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BEEF> 를 보고.
순간은 모른다. 내가 무엇을 억누르고 있는지. 매일 마주하는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무엇이 결핍되어 있는지, 왜 쌍방의 노력으로도 해소되지 않는지. 눈에 보이는 영역이 아니었다. 왜 함께 울고 웃고 사랑을 나누고 상처를 주면서도 빈 벽에다 대고 소리를 지르는 공허함이 느껴지는 건가. 쉽게 분노하고 눈물이 차오르고 한껏 움츠러든다. 상대를 속이고 스스로는 더 큰 거짓말을 하고 지금까지의 관계와 존재를 부정한다. 그렇게 분노인지 증오인지 결핍인지 모르는 감정을 밖으로 표출하고 나면 한없이 작아진다. 이렇게 오늘도 죄를 짓는다. 나는 사람이니까, 우린 인간이니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쉰다. 무언가 가라앉히기 위한 심호흡. 항상 심호흡 뒤엔 작든 크든 어떤 결정이 뒤따른다. 확률은 오십 대 오십. 나에게 솔직한 결정이거나 다시 한번 나를 속이는 결정이거나. 전자라면 직면의 심호흡, 후자라면 또다시 외면의 심호흡이 된다. 혼자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커져버린 죄의식은 타인의 고통으로 전가된다. 불을 지피고, 태워버리고, 던져버리고, 깨트린다. 새들은 노래하는게 아니래, 고통에 울부짖는 거래. 첫 에피소드의 타이틀이 대부분의 삶을 함축했다. 그리고 상대에게 던지는 한마디. 당신 좋은 사람이야.
연인과 부부. 엄마와 딸. 형제자매. 가족. 그 밖의 친구. 동료. 정의하기 애매모호한 수많은 사회적 굴레 안의 관계. 조건 없는 사람 간의 관계는 진정으로 존재할까. 에이미는 마지막까지 지켜야만 했던 유일한 존재 딸로부터 마저 조건부 사랑을 느낀다. 반면 잠시나마 스스로를 솔직하게 표현했던 대상은 책임감이 존재하지 않아도 되는, 곧 사라져 버린대도 이상하지 않을 유대감을 가진 존재들이다. 심지어 가상세계와 환상에만 존재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그 과정 찰나에 마주하는 내 스스로의 모습은 더 추악하다. 고요하게 따라다니며 속삭이던 그 악마 같은 존재.
나 누구야? 우리 누굴까. 죽음 앞에 놓였다고 생각한 채 에이미와 대니는 환각 속의 서로가 되어 대화를 나눈다. 내가 나에 대해 말하는 것인지, 네가 나에 대해 말하는 것인지, 각자가 모두의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결국 우리의 존재는 이제야 교집합 속에서 대화를 나눈다. 진심어린 미소로 서로를 이해한다. 드디어 스스로와 마주한 것. 마주하기까지 슬플만큼 추하고 아름다웠다. 여전히 이건, 작품의 리뷰도 감상평도 아니다. 에이미의 삶과 대니의 삶, 등장한 수많은 인물들의 삶이 우리의 시선이었고 내 죄의식과도 맞닿아있던 어떤 삶의 정리. 멀리멀리 드라이브를 가서 버거킹 햄버거를 먹고 싶은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