. 그저 멍하니 물줄기를 맞고 있는 시간이 안정적으로 느껴지곤 한다.
어릴 적엔 샤워하는 게 싫었다. 싫다기보단 그 나이에 느낄 수 있는 약간의 두려움이라고 해야 하나. 거실보다 좁고, 부엌보단 정이 없고, 내 방보다는 딱딱한 느낌의 욕조라는 곳에서 엄마의 손에 잡힌 채 일정 시간을 서있어야 하는 것도 답답했고, 눈에 보이는 비누거품은 즐겁다가도 눈에 들어가면 눈물이 주륵 흐를 수 있다는 사실이 싫었다. 무엇보다 샤워기를 잠그고 마지막에 떨어지는 한두 방울 똑똑 물방울 소리가 이상하게 두렵더라. 해바라기 모양의 헤어 캡 끝으로 떨어지는 물줄기를 보며 언제쯤 따뜻한 이불 속에 들어가서 잘 수 있을까 생각만 한 것 같다.
이후에도 샤워는 그저 샤워였다. 중학교 땐 거울 앞에 유난히 오랜 시간 서서 얼굴에 난 트러블과 구석구석을 째려보고 머리 스타일을 이래봤다가, 저래봤다가, 결국엔 따뜻한 물에 다 헹궈버리는 시간이었고, 고등학교 땐 전쟁터처럼 분주하게 하루를 시작하는 행위였다. 아침에 누가 먼저 욕실에 들어가느냐의 작은 눈치싸움으로 가족들의 여유는 달라지곤 했다. 씻는다는 건 그저 필요에 의한 과정이었으니까. 스무 살 이후 독립을 하며 서서히 달라졌나, 욕실과 샤워. 가장 사적인 시간이자, 혼자 사는 자취방 안에서도 가장 프라이빗 한 공간. 어느새 가장 편안한 나만의 것.
쏴아아 떨어지는 물소리를 듣고 있으면 한두 마디 입가를 맴도는 혼잣말 따위 시원하게 묻혀버리는 것 같다. 머리부터 전해지는 뜨거운 열기, 그리고 포근한 샴푸 향이 섞이면 다른 시공간이 떠오르기까지 한다. 이런 걸 영감이라고 하나, 후회라고 하나. 물을 잠그고 수건으로 몸을 감싸기 전 그 짧은 시간이 너무나도 서늘해 조금만 더- 몇 초만 더-를 되뇌며 쪼글쪼글해진 손가락을 볼 때면 오늘 하루도 이렇게 끝나긴 끝났구나 생각한다. 잠들기 전 샤워일수록 괜한 여유는 길어지기만 하지. 거울 속 젖은 머리카락과 밋밋해진 얼굴 그리고 어깨까지의 나와 마주 보며 이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건 아직 이 좁은 구조를 벗어나지 못했단 뜻인데, 선반이 두 개쯤 더 있고 무엇보다 온 몸을 푹 담글 수 있는 욕실을 꿈꾼다.
오늘도 평온하게. 러쉬 매장에서 본 문구. '준비하시고, 샤워하세요'
사진은 언젠가의 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