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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피생 Jul 13. 2024

피하면 낙원이 있을 거란 착각

평소 눈여겨봤던 법원 도서관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버스를 갈아타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한 번에 집으로 가는 버스를 검색하고 있었다. 한 번에 가는 버스가 2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횡단보도를 건너자마자 정류장에 도착했다. 이때다 싶어 재빠르게 탔고 그렇게 집으로 가는 듯했다. 그런데 집까지 얼마 안 남은 거리에서 갑자기 버스가 다른 길로 향했다. 왜지?라고 생각하며 지도를 확인하는데 아뿔싸! 급한 마음에 다른 버스를 타버린 것이었다. 너무 더웠던 탓일까. 얼른 집에 가고 싶었던 마음이 오히려 나를 집과 멀리 떨어뜨리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버스가 방향을 꺾자마자 벨을 누르고 내렸어야 했다. 그런데 그때의 나는 그냥 그대로 앉아있었다. 처음에는 이러다 집 방향으로 가겠지라는 마음이었다가 집과 계속 멀어지기만 하자 그냥 갈 때까지 가보자는 마음이었다. 그렇게 계속 버스는 반대 방향으로 가고, 사람들도 많이 타서 거의 만원 버스가 되었다. 어디서 내릴까 고민하다 이 많은 사람들이 한 번에 다 내리는 곳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럼 거기서 내려보자는 결론에 다다랐다.


앉아서 사람들이 많이 내리는 정류장만 기다렸다. 그런데 사람들이 내리기는커녕 점점 더 타기만 했다. 심지어 앞문으로 타지 못해 뒷문으로도 마구마구 들어왔다. 이러다 정말 이 버스의 종점까지 갈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내 옆에 앉으신 분이 내릴 때 같이 내리자고 마음을 바꿨다. 왜냐면 옆에 앉으신 분이 곧 내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두 정거장을 더 갔을까. 옆에 분이 짐을 챙기고 일어나시기에 나도 같이 일어났다. 그리고 하차문에 몰려있는 사람들을 뚫고 겨우 버스에서 내릴 수 있었다.


사실 나는 종종 버스를 타고 막연히 가다 모르는 곳에서 내리면 또 다른 모험이 시작될 것 같은 상상을 했다. 그런데 막상 내리고 보니 정말 별거 없었다. 새로운 모험이라는 두근거림 보다 얼른 내가 익숙한 곳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두려움이 컸다. 영 모르는 곳에 떨어지고 나서야 내가 했던 건 상상이 아니라 환상이었고, 내리는 걸 회피한 끝에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


종종 그럴 때가 있다. 내 삶이 뭔가 이상한 방향으로 간다는 걸 느끼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잘못된 걸 알면서도 그냥 그 상태가 편하니까 가만히 있는다. 내가 버스에서 집으로 가고 있지 않는 걸 알면서도 일어나기 귀찮고 더 괜찮은 곳이 있지 않을까 싶어 앉아있었던 것처럼. 그런데 결국 회피한 곳에 낙원은 없다. 애초에 내가 가고 있던 방향이 잘못되었는데 더 나은 선택지가 존재할 리 없다. 


일어나는 것보다 앉아있는 게 훨씬 편하니까 그대로 있었다면 나는 정말 가본 적 없는 종점까지 갔을 수 있다. 종점은 나에게 새로운 곳이지만, 내가 있을 곳은 아니다. 결국 다시 같은 버스를 타고 내가 가야 할 목적지인 집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굳이 그 긴 거리를 다시. 회피의 환상에 빠져있던 나는 이 일을 통해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단 걸 깨달았다. 편안함이라는 의자에 앉아 환상에 빠져 있을 시간에 과감히 내리겠다. 잘못 탄 버스는 빨리 내릴수록 목적지에 가깝다는 사실을 잊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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