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의 회피학 下
가끔 그런 날이 있다. 무슨 짓을 해도 더 이상 내 삶이 나아질 것 같지 않은 기분이 드는 날. 이 기분은 내가 살면서 겪는 우울의 종류 중 가장 위험하고 깊다. 이제 내 우울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깨달은 것 같다가도, 이런 기분이 들면 다시 어쩔 줄 모르게 된다. 나는 매일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고 그래서 더 나은 매일을 보내려고 노력하는데 그게 다 소용없이 느껴지면 정말 말 그대로 살기 싫어진다. 사는 걸 회피하고 싶을 때 회피형 인간인 내가 택하는 방법이 딱 하나 있다.
사는 걸 회피하고 싶을 정도로 우울이 치달을 때, 나는 걷는다. 헤드셋이나 이어폰 같이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걸 챙겨서 밖으로 나간다. 최대한 아침이나 낮이 좋다. 그래야 햇빛을 받으면서 걸을 수 있다. 그렇게 밖으로 나가면 일단 목적지를 정하기 보다 몇 시간을 걸을지 정한다. 때에 따라 다른데, 보통 우울이 깊거나 스트레스가 많이 쌓이면 편도 1시간 반 정도 걷는다. 우울한 기분에 맞춰 슬픈 노래를 듣거나 가사 없는 클래식을 들으면서 걷는다. 정말 말 그대로 하염없이 걷는다.
걷는 건 방법이 따로 있지 않지만 기분이 좋지 않을 때 걸으면 내가 꼭 지키는 게 있다. 바로 ‘주변을 보면서 걷기’다. 아침이나 낮에 걷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자주 걷는 산책길에는 나무가 많다. 햇빛을 받아서 색을 뿜어내는 나무를 보면 왠지 모르게 기분이 조금 풀린다. 그리고 조금 더 걷다 보면 강이 하나 나오는데, 빛을 받아 반짝이는 윤슬을 바라보면 평온해진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나무 그림자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도 구경한다. 그림자가 일렁일렁 나에게 손 흔드는 것 같은 착각을 하며 조금씩 힘을 되찾는다.
걷기 전에는 삶 그 자체를 회피하고 싶었지만, 걷고 나면 이 삶을 가지고 도망이라도 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렇게 좋은 날씨라면 잘 도망칠 수 있을 것 같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온다. 그렇게 궤도를 벗어난 나의 삶이 천천히, 다시 돌아오는 걸 느낀다. 한번 무너진 마음은 걸으면서 단단히 다져놓으면 당분간 다시 무너질 일은 없다. 오래오래 걸은 만큼 견고하게 되었으니까. 다시 무너진다고 해도 개의치 않는다. 그러면 다시 마음이 풀릴 때까지 걸으면 된다.
사는 건 가끔 행복하고 자주 힘들다는 말을 본 적 있다. 요즘 나를 생각하면 거의 진리와 같은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취업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지금, 수많은 거절과 무응답에 지쳐서 힘든 순간이 많다. 하지만 이렇게 틈틈이 행복을 주워 담아 놓으면 그게 다시 나를 일으킨다. 삶이란 힘들지만 가끔 행복한 것이기도 하고 더 나아질 것 같지 않은 내일도 막상 걸어보면 조금은 나아지기도 하니까 너무 우울해지지 않으려 한다.